회심을 경험한 나는 그간 나의 소원을 아뢰기위해 기도하였던 것이 이젠 주님 만나는 기쁨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기도하기 위해 나를 일으켜 세웠던 것이 이젠 기도가 나를 일으켜 세우게 되었고, 찬양하기 위를 나를 추수리던 것이 찬양이 나를 추수리기 시작했다. 물론 하나님 품속에 어린아이처럼 안겨있는 나임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종일토록 찬양함의, 그리고 종일토록 주님과 대화함의 기쁨도 좋았지만 새벽시간, 그 새벽 첫 시간 주님과 마주앉아 대화를 시작할 그 시간이 맘 설레이며 기다려졌다. 잠 자리에 누울 때면 맞이하게될 아침의 시간 때문에 또 벅찬 심경으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했다. 눈만 뜨면 새떼처럼 독촉하는 빚쟁이들로 인해 전화벨 소리만 들으면 새 가슴인 나는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누를 길 없었다. 하지만 전에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라져 버린 것이 특이했다. 그 시기(회심하기 전)에 유난히도 유명 탈란트들이 자살을 잇달아했었다. 그렇게 용기있는 저들이 나는 참 부러웠었다. 현실은 죽음보다 더더욱 아팠기에 그러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 때 친정식구들이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자살소동에 혹여 우리부부가 동요될까 보아서 너무도 불안했었다고 한다.
영혼의 기쁨은 가슴 미어질 듯 하였으나 현실은 고통, 내 모습은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같았다. 천국되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심은 가슴벅찬데 현실은 어찌해얄지... 정말 천국을 칼로 무우 자르 듯 딱 잘라 보여줄 수 없는 내안에서의 세상과 천국의 범벅은 아직도 나의 상태를 말씀에 비추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던 나는 또 나에게 어찌 설명이 되어지지 않았었다. 너무도 평온하고 기쁜 영혼만큼 현실도 그리되었으면 참 좋을터인데 하는 그런 아쉬움이 늘 있었다.
그런 바램, 그 현실의 고통의 마침을 위해 기도할 때 환상 가운데 하얀 실패를 보여주셨다. 선뜻 이제 실을 실패에 차근히 감아가시는 것을 가르쳐 주심 아닌가 싶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회심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였다.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나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엉클어져버린 실타래만큼이나 어지러져 있었고 여인네의 엉켜진 머리카락만큼이나 어수선하였었다. 그런 영혼을 이제 주님께서 가지런히 풀어가시며 실패에다가 차근히 감아주시겠다는 그런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하지만 이 조급증은 시간을 단축해 주십사 기도했고 또 보상론에 젖어있던 나는 나중엔 고생한 것 이상으로 보상해 주십사 여전히 기도하고 있었다.
운영자님께 상담을 드렸을 때, 이젠 어려움을 잘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이란 말씀이 생각이 났다. 사실 이젠 고난이 끝났습니다. 그간 여러 고통들을 참 잘 견디셨습니다.... 뭐 그런 대답을 주셨으면 참 좋았을터인데 앞으로도 고난은 계속될 것이고 고난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것이라는 말씀 같았다. 그 말씀이 좀 서운하게 여겨졌다. 그만큼이나 나의 옛자아는 고집스럽고 껍데기 질긴 상태 그대로였다. 그리고 엉클어져 있는 실타래, 엉켜진 머리카락의 상태가 그저 편안하고 좋은 육신이였다. 그런 나를 주님은 썩어진 살을 도려내시 듯, 어수선하고 엉클어진 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가셨다. 내가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시며...
기회비용까지 계산해가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네, 지금도 가끔... ^^;
어찜이니이까라고 기도할 때마다 아무말씀도 아무런 말씀도 주시지 않는 것 같아서 화도 납니다. 지금도 가끔...^^;
이젠 주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과정이 과정자체가 큰 응답임을 마음으로 조금씩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