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모가남은 여러 가지 부분에서 응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모가나 있다면 소위 말해서 아주 착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못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경제적인 부는 누리지 못 할지라도 늘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또 신앙인격적으로 성숙한 삶이 건강에 모가나 있다면 일찍 죽을 것입니다.
우리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을 잘 압니다.
심은대로 거둡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영적인 축복을 받습니다.
영적으로 축복을 받는 사람이 육적으로 축복을 받을 수 없으며, 경제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영적으로 축복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 경제적인 부분으로 성숙하였을 때 그 경제적인 부가 자기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는가. 모가남을 세부적으로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가 난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잖아요^^)
신앙적인 면속에서도 기도를 잘 하는 사람, 말씀 해석을 잘 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이 풍부한 사람, 전도를 잘하는 사람, 찬양을 잘 하는 사람 등등 이 모든 것이 인격과 조화가 될 때에 비로소 신앙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경제, 사회, 문화, 정치 각 분야 별로 성숙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신앙인격의 성숙입니다.
먼저 신앙인격의 토대 위에 이 모든 것이 더해져야 합니다.
신앙인격의 성숙없는 다른 것의 성숙은 오히려 자신의 고통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성화를 잘 이해하면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가 왜 일찍 죽는지(불행한 삶을 사는 듯이 보이는 지)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앙의 성숙없는 타 종류의 성숙은 자신과 타인을 찌르며 계속 흘러갈 뿐 이므로 전혀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공동체 성화에서 하나님의 벌을 생각 해 보는 측면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대구지하철 화재 사건 등 수백명이 한꺼번에 죽은 사건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거기에 믿음이 좋은 자들도 갑자기 죽었다는 것입니다.
신실한 형제자매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더 낮아진 우리나라 사회도덕성(그들의 악함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더라?)에 대하여 기독교(신앙인)의 책임을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벌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대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벌입니다.
이 벌은 럭비공과도 같아서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믿는 우리 전부에게 해당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무섭고 두려움으로 섬겨야 합니다.
어떤 신실한 자매의 남편이 갑자기 바람이 나고, 어떤 신실한 형제의 부인이 갑자기 바람이 납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아우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하며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산넘고 물건너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전도하러 다녔던 수많은 길목들의 위험들, 그 위험을 무서워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앞지를까 보아 염려하였던 것이였음을 배웠습니다. 그런 염려의 맘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감이란 모든 인간은 신앙인격이 빵점임을, 스스로 돌아보아 정말 죄인 중 괴수임을 깨닫기에 그러한 것 같습니다. 빵점...죄인 중 괴수...그러하기에 십자가 사랑이, 이런 티끌보다 못한 죄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송구스런지, 그래서 매일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을 때 보혈로 덮어주심의 포근함이 어찌나 감사한지 이 무지몽매함을 또 품어주시고 덮어주십사 십자가 사랑 이야기가 있는 이 곳으로 자꾸만 기갈만난 듯 나아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