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를 위한 필수요소 한 가지 더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QT를 하거나 성경묵상을 하거나 진지하게 성경을 가지고 고민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대전제는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실한 긍정적인 관점에서 성경에 대하여 마음껏 부정합시다. 그리고 마음껏 의문을 품읍시다.
진실로 내가 그 말씀들의 의미를 깨닫고 안다고 느껴질 때까지...
다시 말하면 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생길 때 아! 내가 교만한가? 생각하여 덮어 버리지 말고 그 말씀이 이해될 때까지 계속 의문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고 했는데
예수님 아기 시절에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치므로 라마에 있는 아기들이 수십 명 죽었는데, 이 아이들을 죽이지 않기 위하여 애굽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나?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한 것, 그리고 채찍을 든 분노, 모친보다 먼저 죽어 어미의 가슴에 천추의 한을 남긴 것 등 이런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아이 수십 명에 대한 간접살인죄, 폭력죄, 불효죄 이런 것들이 적용될 수 있는 데 성경은 왜 이런 것을 두고도 예수님을 죄 없다 하셨을까?
이렇게 말씀을 이런 각도에서도 생각 해 보고 저런 각도에서도 생각해 보면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이 이해되기 시작하고 그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할 말이지만 마치 도사가 도통할 때 그런 기분입니다-뿅하고-
그 뒤 우연하게 들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내가 그 때 생각했던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고...
그러면 말씀을 통한 신앙성장은 계속됩니다.
말씀을 통한 신앙성장은 유치원생에서 대학원생에 이르는 두 번째 모델에 가깝습니다.
이 모델에서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초등학교 1년생에게 고등학교 1학년 문제를 풀라고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문제를 왜 풀지 못했느냐고 따지시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습에 가장 적합하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삶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하여 초등학교1학년 수준밖에 되지 않는데 왜 중학교 3학년 문제를 풀지 못하냐고 따집니다.
문제의 해결점은 없고 상처만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렇게해야 하지 않냐고 아무리 말해도 또 정답을 알고는 있어도 초등학교 1학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풀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냥 이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가 성장하기를 바라면서 기다려 주어야 하구요.
그가 성장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기다려 주는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하였지만 상처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대부분이 그렇겠지요)
남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줘야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초등학교 1학년이 고등학생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보통 사람이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일이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대학생인줄 알았는데 막상 문제를 풀어보니 초등학생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하여 기대 이하의 반응을 보일 경우
상처 받지 마시고 속으로 픽 웃으세요
아! 그렇구나
이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 초등학교 1학년 수준 밖에 되지 않는구나
이 사람은 기다려 줘야할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초등학교 4학년, 요 사람은 초등학교 3학년 저 넘어 사람은 초등학교 6학년
그러므로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두사람이 부부 관계이면 더욱 사랑으로 그렇게 해야겠지요.
문제는 둘 다 초등학교 1학년인 경우가 문제입니다.
해답이 없죠
답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요구하는 답이 고등학교 수준일 경우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죠.
빈곤의 악순환처럼 대책이 없는 것이지요.
서로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고 하다가 상처만 입는 것입니다.
후일에 어떤 것을 계기로 성장하고 나면 그제야 알겠지요.
왜 그렇게 상처만 남겼는지...
바울이 베드로에게 야단친 사건을 보면 바울이 대학생이고 베드로가 초등학생의 수준이라 이해해얄지요? 아니면 베드로가 참아준 것이 초등학생 정도인 바울을 용납하고 이해하는 넉넉함이라 스스로 생각했을런지요. 그런 기준은 각자의 주관적 생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집니다. 또 눈에 드러나는 종교적인 모습으로도 사람의 기준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 동일한 죄인의 모습 아닌겠는지요. 저를 가만히 들여다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때문에 십자가 앞에 죄인된 부끄럼을 덮어 주십사, 보이지 않지만 분명 속에서 움틀거리는 죄악이 인정되어질 때
또 죄송스러워 한숨지으며 또 십자가 보혈로 덮어 주십사...그렇게 그렇게 나아가 이미 다 아시는 예수님 앞에서만 기쁨을, 소망을, 감사를 얻고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