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3장
20.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ㅡ> 한 가지 악을 더하여(?)
한 가지 악이 무엇인지요?
신자는 누구나 성경읽기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습니다. 일년에 일독 정도는 반드시 하고야 말리라 여러번 다짐을 해보지만 마음의 원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 모세오경을 넘기기가 힘듭니다. 비신자들 중에도 죽기 전에 성경 일독쯤은 해보아야겠다는 이들도 꽤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필사되고 인쇄된 책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세계 인류의 절반 이상이 진리라고 믿는 책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자든 비신자든 한 번을 제대로 읽기가 어렵습니다. 옛스러운 표현과 문장 때문에 이해는 고사하고 술술 읽기조차 버겁습니다. 현대어로 된 표준새번역이 나온지도 삼십년 가까이 되어 가고, 다시 새번역까지 나왔지만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여전히 국한문 혼용의 개역개정판을 씁니다. 한자를 병기하지 않으면 바르게 이해하기도 힘들고 잘 읽히지도 않는 역본을 고집하는 이유로 사람들은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현대어는 왠지 경박해 보이고, 세상과 구별되는 느낌도 들지 않으며, 무엇보다 겨우 귀에 익고 입에 붙은 몇몇 구절들조차 낯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씀이 곧 생명인 성경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역본의 차이에서 은혜가 갈린다면 신자는 모두 히브리어를 배워 구약을 읽고, 희랍어로 된 신약을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한자를 찾아보아야 그 뜻이 분명해지고, 곱씹고 곱씹어도 겨우 의미가 통할지 말지하는 성경을 고집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성경은 어렵다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또 어려워야만 한다는 편견 때문입니다. 궁극의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기에 결코 쉬울 리가 없고, 쉬워서도 안된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편하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역본을 오히려 무시하고 배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성경에서 생명을 발견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합니다. 물론 모든 구절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겐 그럴 능력도,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과 문맥까지도 수수께끼로 여기고 뭔가 심오한 다른 뜻이 있으리라 오해하면, 성경의 본질에서 멀어진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이 가리키는 길을 가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길이 어려운 까닭은 우리 육신의 본성이 본능적으로 회피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살고자 하고,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두가 이미 죽었으며, 죽어야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바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자기부인은 한마디로 자아의 죽음입니다. 율법 앞에 우리는 모두 죽은 자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후 모든 아담은 죽었습니다. 그 죽음이 곧 긍휼이자 은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성경, 나쁜 성경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은혜가 되는 말씀과 그렇지 않은 말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써 있든 희랍어로 써 있든, 킹제임스역이든 NIV든,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합니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베껴 쓰는 과정에 작은 오류는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번역도 원문의 내용과 의미는 물론 어감까지 백퍼센트 살릴 수는 없습니다. 수천, 수만개의 사본이 모두 똑같으리라 기대하고, 똑같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이 완전할 수 있고, 하나님도 실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구원님의 말씀을 향한 열심을 지켜보며 늘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새번역이나 표준새번역 성경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들조차 가끔 어렵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혹,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에 특별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면 목사님께서 조언해주신대로 현대어 역본을 통해 성경을 더 쉽고 풍성하게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구원님의 여정에 성령의 인도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문맥에서 뜻을 찾아야 합니다. 이 구절만 따로 떼어서 해석하니까 요한에게 죄목을 하나 더 추가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구절이 속한 문단은 18-20절로 작은 동그라미로 구분되어 있는데 성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그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보시면 이 구절도 요한이 아니라 헤롯에 대한 설명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앞의 19절에서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제수와 불륜을 저지르고 결혼까지 한 악행)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그가 저지른 다른 폭압 정치)로 인해 요한에게 책망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그 외에 또 요한을 옥에 가두는 한 가지 악을 더했다고 말합니다.(20절) 따라서 그 위에 더하였던 한 가지 악은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둔 것입니다. 제가 전번에 여유가 되면 “표준새번역본” 성경을 구입해 참고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 그 역본은 “거기에다가 또 다른 악행을 보태었으니, 요한을 옥에 가둔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