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가 더 많은 힘을 요구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복수(復讐)의 윤리학
중국 무협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가문의 원수를 대대로 갚는 것이다. 두 세도 가문이 시기 경쟁하다 한쪽이 피해를 입으면 피해자의 아들이 가해자를 찾아가 원수를 갚는다. 이젠 앙갚음을 당한 가문의 후손이 다시 복수를 맹세하고 실행한다. 두 집안은 결국 완전 원수 사이가 되어서 대대로 복수가 이어진다.
최초의 복수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 주는 의미다. 분명 명분이 서는 행위다. 구약성경에도 우연한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정식으로 살해당했다면 형제가, 형제가 없으면 가까운 친척이 피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고의적 살인의 현행범은 구태여 재판을 거치지 않고도 죽일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복수에는 묘한 측면이 있다. 복수가 이뤄지는 순간 곧바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바뀐다. 복수를 당한 쪽에선 자기가 원인제공자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고 복수로 입은 피해만 눈에 보인다. 잘못의 원래 원인은 물론 그 이후 어떤 합당한 근거가 있어도 아예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피해를 봤다는 한 가지 이유로 선하고 억울하다고 여기는 반면에, 복수한 쪽은 무조건 악한 가해자로 간주된다.
반면에 복수하는 쪽은 상대가 입을 피해는 전혀 안중에도 없고 이전의 악을 응징한다고 생각하므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자기 유리한 쪽으로만 판단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는 예수님의 지적에서 자유로울 자는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가해와 피해는 동전의 양면처럼 절대 떨어질 수 없으며 동시에 발생한다. 이쪽의 가해는 저쪽의 피해다. 복수라는 한 가지 행위에 선과 악이 공존할 뿐 아니라, 두 당사자 모두에게도 각각 선과 악이 번갈아 실현된다. 사람 자체가 선한지 아닌지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복수에 어떤 정당한 윤리도 적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최초의 복수가 과하지 않고 정당하게 실행되어 악을 응징한다는 한 가지 의미만 빼고는 말이다.
최초의 정당한 복수는 마땅히 받아야할 벌을 받는 셈이다. 당하는 자의 입장에선 어떤 불만이나 핑계를 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란 참으로 스스로 모순된 존재다. 그 정당한 응징마저 온전히 수용하는 인간은 거의 없다. 상당히 의로운 인간이라야 상호 간에 치러야 할 계산이 끝났으니 앞으로 안 보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대부분은 벌 받아 손해 본 것 자체가 싫고, 상대는 죽도록 미워진다. 거기다 상대가 옳은 것이 확실할수록 분노는 갑절로 는다.
복수가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알기 쉽게 중국 무협영화의 예를 들었지만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병적 증상이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수천 년간 해묵은 분쟁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원수는 일단 그저 싫은 것이다. 끝까지 저주하여 타도할 대상일 뿐이다. 용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상종하지 않는 정도만 되어도 아주 잘하는 짓이다.
미움의 물리학(物理學)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모든 사물이 오직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자기 판단만이 유일한 선악의 기준이 됨으로써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보는 것이다. 당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자기는 선하다고 여기는 복수란 그래서 인간의 타락한 영혼에 완전히 각인되어 있는 보편적 기질이다. 그 기질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 속이라고 없어졌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죄란 자신을 오직 자기중심으로만 더더욱 몰아가며 옭아매는 내면의 가공할 힘이다.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한 행위는 자신이 중심에 서서 높아진 결과적 양상일 뿐이다. 옭아맨다는 것은 도덕적 저항력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킨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자기를 자신의 중심에 그대로 가만히 놓아만 두어도 저절로 죄의 힘은 더 커진다는 뜻이다. 자기가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아주, 아니 최고로 높아진다.
요컨대 죄는 죄를 낳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자가 발전에다 확대 재생산 되는 것이 죄의 가장 큰 특성이다. 주위 사람들이 합리적인 충고를 해주어도, 아니 분명한 잘못을 객관적으로 지적만 해도 오히려 “제가 뭔데!”라는 반발부터 튀어나온다. 자기변명에는 광속과 같이 빠르며, 상대방에 대한 정죄는 더 빠른 초광속으로 작동하는 것이 죄다.
19세기 영국의 작가 올리브 무어가 “증오를 조심하라. 증오는 사랑보다 백배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열정이다.”라고 말했다. 분노 자체가 갖는 열정적인 파워를 말한 것이지, 증오하는데 그만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증오는 일단 생겼다 하면 가만 두어도 저절로 눈덩이처럼 커진다. 원수를 미워하고 있으면 점점 더 미워지고 결국 주체하지 못해 복수의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는 것이 바로 미움의 물리학(物理學)이다.
상기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했다. 엄밀히 따지면 조금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다. 최초에 당한 것은 분명히 악이다. 그럼 그에 상응한 응징을 행하는 것은 선하지 않는가? 당한 만큼 되돌려 준다면 최소한 악은 아니지 않는가? 거기다 아예 더 심한 악을 만들려고 최초의 복수를 시도하는 자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경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복수해도 좋다고 허용했다. 엄격하게 피해 입은 만큼만 보수하라는 것이다. 거기다 실수로 사람을 죽게 만들었는데도 동일하게 죽음으로 벌을 주면 억울하니까 도피성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했다. 살인이라는 외적 결과는 같아도 그 중심에 살인할 의사가 정말로 있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바울의 뜻은 그와는 다르다. 피해를 입은 양만큼 정확하게 되돌려 주는 일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했으니 정당한 복수조차 악이라는 뜻이다. 이어서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만의 몫인데 그 말씀을 어겼다는 것이다. 동해(同害)로 갚는 것조차 이젠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이 된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하나님이 도리어 불합리한 분이 되고 만다. 같은 구약성경 내에서 동해로 보수하는 것은 좋다고 해놓고(출21:24, 레24:20), 동시에 원수 갚는 일은 당신의 일이라고 금지했으니(레19:18, 신32:35) 말이다. 이 두 명령의 차이를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참으로 놀라운 그분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보수(報酬)와 복수(復讐)의 차이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破傷)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찌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레24:19,20) 피해 입은 정도에 따라 정확하게, 다른 말로 결코 부족하지 않게, 보상해주라는 뜻이다. 눈이나 이도 신체의 일부로 사람 자체가 아니며 피해 입은 정도(금액)에 해당될 뿐이다. 따라서 이는 한마디로 피해 보상에 관한 규정이다.
이와 대조해서 원수 갚는 일에 관한 모세 율법의 규정을 보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7,18) 원수 갚는 일을 이웃 사랑과 대조하여 사람을 미워하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
보수는 피해 입은 일에 대해서 동일하게 보상을 청구하여 받아내는 것이다. 복수는 피해 입힌 사람인 원수에게 자신의 분노를 퍼붓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둘을 구별해서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지금 보수는 정확하게 하라고 명하는 대신에, 복수는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잘못된 일은 반드시 원상대로 바로 잡되 잘못한 사람은 용서해주라는 것이다. 죄악에 대해선 철저히 분노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바로 십자가 복음의 원리다. 복음이 구약성경 그것도 모세의 율법에도 분명하게 구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신실하게 가감, 변개, 왜곡, 포기가 없으시다. 죄는 끝까지 저주하되, 죄인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끼리는 서로 사랑만 하라는 것이다. 인간을 복수하고 심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당신의 몫이다. 반면에 잘못 된 일을 바로 잡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회개하고 고치어 원상대로 되돌려야 한다.
최초의 인간 부부가 하나님을 부인하고서 죄를 짓자 서로에게 핑계를 돌렸다. 동일한 범죄를 함께 저지르고도 그랬다. 핑계를 대었다는 것은 자기는 무죄하고 상대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핑계의 대상이 된 자로선 미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전까지 사랑만으로 유지되던 부부 사이에 미움과 분노 또한 크게 작용케 된 것이다.
이처럼 미움은 인간이 죄를 짓고 난 후 생긴 부정적 부산물이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그분의 뜻은 이미 말한 대로 꼭 저주해야만 할 대상을 골라서 저주하라는 것이다. 더럽고 추한 죄악과 흑암의 영적 세력을 대상으로 삼아서 말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증오하고 분노했다. 만민이 거룩하게 기도하는 집,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변화시킨 장사치들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또 자기들부터 영적 장님이 되어서 다른 이들마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은 바리새인들에게도 크게 야단쳤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듯이,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부여한 것이며 분노는 오직 그 잘못한 일에 대한 것이었다.
아담 이후에 태어나 죄로 타락한 본성을 지닌 모든 인간은 이런 구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죄보다 먼저 사람부터 미워한다. 죄는 도리어 미워하지 않는다. 인간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죄가 더럽고 추한 세상으로 끌고 가려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꼭 증오해야 할 일은 외면하면서 하찮은 일에 증오를 낭비한다. 가장 가까워야할 가족과 성도들 사이에마저 증오가 성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죄악 말고는 아무 것도 증오하지 말라는 것인데도 말이다.
악한 일을 증오할 수 없다면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다. 거룩이 없는 사랑은 동정이고, 사랑이 없는 증오는 폭력이다. 악을 없애고 깨끗케 된 바탕에서만 참 사랑이 열매 맺을 수 있다. 신자가 악을 온전히 저주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도 맛볼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주위에 나눠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시97:10,11)
예수님의 해결책 .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8-42)
예수님은 대대로 원수를 갚는 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의 타락한 심성을 너무나 정확히 아셨다. 보수와 복수의 차이를 모르는 죄의 본성을 꿰뚫어 보셨다. 먼저 동해보수법이 정확하게만 이행한다면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본성 때문에 정확한 계산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아셨다. 복수의 말도 안 되는 윤리와, 죄의 스스로 확대 재생산되는 파급효과를 제거할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동해보수도 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일에서 손해보고 참으라고 하셨다. 신자이기에 아무리 억울해도 무조건 참고 희생하라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다. 일로 인해서, 설령 아주 악하며 일방적으로 피해만 보는 일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미워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부정적인 결과와 그 이전의 악한 원인들은 미워하되 당사자는 절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43-45절)
원수를 미워하고 정당하게 복수하는 것은 세상에선 의로울지라도, 사람을 미워해선 안 된다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다고 한다. 저주와 원수 갚음이 일상화된 것이 죄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기에 그 본성부터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 없이 비춰주신다고 했다. 당신께선 사람을 갖고 미워하지 않고 그 일만 바로 잡으신다는 것이다. 원수 갚는 일은 죄에 찌들어 연약한 사람이 자기와 똑 같이 불쌍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또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자로서 더 큰 사랑을 베풀라는 종교적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을 미워하고 복수해선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본래 뜻이 서로 돕는 즉,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로 만들었는데 사람끼리 미워하면 인간이 반드시 서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로선 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정말로 인간다워지라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바울이 본문이 앞장세워 강조하는 문구가 무엇인가? “아무에게도”,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즉, 사람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개하고 있다. 모든 사람 안에는 당연히 원수까지 포함된다. 바울 또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는 죄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는 일은 싫다는, 다른 말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복수의 윤리는 도무지 합리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한정 계속된다는 치명적 결점마저 갖고 있다. 윤리적으로 중간에 멈출 제동 장치가 전혀 없다. 그 안에 작용하는 윤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온전한 윤리로 돌아가는 것도, 그래서 복수를 그만 두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끝이 없다. 도무지 해결이 나지 않는다. 거기다 죄를 가만두면 저절로 커지기까지 한다. 최선의, 아니 유일한 대책은 일단 복수를 중단하고 보는 것이다. 악에서 무조건 빠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복수 즉, 악의 계속된 진행을 일단 멈추는 것이 바로 선이다. 사람을 미워했던 자리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이젠 사랑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꽃을 머리에 쌓아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특별히 인간을 바꾸는 힘은 오직 사랑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의도대로 다른 이에게서 사랑을 받아야만 제대로 인간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역사를 선한 방향으로 이끄는 힘도 오직 사랑이다. 역사의 흐름을 직접 이끄는 당사자가 바로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할 인간이기 때문이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에 인종차별 정책 때에 잔혹 행위를 한 사람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판사가 한 노파에게 그녀의 외아들과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한 경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비록 내게 이제 가족은 없지만 나누어줄 사랑은 아직도 많이 있다.”고 하면서 그를 어머니처럼 대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나의 용서가 진실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를 꼭 안아주고 싶다”고 하자 그 말을 들은 경찰은 양심의 가책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바울 사도가 숯불을 머리에 쌓는 것이 악인을 응징하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거기다 단순히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맡기라는 차원마저 넘어선다. 원수를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했다. 죄는 미워해도 죄인을 미워할 권리는 어떤 인간, 아무리 의인이라도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인간은 오직 사랑을 실천하여 이웃과 세상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되돌릴 수 있는 특권,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책임만 있다는 것이다.
예의 노파의 자비심은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자비심으로 원수를 사랑하기에는 힘이 너무 부친다. 그녀는 악으로 악을 갚으면 끝이 없고 어떤 해결도 되지 않음을 안 것이다. 미움에 붙잡히면 상대에게 복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더 힘들어진다는 점도 안 것이다. 증오가 사람을 붙드는 에너지가 얼마나 센지 알았던 것이다.
사랑이 아니고는 인간과 세상을 참되고 아름답고 선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없음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 자체가 서로 사랑만 하도록 창조된 존재임을 확신했기에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나눠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진정으로 원수라도 사랑하려고 마음먹으면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 사랑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은 가해자가 나타낼 반응은 둘 뿐이다. 스스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게 되는 것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아 벌을 받게 된다는 의미보다는 온전한 사랑을 거부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뜻이다. 가장 인간답지 못하게 되는 지름길을 택했기에 그렇게 될 뿐이다.
인간이 사랑하게 만들어진 존재라면 신자의 영성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되는 일도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죄로 타락한 인간이 그분의 창조된 원래 목적에 가장 근접하게 바뀌는 것 이상으로 성숙되는 길은 없지 않는가? 바로 그런 차원에서라도 누구라도 미워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일단 멈춰야 한다. 마음속에 어떤 종류의 미움이 차더라도 그대로 두면 자꾸 미움으로 더 채워진다. 역으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할 여유는 줄어든다. 오직 선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도 인간의 영에 선으로 채우는 길 밖에 없는 법이다.
이웃과 평화하는 자가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다. 또 하나님과 평화된 자만이 이웃과의 평화도 가능한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이 초자연적 신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는데(마21:34-40), 이 둘을 실현하는 것 이상의 영적 성장이 따로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8/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