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9:1-3)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조회 수 159 추천 수 0 2020.10.23 10:50:02

(롬9:1-3)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저는 완전히 불신자 집안에서 처음으로 33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서울 강남의 한 개혁주의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 몇 달 후에 제가 신자가 되어서 확연히 변화된 모습을 한 번 적어보았는데 서른 몇 가지를 꼽을 수 있었습니다. 주로 거짓말이나 윤리적으로 부부싸움을 덜하게 되었고 종교적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식의 변화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점점 성경을 배우고 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후로는 그 구분이 깊어지고 많아졌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만 같이 나누고자합니다.

 

신자가 된 후에 가장 큰 변화란 바로 불신자와 가장 큰 차이라는 뜻인데 오늘의 본문이 그 점을 아주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예수가 유대인인데도 왜 동족 유대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느냐, 또 그가 죽은 후에도 기독교를 핍박하며 믿지 않느냐, 나아가 하나님은 왜 그렇게 되도록 방치하느냐는 의문과 반발이 이방세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해서 9-11장에서 변증을 하는데 동족에 대한 자신의 애끓는 심정을 피력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지금도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 동족인 바울로서도 너무 안타깝고 큰 근심과 고통이 된다고 했습니다.(1절) 그런 자신의 심정에 대해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한다고 했습니다.(2절)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한다고 전제했는데(1절) 인간 사도가 삼위 하나님 중에 두 분을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내 말이 거짓이면 성을 바꾸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 어떤 벌을 받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와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했습니다.(3절) 바울이 형제라고 지칭한 유대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이 수여하신 율법을 준행하고 있고 언젠가 메시아가 와서 구원해줄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한국민족이나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넘어서 교회를 출석해서 예수는 알지만 아직은 온전히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그런 형제들에 대해 큰 걱정을 하고 있으므로 불신자와 타종교인은 물론 흔히 말하는 선데이크리스천들까지도 불신자라고 지칭한 셈입니다.

 

그리고 불신자 한명이라도 구원받는다면 기꺼이 그 대신에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져 지옥에 떨어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8장까지 예수십자가복음에 대해 설명한 후에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세상 어떤 것도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바로 이어서 자기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말합니다. 절대로 끊어질 수 없다고 전제했기에 반어법적인 표현으로 지금 자신의 심정이 그만큼 애끓는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비교급 최상급 표현법이 없습니다. 같은 의미의 말을 두 번 반복해서 더 강하게, 세 번 반복해서 최고로 강하게 묘사합니다. 바울은 지금 형제 동족 친척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세 번 반복했는데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최상급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제발, 제발, 제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고 간절히 호소한 것입니다. 자나 깨나 오직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예수를 믿어서 영생을 얻게 하려는 목표로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예수의 극렬한 핍박자였습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끊겨 있던 자였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율법의 의로도 흠이 없다고 스스로 자부했을 정도입니다.(빌3:6) 율법에 저촉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당시에 어느 누구보다도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의로웠던 자였습니다.

 

스데반이 기독교 최초로 순교당할 때에 현장을 지휘한 자도 바로 그였습니다. 성경은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7:58)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율법에는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해 최초의 증인이 먼저 돌을 들어서 치도록 했습니다.(신13:9) 죄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기에 억울한 죽음을 예방하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랍비 역할도 했던 바울이 스데반에 대해 이단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먼저 돌을 들어 치자 다른 이들도 따라했던 것입니다.

 

바울로선 신자들이 예수가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예 지어낸 거짓 속임수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거기다 인간 랍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경배한다니 이단 중의 이단이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서 예수 믿는 신자들을 그냥 두어선 절대로 안 되겠다고 보고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행8:1이 바울이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리 지우려야 지워지지 않는 이상한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스데반이 죽어갈 때의 모습입니다. 스데반이 큰 고통 중에도 평온을 전혀 잃지 않고 하늘 보좌 우편에 예수께서 서계시면서 자기를 영접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를 죽이는 형제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까지 했습니다. 바울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천국 문 앞에 서있는 예수를 보았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거짓말이거나 환상일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온과 기쁨 가운데 죽으면서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까지 한 것은 바울로선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숙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외국인 다메섹까지 신자를 핍박하려고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늘의 빛 가운데서 만났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말을(행9:4)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바울로선 신자들을 박해했지 이 땅에 없는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신자들과 성령으로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인지라 당신과 신자를 동격화 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삼일 간 봉사가 되었는데 스스로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어서 죽은 것과 방불했습니다. 비로소 바울은 스데반이 천국보좌에 서계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한 것이 진실이었고 예수가 부활하신 메시아라는 사실도 믿어졌습니다.

 

나아가 스데반과 신자들을 그렇게 학대했으니 예수님이 자기를 죽여야 마땅했습니다. 사흘간 봉사로 만들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도 눈을 뜨게 해주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워주었습니다. 예수로 인해 흑암에 빠졌다가 예수로 인해 광명을 찾았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총이 성령의 간섭으로 그의 심령 가득히 채워졌던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잘못된 종교적 편견에 붙들려 있을 수 없었고 천국보좌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께 항복하며 자기 전부를 바쳐서 헌신했습니다. 곧바로 다메섹에 들어가 거꾸로 예수가 부활하여 보좌에서 세상을 거룩하게 다스리고 있는 메시아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바울을 천국입장권 1번을 쥐고 있는 것처럼 여겼으나 예수님 안에선 지옥입장권 1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주자 비로소 천국입장권 1번으로 바꿔 쥐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가 그분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그런 바울이 모든 불신자와 타종교인과 교회 안의 쭉정이 신자들 모두에게 자기 천국입장권 1번과 너희 지옥입장권 1번을 바꾸자고 호소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변화가 바로 불신자에서 신자가 된 후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도덕적으로 더 선해지고 종교적으로 더 경건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전인격체가 순간적으로 정반대로 뒤바뀐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그의 예수를 믿으라는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너무 어리둥절하고 신기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의 변화는 오직 하나 예수를 구주로 모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하는 자신의 선행 공적 열성이 아무 소용이 없었음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율법을 준행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의에 합격하여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그 동안의 종교적 확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한갓 쓰레기에 불과하며 바로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 지옥 심판 받아 마땅한 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믿고 착하게 살아서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성령의 거듭남의 구원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처음 교회에 출석하고 들은 설교가 바로 로마서 강해였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계시된 참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제 심령을 비수 같이 파고 들었고 처음 몇 달간은 제 뺨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는 가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 만나기 전의 바울처럼 누가 뭐래도 백로처럼 깨끗하니까 다른 모든 이들을 나보다 더럽고 추하다고 멸시했습니다. 죄송하지만 특별히 예수쟁이들은 교회에선 경건한 척하다가 세상에선 뒤로 호박씨 까는 위선자들이라고 맘껏 조롱했습니다. 서양종교창시자, 로마사형수, 로마 군인에게서 출생한 아비 모르는 사생아에 불과한 예수를 믿고 있으니 너무 어리석다 못해 바보들이라고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대면하자 저야말로 어느 누구보다 더 새까만 까마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도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없이는 한 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연약한 죄인이라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저도 불쌍하고 다른 모든 이들도 다 저처럼 불쌍해보였습니다. 제가 바울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지만 생전처음 남을 위해 제발 예수 믿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가장 간단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기독교인만 다른 모든 종교인들까지 불신자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모든 다른 종교인들도 전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교세를 확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면 이왕이면 기독교를 믿으라고 권할 것이나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항복하십시오라고 권합니다.

 

그 길 외에는 천국 영생은 물론이고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 값, 고난, 상처, 수치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진 십자가의 참 생명을 외면하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죄에 찌든 인간이 고안한 불완전하고 부족한 도덕과 종교만 계명을 따르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말은 너무나 허망한 실패이자 영원한 죽음임을 우리는 잘 알기에 그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애처로운 본문의 바울 같은 심정이 드는 것입니다.

 

작금 코로나로 이처럼 비대면 인터넷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어서 빨리 교회로 모여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는 한시적인 조치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개별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이 와중에도 공예배로 속히 모이자고 주장하는 속내를 엄밀히 따지면 죄송하지만 자기교회 교인숫자가 줄까 두려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세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항복하는 영혼을 단 한 명이라도 늘리는 것이 신자와 교회가 맡은 임무입니다.

 

인간이 고안한 인간문제의 해결책으로는 도덕과 종교가 최고로 고급한 것입니다. 지금은 인간이성이 최고로 발달했기에 도덕과 종교도 가장 잘 발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이 한국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사실상 아무 힘도 못 쓰고 도리어 그것들로 인해 차별이 심화되고 새로운 죄악들이 발생하여서 인간사회의 문제들을 더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추악한 것뿐이며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바울이 재판장에서 자기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사슬에 묶인 것 말고는 제발 자기처럼 되길 원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예수 없는 왕보다 예수 있는 죄수가 낫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의무감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그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연약한 성도들 염려가 더 견딜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11:23-29) 지금 자신의 신자 됨 즉, 불신자와 다름을 조용히 다시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예수 모르는 재벌회장보다 예수 아는 그 회장의 운전수가 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절감하십니까? 무엇보다 불신자를 볼 때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를 알게 해주어야겠다고 기도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9/1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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