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5) 예수님의 부활과 정말로 연합했는가?

2022 부활주일 설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1-5)

 

죄에 더 거할 수는 없다.

 

로마서는 바울이 자기가 개척하지 않았고 일면식도 없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저작한 유일한 책입니다. 다른 서신서들은 이전에 자신이 복음을 가르쳤던 교회나 개인을 대상으로 특정 신앙이슈에 대해 권면하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그러나 로마교회와 성도들은 만난 적이 없기에 십자가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인간의 비참한 영적 상황부터 살펴본 후에 율법으로는 정죄만 받지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유를 따졌습니다. 그 후에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비교하며 오직 주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로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아무 공로 없고 죄 중에 있어도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사이였어도 오직 예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당신의 자녀로 받아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칫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더 거해도 되겠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십자가 공로만 의지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세상 쾌락을 실컷 즐기며 죄를 짓다가 아무 때나 마음 내키면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에게 전도를 하다보면 아직은 마음에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다 교회 출석하면 술 담배도 끊어야 하니까 나중에 천천히 믿겠다고 반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아가 믿은 후에도 어차피 구원은 확보되었으니까 죄에 대해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바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한마디로 부인합니다.(1절)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고 지당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 자체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인데 다시 죄에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현실 삶의 고통에서 건져주는 것이 아니라 지난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주고 사탄에 미혹된 영에 간섭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해주는 것입니다. 죄에서 구원해주었는데 어떻게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그런 생각은 구원을 무효화 시키는 것이며 더 정확하게는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에 구원 밖에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구원의 의미를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에 주님의 실체가 와계신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백성들로 죄를 회개하고 메시아 오심을 대비하라고 물로 세례를 주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마3:11)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성령으로 간섭하여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서 구원해주시는 반면에 끝까지 복음을 거부한 자는 불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죄 사함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의 두 가지 연합

 

그리고 세례로 주님과 연합되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풀어서 설명합니다. 먼저 신자의 옛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함께 장사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부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a)라고 고백한 대로입니다.

 

바울의 경우 십자가에 옛사람을 못 박은 이유가 도덕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교만하고 완악한 잘못임을 깨닫고 철저히 다 깨트렸다는 것입니다.(빌3:6-8) 율법으로 흠이 없다는 것은 남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자랑을 넘어서 스스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신이 있고 실제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러지 못하는 자들을 무시 천대 핍박했던 바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착한 자라야 천국을 갈 수 있다는 행위 구원론을 믿은 것으로 여타 종교와 모든 일반인들의 생각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남들보다 더 열심히 믿고 따르긴 했지만 그분의 구원 진리를 전혀 몰랐기에 자신이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은 너무나 큰 착각이었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그분을 가장 크게 대적했던 셈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직접 대놓고 저주하며 야단친 사람은 바울 같은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 뿐이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마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말리려 하자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중했지 않습니까?

 

바울 같은 영적인 오류 외에도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여야 할 더 중요한 옛 자아가 있습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믿고 현실형통만을 바라며 스스로 노력했던 이전의 모든 가치관들입니다. 전도서가 말하는 대로 사람이 해 아래에서 하나님 없이 행한 모든 헛된 수고를 완전히 장사지내야 합니다.

 

바울은 두 번째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연합했다고 합니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가지 다른 연합을 말했으니 구원에서 둘 중 하나의 연합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연합으로 그치면 단지 죄 사함만 받은 것뿐이라 진정한 회심을 했을지언정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연합은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이 역사하여 구원을 선물로 줄 때는 두 가지 연합이 동시에 일어나며 둘을 따로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아니라 자신의 지정의만으로 회개하고 예수 믿기로 결단한 신자 중에는 첫째 연합으로 그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들 중에도 자신이 주님의 부활에 연합했다는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자들도 꽤 있습니다. 단순히 먼 훗날 주님이 재림하시면 육체적으로 부활시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치웁니다. 말하자면 죄 사함의 구원은 이미 이뤄졌으나 부활의 구원은 장차 이뤄지겠지라고 막연히 소망만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그런 식의 부활신앙은 많이 부족하며 본문이 말하는 의미도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님의 부활과 연합되는 목적을 분명히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절b)고 선언합니다. 지금 현재 이 땅의 삶에서부터 부활과 연합되어 옛사람은 죽었고 새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된 후로는 이 땅에서부터 이미 부활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고 고백한 후에 이렇게 덧붙인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b)

 

이는 처음에 제기된 질문에 대해서 바울 자신의 체험적인 생생한 답변인 셈입니다. 예수님이 신자의 속에 성령의 모습으로 살아서 함께 동행해주고 계시므로 죄를 더 많이 범할수록 은혜가 더 해질 것이라는 것은 아예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의 표시는 오직 예수님과 함께 거룩하게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의 구원 이후의 이 땅의 삶이 단순히 지옥 심판을 면했으니 육체의 부활만 기다리는 과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미 부활승리를 지니고 있기에 천국의 영광스런 영생을 이 땅에서부터 맛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말로 주님의 부활과 연합되었다면 범사에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당연히 받게 되므로 신자가 처한 이 땅에서의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가 바로 천국이지 않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다른 모든 종교는 죽고 나서야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종교가 없는 일반인들도 착하게 살았던 자만 천국 가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의 삶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점수를 따야하는 일이 일생의 과업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평생토록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정말로 자기들 믿음대로 일상적 삶에서 항상 선을 행한다면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정말로 착하게 살고 있느냐 물으면 아무도 예스라고 대답 못할 것이며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일 것입니다. 행위구원을 말로는 주장하면서도 이 땅에서 현실적 형통에만 관심을 쏟으니까 착하게 사는 일에는 정작 관심이 없고 오히려 거꾸로 죄만 쌓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삶이 끝까지 허망하고 갈급한 이유가 신자들보다 욕심과 죄악이 훨씬 많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스스로도 자신이 없고 행할 수 없는 구원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이 땅에서 정말로 의미 있는 결실을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사회와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일은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지만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당대 최고의 의인 니고데모마저 구원의 길을 물어보려고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지 않습니까?

 

간혹 신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되고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기에 사람은 구원 받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그런 확신은 큰 교만이라고 여깁니다. 아주 의롭고 겸손해 보이나 십자가 복음을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어쩌면 예수와 합하여 죄 사함과 부활의 두 가지 세례를 함께 받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자력으로 구원받는 행위구원의 경우는 자신이 과연 얼마까지 선해야 하는지 기준 자체가 없습니다. 거기다 모든 이의 영적 실상은 선을 행하는 것보다 죄를 범하는 일이 훨씬 익숙하니까 평생을 가도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만 그런 자력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께 선물로 받는 구원인데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확신이 가능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구원의 선물을 받은 자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성령으로 거듭나면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고 이전의 삶을 청산하면서 이제부터 그분 뜻대로 살겠다고 스스로 결심하게 되는데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 야고보 같은 사도와 스데반 같은 집사는 물론 초대교회의 그 많은 신자들이 부활의 확신 없이는 절대로 그렇게 기꺼이 순교당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의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그 전에 구원의 확신은 당연히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당장이라도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지만 맡은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 땅에 계속 남아있다고 선언했습니다.(빌1:23,24)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실입니다. 교리적으로는 그 사건의 의미를 진심으로 믿으면 구원이 됩니다. 그러나 교리를 말 그대로 교리로만 받아들여선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교리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진리로 쉽게 가르쳐야 하니까 객관적으로 간략하게 진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는 실제로 성령이 간섭해주셔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그런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십자가 복음이 주관적 진리로 자기 심령에 각인되니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역사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부는 이유, 방향, 세기, 과정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바람이 불고 지나간 자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역사하여 한 죄인의 내면에 쌓인 사탄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는 과정은 자기 지정의로 인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했다면 주님이 나를 이전과 다른 새사람으로 바꿔주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자주 드는 제 간증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오직 나밖에 몰랐던 최고로 교만했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출석하여 십자가 은혜가 절감되면서 나와 아무 이해타산 관계가 없는 불신자를 봐도 너무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에게도 성령이 역사해 저에게 베푼 것과 동일한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제가 그러는 모습에 제 스스로 너무 놀랐고 신기했습니다.

 

그 일은 제가 의도 노력해서 생긴 변화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긍휼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 후로는 오직 주님의 뜻을 실현하며 살기로 결심하여서 지금껏 헌신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넘어지고 뒤로 후퇴하기도 하지만 걸어가는 속도는 더디어도 십자가로 향하는 방향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고 후회해본 적도 전혀 없습니다. 저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감히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여부를 현재 시점의 내 거룩한 행위나 영적인 상태로 판단해선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예수님 쪽으로 완전히 전환되었고 그 후 아무런 변화가 없느냐로 판단해야 합니다.

 

부활을 제자에게만 보여주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 기사에서 흔히들 간과하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께서 부활하신 모습은 일반인이나 유대 대중이 아닌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단번에 오백 명에게 나타났던 일도 동료성도라는 의미로 형제라고 표현했습니다.(고전15:6) 주님의 부활을 제자들만 확인했다면 아무래도 후대 성경독자들이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의심을 살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도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구태여 당신과 당신의 부활을 증명하려고 힘쓸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하거나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고 선언하신 대로 구원해줄 자는 당신께서 반드시 구원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저작하라고 지시한 적도 한 번도 없습니다. 제자들이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으면 당신과 함께 지냈던 삼 년간이 일반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스승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면 독생자 하나님이 자기들을 죄에서 구원하여서 당신의 사도로 세우려고 천국 복음을 미리 가르쳐주셨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은혜로운 구원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 사랑의 공동체를 설립하고 또 형제들을 십자가 진리 위에 견고히 세우기 위해서 성경을 저작할 수밖에 없음도 주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며 당신을 믿지 않고는 영원히 멸망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기독교 변증가인 C. S. Lewis는 그래서 예수님은 미친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 밖에 없다고 정확히 분석했습니다. 부활 사건에 적용하면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황당하게 여기고 치우면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생기지 않으니까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도 황당해질 뿐입니다. 인간이 다시 살아난다니 웃기지 말라고 비방하는 자들에겐 하늘에서 웃으시는 하나님의 비방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고백했습니다. 요한의 이 표현에는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성을 증언하는 기본적인 의미 외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고 죽음으로만 끝났다면 아주 이상한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삼 년간 동고동락했는데 굳이 생전에 주님과 그런 신체적 접촉이 있었고 특별히 자세히 보았다고 기록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서 생전의 여러 사건들이나 가르침들은 기억해도 굳이 부모님과 손을 잡았고 눈으로 보았다고 회상하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가 직접 주님의 못 자국이 있는 손바닥과 창으로 뚫린 허리를 만졌고 그 현장에 요한이 동참해 그 일을 목격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도마 사건은 요한복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요20:27) 제자들이 예수님의 유령이나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와 동일한 부활 신체와 살을 맞대는 교제를 나눴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신 주님의 부활 모습은 십자가에 죽으신 처참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신령하고 완벽하게 승리한 영광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죽기 전에 당신께서 예언한 그대로 어김없이 부활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가르침 특별히 죄인의 구원에 관한 내용이 전부 진리이고 당신 또한 성경에 예언한 메시아임에 틀림없다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나서 스승이 바로 창조 때부터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고 오실 것이라고 여호와가 예언한 여자의 후손이었음을 깨닫고는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도마는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과 신체적 접촉을 했습니다. 오늘날 부활의 역사성 여부를 따져볼 필요 없이 그 상징적 의미만 믿으면 된다는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그 반대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무조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지 의심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틀린 것입니다. 도마가 만약 주님을 만지지 않았다면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겉으로만 믿는 척 하는 것은 위선과 가식이자 맹신입니다. 작금 청년들이 자꾸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있는데 기존 신자들의 이런 맹목적인 믿음 즉, 반지성적인 태도도 한 몫을 한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지어낸 이야기였다면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었다라고 하지 말고 그럴싸한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는 편이 낫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들로선 후대에 이런 논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은커녕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그 엄청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서 후대에 알려주어야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는 따로 가공된 이야기를 보탤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특정한 의미를 더 강조하려고 조금 과장 혹은 수식할 수는 있어도 없었던 일을 추가하지는 않습니다. 거짓이 보태지면 원래 전하려는 진리마저 혼돈 왜곡되어버려서 그마저 신뢰성을 상실합니다. 진리는 거짓이 절대 갖지 못하는 스스로를 증명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굳이 당신에 대해서 변호 변증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신자들도 이참에 성경에 대한 인식을, 특별히 부활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바로 정리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교회 목사님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여겨선 안 됩니다. 어떤 후대의 인간도 성경은 물론 특별히 예수님과 그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로 지어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성령으로 사도들에게 계시된 영원토록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두철미하게 성경 말씀이 역사적 사실이자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지 않으면 절대적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가?

 

부활신앙에 대해서 사실은 신학적 설명이 굳이 필요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뀐 체험이 있는 신자는 이미 주님의 부활과 연합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도 그래서 신자가 증거하고 살아야 할 이 땅의 삶은 예수님의 무덤보다는 부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도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합하는 것은 주님을 믿어 구원 받을 때에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반면에 부활과 연합하는 것은 거듭난 이후에 영생을 이미 확보한 자답게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이 갖은 죽음이라는 궁극적 질문에 대해서 영광스런 부활이라는 정답을 이미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이자 권능입니까? 하나님 그분이 항상 내 편이 되어서 당신의 독생자를 나를 위해 대신 죽음으로 내어주셨기에 하늘에 있는 세상과 다른 모든 신령한 복으로 채워주십니다.(롬8:32)

 

예수님과 이미 연합하여 있기에 이 땅의 삶에서도 신자를 훼방할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과 세상과 사탄을 두려워할 근거도 없고 당당히 맞서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문제와 고난이 닥쳐도 육신이 일시적으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영혼은 평강과 자유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끝 날까지 또 땅 끝까지 가더라도 어둡고 썩어가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며 십자가 복음을 모든 이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줄기차게 예수님의 죽음만 증거하고 있는 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된 상태에 계속 머무는 것입니다. 구원 후에도 죄의 본성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연약한 모습이라는 점만 너무 강조합니다. 모든 신앙적인 이슈를 인간의 근본적인 악한 본성의 차원으로만 접근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아가서 회개하고 그분의 무한한 긍휼만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라고만 자꾸 강조하니까 신자가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불가능하고 심지어 성화를 스스로 이뤄나가려는 수고도 할 필요 없다고 까지 말합니다. 기존의 교회와 성도들이 근본적으로 예수를 닮을 수 없는데도 잘못 가르치고 또 헛된 수고를 하고 있다는 식입니다. 그 결과 집에서 혼자 예수님 저를 긍휼히 여겨달라는 기도만 하고서 줄곧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그 구원의 진리만 연구합니다.

 

자신의 너무나 가난한 영적상태를 겸손히 인정하는 선한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신자의 본성이 여전히 너무 가난하고 비참해서 일생 동안 주님의 자비를 구해야 하는 것은 분명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그것으로 그치면 본문으로 따져서 죄에 더 거하지 않으려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새새명의 은혜는 누리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설명한 후에 신자의 신분과 자세를 8장의 서두에서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자세히 설명할 여유는 없으니까 간단히 말해 신자는 주님의 부활과 연합되어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니까 성령의 인도를 구해서 따르면 율법의 요구도 이뤄지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그렇게 살았고 당시 랍비의 교육방식에 따라 제자들도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님 생전에는 제대로 흉내도 못 내었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는 비록 때로 넘어지긴 했어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신자 안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저는 죄인이라는 고백만 하면서 계속 주저앉아 있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거듭난 신자에게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예수님의 마음이 심령에 충만히 심어지는 것입니다. 주위 불신자들을 보면 저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어떻게든 십자가 구원으로 초대하고 싶어집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법을 따르면 예수님처럼 교회 안은 물론 밖의 사람들도 전혀 차별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고 능동적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서 우리 모두 자신에게 던질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 안에 정말로 그리스도가 대신 살고 있고 또 그래서 내가 정말로 나를 대신해 죽으신 그분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보좌 앞에서 눈을 뜰 수 있는 길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길뿐이라는 진리를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자신의 삶으로 입증하고 있는지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4/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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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롬5:1-5) 믿은 후 반드시 행해야할 유일한 일 master 2021-12-03 234
53 (롬13:11-14)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master 2021-01-11 569
52 (롬9:21-24) 토기장이 비유와 예정론 master 2020-10-23 2625
51 (롬9:1-3)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master 2020-10-23 159
50 로마서에서 ‘for“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master 2019-02-24 178
49 롬6:23 왜 죄의 삯이 하필 사망인가요? master 2019-02-24 290
48 롬14:1-4 믿음이 성숙된 확실한 증거 master 2018-10-03 657
47 롬10:18-21 말로 전하지 말고 마음을 움직여라. master 2018-09-22 77
46 롬8:1-4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 master 2018-09-18 548
45 롬4:18-22 아브라함은 언제 구원받았는가? master 2018-09-13 549
44 롬1:1-4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master 2015-05-04 406
43 롬12:17-21 증오가 더 많은 힘을 요구한다? 운영자 2012-08-21 1230
42 롬13:8 사랑의 빚은 져도 되는가? 운영자 2012-05-04 3971
41 롬10:9,10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2) 운영자 2012-03-09 4288
40 롬10:9,10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1) 운영자 2012-03-09 574
39 롬8:12-15 하나님의 양자 된 신자 운영자 2012-02-15 469
38 롬11:25 너무나 기구한 이스라엘의 운명(?) 운영자 2012-02-01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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