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부활절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1-4)
초대 교회의 열정
최근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다. 목회자와 신자들의 사회적 신망도도 바닥까지 추락했다. 온갖 이단 사설이 교회 안팎에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해결책으로 이구동성으로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분명히 정답이다. 문제는 초대교회의 열정에 대한 해석과 적용이 실제 초대교회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초대교회처럼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자고 독려한다. 열심히 제자 훈련하고 때를 얻든 못 얻든 전도하고 성령 충만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안을 다 강구한다. 아주 좋은 일이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모이기에 힘쓰고 전도에 열심이었던 것은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기 전 잠시 동안뿐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유대교에서 시작되었는데 스데반 순교 사건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곧바로 일어났다. 로마로부터 박해는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재를 기독교인들에게 덮어씌운 AD 64년부터였다. 십자가 사건 후 얼마 안지나 핍박은 시작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핍박이 극심한데 모이고 전도에 열심을 낼 수 있겠는가? 알다시피 숨어서 ‘익투스’(물고기)라는 암호를 사용하면서 지하묘지 같은 장소에서 비밀리에 만났지 않는가? 공개적으로 자기 신분을 노출하기 힘들어서 때를 얻든 못 얻든 전도할 수 없었다.
지금 이곳 미국과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100% 보장되어 있다. 현대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열정으로 매진하고 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순식간에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온갖 효과적 교육 훈련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고 예배를 눈물 흘리며 감동적으로 드리고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쇠퇴하고 죄송하지만 외부로부터 개독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열정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위에 세워졌고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의 피를 먹고 성장했다.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되는 등 극심한 박해를 뚫고 부흥했다. 불신자의 입을 통해 기독교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간다고 증언되었다.(행24:5) 전염병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며 또 뭔가 막는 힘이 있어도 다 이겨냈다는 것 아닌가?
당시는 종교의 자유는 없고 훼방과 핍박만 있었다. 교회당은 물론 성경도 갖고 있지 못했다. 뜨거운 예배를 위한 악기와 CCM 찬양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초대교회의 열정은 예수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그런 열정이었다.
그들은 오직 태초부터 있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진바 된 증인들이었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물론 설교도 온통 예수 일생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럼에도 듣는 이의 인생이 뒤집어졌다.
특별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이 모든 설교의 주제였고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했다. 부활 이야기만으로 가슴은 뜨거워지며 천국 소망에 불이 붙어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태웠다. 설교에 감동적 예화가 없었다. 경건하고 심오한 격언, 권면, 훈계도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가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서 큰 영광중에 승천하여 천국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는 것이 초대 교회 신앙의 처음과 끝이자 전부였다.
복음(福音)의 정의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선지자로 당신의 아들에 관해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한 것이라고 한다.(2절)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다는 것이 구약의 예언이었다고 한다.(3절) 다윗의 후손이 영원하고 견고한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했다.(삼하7:12)
또 그 이전에 왕의 홀(㧾)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예언했다.(창49:10) 유다의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에도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즉, 동정녀에서 탄생할 메시아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3:15) 이 모든 약속들이 예수를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특별히 성결의 영으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입증된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구약성경대로 예수가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한 사건이 바로 복음이다. 또 2-4절을 연결하면 예수님 그분이 바로 복음이다.
주님은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요11:25) 이 선언이 종교적 상징이나 사상과 교리가 아니었다. 죽은 지 나흘째 되어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그의 누이에게 이 말을 네가 믿느냐고 질문하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부활 때에 다시 살줄을 안다고 대답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에 택한 백성은 부활할 것이라는 유대교 교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했다. 곧바로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즉, 주위의 어느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직접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유대인들이 사람이 죽어 그 영혼마저 완전히 빠져 나간다고 믿는 4일 째에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것이다.
한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환자를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다. 주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중풍을 고쳐주기 전에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했다. 당시 사람들은 중풍 같은 중병은 죄로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거기다 죄 사함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관 사항인데 인간 주제에 감히 구원을 베푼다니 의아하고 아주 불경스럽게 여겼다.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주님은 죄 사함을 준다고 말로만 선포하는 것과 실제로 중풍에서 일어나 걷게 하는 것 중에 어는 것이 어려운지 되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막2:11)고 하면서 완전하게 치유되었음을 선포했다. 당신께서 어떤 질병이라도 말씀만으로 낫게 하는 능력을 보임으로써 사실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졌음을 즉, 당신이 메시아 되심을 입증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 당신께서도 죽은 후 삼일 만에 스스로 부활할 것이라고 몇 번이나 예고했고 그대로 실행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당신이 선포한 말씀이 영원하고도 절대적이며 완전한 진리임을 입증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신자에게도 부활은 보장되어 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기쁜 소식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보다 더 큰 축복과 권세가 없지 않는가?
극심한 핍박을 이길 수 있었던 까닭
초대교회의 열정은 오직 이 부활의 복음을 붙든 데서 기인한다. 그들에게 예수는 정말로 메시아였다. 그분의 모든 말씀은 절대 진리로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지라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이 천하 만민에게 구원의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했더니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분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고 체험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설파하면서 너희 모두가 죄인이라고 선포하자 돌로 쳐 죽임을 당했다. 죽어가면서 천국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봄으로써 성령으로 더욱 충만해졌다. 그는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고 제발 살려달라고 빌지도 않았다. 대신에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달라고 간구했다. 또 예수님처럼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큰 소리로 기도했다.
이 처형을 주도했던 청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 생활에선 최고 열성을 보인 자였다.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구제, 십일조, 기도, 예배, 말씀 등에서 그보다 앞선 자는 당시 한 명도 없었다. 최고의 종교인으로서 스데반의 죽음은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 풀리지 않는 영적인 의문과 찔림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자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처럼 초대교회 신자들은 부활 생명을 실제로 소지하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 가고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 것이라는 교리를 단순히 믿은 것이 아니었다. 그 교리를 전파한 것도 더더욱 아니다. 예수가 부활한 것이 사실이기에 자기들이 부활할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므로 그 무엇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기본 인생관이 철저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모진 멸시 비방 핍박에 생명마저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세상이 아무리 죄악으로 타락하고 흑암의 세력이 기세등등하게 설쳐도 목숨을 걸고 항거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하며 부활 생명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초대교회의 열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역으로 말해 작금 교회의 모든 예배, 교육, 기도 모임 등에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이 선포됨을 넘어서 실현되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또 그것이 바로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인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바울 사도는 우리 믿는 바가 이생뿐이라면 신자가 가장 불쌍하다고 선언했다.(고전15:19) 부활이 없다면 황금 같은 일요일에 재미있는 일은커녕 쉬지도 못하고 돈까지 바쳐가며 엄숙하게 몇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후 심판과 구원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감옥에 가지 않는 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쾌락과 풍요와 사치를 누리며 제 멋대로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불신자는 이 땅의 물질계가 전부다. 자신은 우연히 진화된 짐승에 불과하다. 육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는 멸절된다고 믿는다. 만에 하나 지옥 심판이 있어도 이 땅에서 형통하는 것이 더 좋다. 죽음 이후는 생각하기도 싫다. 이 땅이 전부이기에 오직 사람들 사이에 자기를 높이는 일에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명예와 재물과 권력만 추구한다. 필요하다면 지성과 도덕성 심지어 종교성으로 자기를 치장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만족과 자기 의를 스스로 채우려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 신자는 마땅히 달라야한다. 아니 진정으로 부활을 믿으면 자연히 달라진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스런 구원의 완성을 보장하고 있다.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하늘에는 내 이름으로 지어진 지상의 장막과 비교가 안 되는 아름다운 장막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 천국의 생명책에 내 이름으로 주민등록이 되어 있다. 지금 당장 죽어도 하나님의 보좌 앞, 예수님의 품 안에서 눈을 뜰 것을 알고 있다.
요컨대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염세주의나 현실도피주의가 절대 아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을 향한 여정이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과 동의어다. 신자는 죽을 준비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완료해 놓은 자다. 그래서 이 땅에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다. 자신과 활기가 충만한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그 결과 눈에 보이는 것과 자기감정에 쏠리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신앙과 현대 교회
지금 신자라면 누구나 잘 아는 원리를 말하려는 뜻이 아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며 안수집사, 장로, 목사의 직분으로 섬겨도 사람의 눈치를 본다면 엄격히 말해 크리스천이 아니다. 이 땅의 출세와 형통을 목적으로 삼지 않아도 혹시 다른 교인이 나를 우습게보지 않을지 연연하면 부활신앙이 없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열정이 생길 리 없다.
작금 빈번한 교회 분쟁의 원인이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닌가? 장로와 목사가 서로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려고 성경이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세상법정의 소송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자는 천사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를 이미 알고 있는 자다. 십자가 절대 진리 밖에 있는 세상에게 오히려 교회 문제의 판단을 의뢰하고 있다. 기독교가 기독교이길 포기한 꼴이다. 성경대로 행하지 않으면 성경이 절대 진리 됨을 부인하는 셈이다. 결국 신자도 아니라는 뜻이다.
지난주 기독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한국의 최고 유명한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와 교회갱신위원회가 상호 고소했는데 불신자인 판사가 양쪽에 대고 점잖게 충고했다고 한다. “세상 법정은 절대적 진리를 판단하지 않는다. 또 인간 만사 자체가 쌍방 과실이 대부분이기에 법으로는 누가 상대적으로 진리인지만 판결해준다. 이 재판을 이긴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신자들에게 어떤 명예회복이 되겠는가? 하나님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여러분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더 옳고 먼저 행할 일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그 판사가 기독교 교리와 용어만 몰랐을 뿐 한마디로 목사와 장로들을 싸잡아서 부활 신앙이 없다고 야단친 셈이다.
부활절만 오면 자기 믿음에 회의를 갖는 신자들, 심지어 목사들이 의외로 많다. 성경의 다른 기록은 다 믿어도 부활만은 이상하게 확신이 안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어떻게 초대교회의 열정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신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 구태여 교회로 모일 필요 없다. 집에서 자기계발서적을 읽으며 스스로 성찰, 묵상, 훈련하면 그만이다. 부활이 없으면 아무리 교회에 열심을 다해도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일 뿐이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종교성과 도덕성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것이다. 아무리 대형교회로 성장했어도 십자가 복음이 증거 되지 않으면 기독교라는 종교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어떤 일에도 담담해진다. 특별히 경건하지 않아도 영성이 부족해도 인간 본연의 신체적 정신적 반응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근본 의미가 무엇인가? 자기 옛 사람은 철저히 깨져 죽고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는 것 아닌가? 한 번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예수 믿은 후의 믿음의 모습은 어떤 일을 당해도 담담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초대교회 열정을 회복하는 길
초대교회는 다시 말하지만 모이기에 힘들었다. 성경과 교리는 아직 확립 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방식 같은 체계적 전도를 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예수 십자가를 통해 자신들의 죽음 이후는 물론 이 땅의 인생에 대한 해답을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된 것뿐이었다. 부활의 확신만으로 세상의 재물, 죄악, 사탄, 사망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 가신 좁은 길을 따라갔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참 사랑이 풍성히 그들에게 부어졌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했다. 그들로선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고 괴로웠다. 쉽게 말해 그들의 삶과 얼굴에 광채가 비춰 나왔다.
무엇보다 신자는 가만히 있는데 불신자들이 작은 예수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나도 너희 같이 부활 예수를 만나고 그 생명을 소유하고 싶다고 먼저 접근해왔다. 이 땅에서 죽을 준비를 완료하여 정말로 참 인간답게 아름답고 진실하며 선하게 살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자연스레 아무 부담과 주저 없이 받아들였고 그 후 그들도 곧바로 자기 생명을 예수를 위해 내어놓으며 헌신했다. 제자훈련 전도폭발훈련 거치지 않고도 말이다.
작금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사실은 “교회와 담임목사에게 열심히 충성만 하면”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도, 형통한다고 가르치는 교회와 목사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니 사실은 형통할 수도 없다. 참 복음은 물론 부활 생명이 없으니 자꾸만 종교적 치성만 요구한다.
불신자는 이 땅이 전부이므로 인생의 목적을 은퇴 자금 마련에 둔다. 예상 가능한 수명에다 한 달 기본 생활비를 곱해 3-5억의 돈을 적립하기에만 급급하다. 신자도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먼저 행할 일은 백세 시대에, 은퇴 후가 활동기보다 더 길어질 시대에, 천국 가는 그날 까지 행할 하나님의 사역 계획부터 세워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신자는 은퇴 계획이 필요없다. 평소 부활 생명으로 살던 모습을 그대로 연장만 하면 된다.
예수 복음 안에 거해서, 복음으로 살고 죽으며, 예수의 거룩한 이름만 증거하면 된다. 순교라는 영어단어 martyrdom은 헬라어에서 왔는데 원어로는 육안으로 증거(eyewitness)한다는 뜻이다. 초대교회에선 예수가 자신의 주인임을 부인만하지 않아도 죽임을 당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 모두 순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도란 예수 믿는 대로,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분과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면 그분을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자라면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 부활 생명을 이미 소지했고 작은 예수가 될 수밖에 없다. 개독교가 기독교로 부활되는 길도 부활 생명으로 돌아가는 길 외에는 없다.
4/5/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