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5:1-5) 믿은 후 반드시 행해야할 유일한 일

2021년 추수감사주일 설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1-5)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면 감사할 수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계명은 당연히 고난까지도 감사해야 한다는 뜻인데 신앙연륜이 상당해도 제대로 지키기 힘듭니다. 특별히 올해 추수감사절에는 계속된 펜데믹으로 현실적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이 따랐기에 원망이 앞서지 않는 것만도 감사하게 여겨야할 판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종종 가르쳐져온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방안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라면 다들 한 번씩 들어봤을 텐데 사고의 패러다임을 낙관적으로 바꾸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컵에 물이 반쯤 담겼을 때에 물이 겨우 반밖에 없다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범사에 감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직도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면 무슨 일에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선천적으로 기질과 성격이 낙천적 긍정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비관적 부정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상반된 이 두 기질 중에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관적 부정적인 기질의 사람은 매사에 신중하여 추진력은 느려도 예상 가능한 위험과 손해를 세밀하게 따져서 대책을 강구하게 됩니다. 반면에 낙천적 긍정적인 사람은 결과와 유익부터 먼저 예상하여 적극적으로 일단 행동으로 옮기나 덤벙대다 실수를 범할 때도 많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기질끼리 파트너가 되어 사업을 하면 대박은 못 치나 큰 손해는 겪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기질끼리는 활기차게 사업이 뻗어나가다가도 한 방에 크게 망할 수 있습니다. 사장은 긍정적인 사람이 기획실장은 부정적인 사람이 맡아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려나가야 제대로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습니다.

 

사고를 긍정적 패러다임으로 바꾸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다는 진리를 전혀 감안하지 않은 오류입니다. 만약 컵에 물이 항상 90% 이상 차있으면 아무리 비관적인 사람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물이 항상 10%도 차있지 않으면 아무리 낙관적인 사람도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펜데믹 사태에 불평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듯이 말입니다.

 

낙관적인 사고가 오히려 위험하다.

 

사고의 패러다임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더 좋다는 의견을 완전히 뒤집는 실제적인 예가 있었습니다. 월남전에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가 그 열악하고 험악한 수용소에서 8년을 견디며 결국 생존했습니다. 기자들이 그 힘든 기간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 논리와 정반대되는 답변을 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을 붙여서 “스톡데일의 모순”이라고 부릅니다.

 

포로들 중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자들이 오히려 더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절에 혹은 성탄절에 석방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막상 석방되지 않자 크게 실망하고 우울증에 빠졌던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는 어차피 언제 석방될지도 모르는데다 수용소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에 그 형편없는 식사도 많이 먹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버텼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살려낸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고가 그를 살린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 파악해야 그 해결책도 정확히 세울 수 있는 법입니다. 이처럼 고난 중에는 매사에 비관적인 사람이 최악의 경우까지 대비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범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나쁜 상황을 더 좋게 바꿔서 생각하는 것을 긍정적인 사고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상황은 그대로 있는데도 생각만 바꾼 것이라 현실을 왜곡한 것이며 그 상태가 심해지면 망상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현재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부정입니다. 그럼 그 반대로 현재의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긍정입니다. 따라서 긍정적 상황은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부정적 상황은 그대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후에 각각에 합당한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생각입니다.

 

죄송하지만 바보거나 정신질환자가 아닌 이상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습니다. 사람은 개별 사건의 성격과 고유한 상황에 따라서 저절로 또 순간적으로 긍정적 혹은 부정적 감정부터 먼저 생겨버립니다. 또 그렇게 이미 발생한 감정에 우선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에 매사에 사고의 패러다임을 긍정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다 사고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은 자신의 판단 하에 자기 생각을 자기 의지로 바꾸는 것입니다. 출발부터 끝까지 하나님과는 무관한 인간의 행위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범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유익은 분명히 있고 잘만 활용하면 때로는 삶의 고난을 이기는 하나의 훌륭한 방안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 없이도 이성만으로 분별이 가능하고 일반심리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굳이 교회까지 나서서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적진리를 풀어서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야 합니다. 이미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상식을 가르치는 것은 고달픈 현실 삶 속에서도 예배나 성경공부에 참여하려고 나오는 신자들의 귀중한 마음과 시간을 허비시키고 자칫 하나님의 뜻마저 오도하는 큰 잘못입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고난의 원인을 모르고 언제 끝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고 심지어 또 다른 고난이 겹쳐도 감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주 심각하고도 엄청난 계명입니다. 아주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조차 이런 말을 했다간 종교적 과대망상환자로 취급당할 것입니다. 단순히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차원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그것도 당신의 참된 자녀들에게만 명할 수 있는 말씀이며 또 그래서 일반 심리학과 윤리나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과는 전혀 달라서 교회만이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다고 해서 의무적으로 강요하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 사고의 패러다임만 바꾸는 것은 자기기만 행위입니다. 아무래도 실제 속마음은 감사하지도 않는데도 억지로 생각만 긍정적으로 바꿔 감사하는 경우도 많을 텐데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셈입니다. 진짜로 기쁘고 좋다는 기분이 들어야만 참된 감사가 됩니다.

 

본문을 문법적으로 분석해보라.

 

로마서의 주제는 이신칭의이므로 오늘의 본문도 문맥상으로는 구원 받은 신자의 신분과 특권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문구 때문에 감사에 대해서 이만큼 잘 가르치는 말씀도 없습니다. 이 문구 앞뒤의 문장들도 성경적인 감사의 의미와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와 근거 등을 정확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간단한 문구 하나만 따져도 세 가지 차원에서 성경적 감사를 정확히 계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범사에 감사하는 수준을 넘어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실제로 즐거워해야지 의도적으로 감사를 짜내거나 단순한 감사로 그치지 않습니다. 둘째 환난이 끝나면 누구나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 있으나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럼 환난 자체부터 정말로 즐거워야, 최소한 싫어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 즐거워하라고 명령 혹은 권면조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즐거워하나니’라고 했으니 신자라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을 합치면 환난 중에도 자연스레 그 모든 일과 상황이 즐거워져야만 신자라는 것입니다. 사고 패러다임의 전환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물론 예수 믿었다고 기질이나 성격이 그렇게 바뀌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과연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

 

죄송하지만 많은 한국 신자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전체를 연결해 묵상하지 않는데다 세밀히 따지지도 않으니까 개별 문장의 정확한 뜻조차 잘 모릅니다. 살펴본 대로 그 짧은 문구 안에도 세 가지나 되는 뜻이 있었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논리적 합리적인 면보다는 감성적인 기질이 많은 민족인데다 어려서부터 책을 스스로 읽고 특정주제로 토론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그러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저작된 것이지만 인간 저자들로 자신의 체험과 사상을 반영시킬 수 있도록 인도했습니다. 바꿔 말해 성경도 일반적인 문학기법이 다 적용된 책이므로 읽을 때도 당연히 문학적 기법에 따라 분석해가며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문장 안에서도 주어 목적어 보어가 각각 무엇인지, 시제는 어떻게 되는지, 능동태 수동태 가정법 비유법 등을 구별해야 하고 그 각각에 합당한 의미를 추적해나가야 합니다.

 

흔히들 성경이 어렵다고 말하는데 이런 분석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여서 믿기만 하면 된다는 가르침만 받았으니까 조금이라도 일반 책처럼 분석하면 큰 잘못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절대적 진리의 말씀인데 그 뜻도 정확히 모르고 무조건 믿는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그러면 자칫 맹신 내지 광신에 빠지게 되는데 잘 따져보면 그런 신자들이 예상 외로 많습니다.

 

고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근거

 

본문은 고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신자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라고 과거시제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의롭다고 간주해주었는데 그렇게 해준 근거는 신자의 믿음입니다. 신자의 조건 능력 공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만의 주권적 선택에 따라서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신자의 조건 능력 공적의 부족으로 인해선 그 의롭다하심이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완전히 맺어졌는데 인간 부모도 자식이 잘못했다고 먼저 내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일생 전부를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사는 자입니다. 신자가 된 이후의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의 출발이 거룩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오고 그 과정과 결과도 그분에 의해 거룩하게 이끌어지는 자입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중해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할 때에 입술로 주여, 주여 하면서 내 현실적인 형통을 보장해주는 힘만 아주 센 분으로 모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현재형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맺도록 노력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린다는 것은 찾아서 즐기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냉장고에 먹을 음식을 채우려고 일하는 것이 아니고 냉장고에 이미 가득 차있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마다 꺼내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이미 하나님과 절대 취소되지 않는 화평이 이뤄졌기에 그 후로는 그 화평을 누리기만하면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또 다시 과거시제로 설명한 것입니다. 실제로 구원을 설명하는 원문은 거의 다 현재완료형이지만 우리말로는 완료형 문법이 없어서 과거로 번역한 것입니다. 현재완료형이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일어난 어떤 일의 결과가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미 이루었고 그 자리에 항상 서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불화되는 자리에는 절대 설 수 없기에 그분께 추가로 받을 복도 사실상 따로 없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 신자가 행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어떤 큰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이 신자의 장래에 베풀어줄 영광은 절대로 가감 수정 취소되지 않기 때문에 즐거워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쳤다고 해서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이 줄어들거나 취소되었다는 증거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난이 닥쳐도 믿음으로 인내하면 결국은 신자가 바라며 즐거워하는 그 영광에 반드시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한다.

 

특별히 그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한다고 했는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연단 중에 인내를 하고 그분의 화평을 누리는데 굳이 부끄러운지 아닌지 따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일부 영어성경은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번역했지만 헬라원어 ‘카타이스퀴노’는 모욕하다, 망신키시다. 수치를 겪게 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대로 부끄럽지 않게 한다는 것이 문맥상이나 당시 정황으로나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우선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면 세상 불신자들로부터 맹신자 내지 광신자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크리스천들은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 전에 로마의 방탕하고 음란한 세속문화에 전혀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로마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그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노예와 함께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는 물론 역사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사고를 했던 로마인들의 논리나 윤리로 볼 때는 아주 수치스런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죽었기에 하나님께 저주받았다고 간주했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이요 이방인에겐 미련하게 받아들여졌지만(고전1:23) 신자들은 아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본향인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고 이 땅의 삶은 나그네 길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부터도 현실적 풍요나 궁핍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이 주는 은혜와 기쁨이 세상 쾌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실제로 좋고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공동체에는 온갖 믿음의 표적이 나타났고 믿는 사람끼리 서로 물건을 통용하여서 가난한 자가 없었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함께 음식을 나눠 먹고 하나님을 힘입게 믿고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행2:43-47) 영원을 향해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에 감동을 받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모습이 삶의 모든 측면에서 분명히 보이게 드러나니까 다른 이들도 그 소망에 함께 동참하려 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저작할 당시는 아직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주후 49년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들을 추방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였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로마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의해서 기독교가 로마에도 염병처럼 퍼졌습니다.(행2:10) 그러자 거룩하게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기존의 유대교인들과 이방인들의 충돌이 잦아졌고 결국 유대인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소심한 글라우디오 황제가 골머리를 썩다가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켰는데 이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고린도로 내려와 바울과 합류하여 사역했습니다.(행18:2) 말하자면 기독교신자들은 고린도전서 말씀대로 로마인은 물론 유대인들로부터 사실상 멸시 천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거기다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이 저작되었기에 본문은 장차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이고도 가공할 박해를 받을 것도 예시한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신자에게 연단이 되겠지만 그 연단을 견뎌내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성적으로 싫어하고 인간의 영광만 구합니다. 신자는 인간의 영광을 따르는 것은 죽어도 싫기 때문에 순교를 당할지라도 그 모든 핍박을 즐거워하며 견뎌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지 않고 잠깐만 로마의 황제가 주라고 시인해주면 산 채로 불에 타죽거나 맹수에 잡혀 먹히지 않아도 됩니다. 초대신자들은 그 간단한 일을 마다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요 주라는 고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자기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게 여기고 더욱 멸시 모욕 수치를 줄 것입니다. 그럼에도 수치나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은혜와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근거로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들이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전혀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 죄라고는 하나 없으셔서 완전하게 경건하신 분이 그 죄 값을 대신 치르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구원의 영적 진리에 자기 이성으로 객관적인 동의를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실제로 성령이 간섭하여 각 신자의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로 가득 채워진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죽기까지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사랑할 것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체험했고 체험하고 있으며 체험할 자입니다.

 

고난이 연단이 되어서 인내를 낳지만 소망이 영광에 이른다고 일정한 순서에 따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은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여 주도하고 있는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는데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뒤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높이려는 죄의 본성을 날마다 기도로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뜻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현실적인 고난의 대부분은 신자 자신의 잘못과 인간 세상의 죄악에 기인합니다. 스콧데일이 월남전의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겪게 된 고난입니다. 그런 고난에선 감사하기 이전에 그 모든 상황의 원인을 본인이 분별해서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뒤늦게나마 회개할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선한 결말로 이끌어주시면 더 크게 감사하면 됩니다.

 

신자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며 정말로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분의 영광을 끝까지 완악하게 싫어하는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라오지만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고 있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면 오히려 감사한 것 아닙니까? 설령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지 않아도 최소한 하나님은 무슨 일에도 신자 편이고 끝까지 보호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억지로 생각을 바꿔서 감사하라고 전혀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독선적인 분이 아닙니다.

 

펜데믹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고통스럽다.

 

이번 펜데믹에도 긍정적인 사람은 재택근무로 아이들과 더 가까워져서 감사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오히려 하루 종일 사소한 일로 부딪히니 사이가 더 나빠지고 심지어 부부사이에 이혼까지 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을 부정적인 사람은 생명의 부질없음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모두 다 인간이 자기 생명을 임의로 통제할 수 없다는 진리도 새삼 확인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누구나 전전긍긍했고 그 불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니까 까닭 없는 우울 분노 저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믿음과 무관하게 누구나 인식할 수 있었던 생각이자 반응입니다. 요컨대 긍정적 사고로 바꾼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펜데믹 중에 감사하며 즐거워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정작 주목할 사항은 펜데믹으로 모든 이에게 가장 아쉬웠던 것은 사람들과의 따뜻한 허그였고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주변 상황에 일차적으로 반응하는 감정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다 출세 형통이 인생의 첫째 목적이니까 마음으로는 따뜻한 사랑을 원하지만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짜증 원망 불평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기본적인 의미 중의 하나는 인간은 아무리 긍정적 사고로 바꾸어도 고난을 이겨낼 수도 감사할 수도 없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임을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또 그렇게 너무나 연약하기에 예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없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사소한 일을 만나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도 확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인간실존의 너무나 가난함을 겸허히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순전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일보다 자신과 하나님과 관계를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모든 현실 상황과 사건을 판단한 결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긍휼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펜데믹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당신의 방식과 때에 찬란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펜데믹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영원토록 선하시고 전혀 변하지 않는 사랑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도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동일하십니다. 골고다 십자가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은혜로 다가옵니다. 하나님과 원수였음에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주었음을 성령의 간섭으로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신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는 힘과 존재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과 완전히 화평 되었기에 어떤 환난 중에라도 십자가에 엎드리면 주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적 의지로 아무리 생각을 바꾸어도 범사에 감사할 수 없었으나 나를 떠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펜데믹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과 능력과 방안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했고 그래서 내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진리를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 진리를 실제로 기도하면서 삶에서 실천해보게 만드는 훈련장입니다. 예수로 살고 죽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어떻게 사고 패러다임의 전환과 감히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로 십자가를 안다면 그럴 수는 절대 없습니다.

 

신자도 여전히 연약한지라 고난이 닥치면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돌아가면 그분이 반드시 합력하여 선하게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사실 하나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절대 포기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올해는 유난이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신자는 이 감사의 계절을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지내야 합니다. 현실이 풍요하거나 최소한 무사 안일하면 믿음과 상관없이 감사하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 신자는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자리에 서있어야 합니다.

 

혹시 세상 사람들에게 돈이 없어서 지위가 낮아서 멸시 받았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았고 세상 쾌락의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거룩하게 삶으로써 손해를 겪고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래서 힘들고 외로워졌어도 예수님을 한시도 놓친 적이 없다면, 무엇보다 이 땅이 나그네 삶이라는 것을 알고 하늘에만 소망을 두었고 그런 삶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 것이 신자가 감사절에 정작 지녀야 할 마음입니다. 또 평생토록 소망하고 실천해야할 유일한 일입니다.

 

(11/28/2021)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 (롬 6:1-5) 예수님의 부활과 정말로 연합했는가? master 2022-04-25 139
56 롬11:32 해석이 어렵습니다. master 2022-03-20 221
55 로마서 8:29,30이 예지예정인가요? master 2022-03-11 61
» (롬5:1-5) 믿은 후 반드시 행해야할 유일한 일 master 2021-12-03 234
53 (롬13:11-14)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master 2021-01-11 569
52 (롬9:21-24) 토기장이 비유와 예정론 master 2020-10-23 2625
51 (롬9:1-3)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master 2020-10-23 159
50 로마서에서 ‘for“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master 2019-02-24 178
49 롬6:23 왜 죄의 삯이 하필 사망인가요? master 2019-02-24 290
48 롬14:1-4 믿음이 성숙된 확실한 증거 master 2018-10-03 657
47 롬10:18-21 말로 전하지 말고 마음을 움직여라. master 2018-09-22 77
46 롬8:1-4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 master 2018-09-18 548
45 롬4:18-22 아브라함은 언제 구원받았는가? master 2018-09-13 549
44 롬1:1-4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master 2015-05-04 406
43 롬12:17-21 증오가 더 많은 힘을 요구한다? 운영자 2012-08-21 1230
42 롬13:8 사랑의 빚은 져도 되는가? 운영자 2012-05-04 3971
41 롬10:9,10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2) 운영자 2012-03-09 4288
40 롬10:9,10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1) 운영자 2012-03-09 574
39 롬8:12-15 하나님의 양자 된 신자 운영자 2012-02-15 469
38 롬11:25 너무나 기구한 이스라엘의 운명(?) 운영자 2012-02-01 440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