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4:18-22) 아브라함은 언제 구원받았는가?
새벽기도 설교 (22)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18-22)
여호와를 믿는 의로움.
로마서의 주제는 알다시피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는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4장은 그 생생한 증거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그는 히브리인은 물론 모든 믿은 이의 선조입니다.
그는 최초의 신자였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그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믿음의 선조가 될 수 없고 또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 또한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율법을 전수 받기 약 오백 년 전의 사람입니다. 영원한 언약 백성이라는 징표로 육신에 새기는 할례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에 행했습니다. 나아가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후손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16절)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후손은 히브리인만이 아니고 그의 믿음에 참여한 많은 민족들을 말합니다.(16,17절) 이방인들을 구원하려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 외에는 율법을 모르고 또 받은 적이 없기에 애초부터 율법의 구원은 하나님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또 그래서 유대인들만 구원하려는 뜻이 아닌 이상에는 행위 구원은 고려할 일고의 가치도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롭다고 칭해준 시기가 창세기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먼저 그를 찾아와 두려워 말라 당신께서 상급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별도의 상급이 따로 없고 당신이 상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주실 테니 너도 너의 전부를 당신께 바치라고 말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꾸어 구원을 주심을 예표하고, 또 가까이는 모리아 산에서 자기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게 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계시의 구체적인 의미를 모르는 아브라함은 자기는 자식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기업을 받아도 물려줄 사람이 없으니 차라리 자신의 충실한 종인 엘리에셀에게 자기 기업을 물려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창15:6)
그런데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그럼 그가 여호와를 온전히 믿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단순히 “네 몸에서 날 자”라고 했으니 비록 사라의 태는 아니라도 아브라함의 씨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도 사라의 몸에서 날 자라고 말하지 않았고 또 당시는 일부다처제가 아무 허물이 안 될 만큼 일상적이었습니다.
요컨대 아브라함의 행위가 그리 틀린 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진행되어지는 과정이나 결과로 이스마엘은 약속의 씨앗도, 믿음의 후손도 아님이 판명 났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겼다는 말씀이 착오나 실수였습니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의로움
로마서의 오늘 본문은 그가 바랄 수 없는 중에(18절) 바라고 믿어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겼다고(22절) 말합니다. 바랄 수 없다는 것은 그 나이가 백세로 자기 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19절) 사라는 벌써 불임(不姙)을 넘어 경수(涇水)가 끊겼습니다. 그러다 이젠 아브라함도 임포텐스가 된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나서 이미 상당히 컸으니 창세기 15장은 약 10년 전 쯤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 때는 아브라함에게 생식기능이 살아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를 의롭게 여긴 것 즉, 구원을 주신 것이 창세기15장 때입니까, 로마서4:22의 때입니까?
이 문제는 사실 따질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점진적 과정으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단 번에 어떤 사건이나, 특별히 신자의 한 번의 회개나 고백으로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원파 같은 이단의 잘못된 주장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영혼이 그렇게 쉽게는 온전히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이를 구원을 주기로 택할 때에 이미 천국 영생은 보장된 것이기에 구원은 마땅히 확정되어진 미래일 뿐입니다. 모세가 나일 강에서 기적적으로 건짐을 받을 때에 이미 구원 받은 것입니다.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그는 출애굽 소명자, 율법의 수여자, 예수님을 예표하는 선지자로 확정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 본인이 스스로 항복하여 자기 믿음을 고백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데 80년이 걸렸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삼십 몇 년이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낼 때에 아니 그전부터 그에게 영생은 보장되었습니다. 갈 바 모르지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했고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이미 하나님은 그 때에도 그를 의롭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갈대아를 떠난 이후로 아브라함은 줄곧 믿음의 여정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중간에 몇 번의 실수와 잘못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누구나 온갖 갈등과 고뇌의 시간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지금 신약 성도들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런 믿음의 본질을 율법의 행위와 명료하게 대조하여 정확히 설명하려면 아브라함의 백세 때의 믿음의 상태가 더 적합하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럼 창세기 15장과 비교하여 본문에서의 그의 상태가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인간적 수단이 전무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시점에선 아브라함으로선 어쨌든 자기 몸에서 나면 된다고 여기고 하갈을 첩으로 두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자기 몸의 건강 상태가 아이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은 인간적 수단이 제로가 된 이후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만으로는 안 되고 사라의 태에서도 나와야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이 된다는 것은 한 번의 실패로 이미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 출산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해주시는 기적 외에는 방안이 없으며 세상에서 시도해볼만한 방법이라곤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인간이 죽었다 깨어나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일은 인간이 통제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다스릴 수 있어도 육신의 죽음을 주관할 수 없기에 타락한 영혼의 살림과 죽임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죄로 찌든 마음이 자기 영혼을 살릴 수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영혼을 살리는 구원에는 인간적 공로가,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단 0.001%도 개입되거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구원이란 죄에서 건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범죄 한 것이 인간 끼리에만 국한된다면 율법만으로 얼마든지 구원이 가능해집니다. 인간은 그 이전에 하나님에게 범죄 거역했습니다. 유일하고 완전한 선의 원천이요, 선한 능력이요, 선의 유업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멀리하면 자동으로 선과 멀어지기에 온갖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감당해주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신자의 순전한 믿음에 근거해서 죄 없다 즉, 의롭다고 여겨주어야 비로소 우리에게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시로는 예수 십자가 대속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몰랐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에서 갈 바 모르지만 떠났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손이라고 해서 사실 그대로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나이 99세에 내년에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에는 더더욱 그분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어쨌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갈대아에서 갈 바 모르면서 떠날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근거는 자신은 너무나 무능 무력한 위에 어떤 가치와 의미도 없으며 어떤 온전한 선도 행할 수 없음을 철두철미 절감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도 실은 예수를 믿어서 구원 얻은 셈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점진적인 구원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기 죄를 스스로는 도무지 씻을 수 없기에 너무나 괴롭고 애통해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소망하는 절망과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갑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겨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동일합니다. 내 속에서 나오는 것에 선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압니다. 내가 가진 것 모두를 동원해도 선을 이룰 수 없음을 매 순간 절감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를 바라고 그분의 선하심을 전혀 의심치 않고 전적으로 그분만 의지할 때에 하나님 그분이 당신만의 의를 신자에게 이루어주십니다.
바꿔 말해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수긍하고 믿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 때에 바랄 수 없을 때에 바랐던 그 믿음, 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자아가 깨어졌던 그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도무지 바랄 수 없을 때에, 탈출구라고는 하나도 없을 때에, 사방이 완전히 막혔을 때에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 찾아 붙들 수 있어야만 온전한 믿음을 소지한 것이며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는 신자가 됩니다.
9/8/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