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기독교에는 여타 종교와 크게 다른 점이 많이 있습니다. 생전에 자신이 이미 구원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그중 하나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는 교리를 배우고 믿었기에 구원도 당연히 확보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한 거듭남의 체험을 실제로 겪는다는 것입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예수님 말씀처럼 그 거듭남의 구체적 과정은 제대로 인식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간섭한 후에는 이미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본인은 확실히 깨닫습니다. 자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알 뿐 아니라, 죽었으면 죽었지 옛 모습으로 되돌아갈 마음이 추호도 생기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불신자 시절에는 예수가 주는 것 없이 무조건 싫다가 어느 순간엔가 그분이 별다른 이유 없이 좋아집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이 본보인 삶을 따르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여생을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생깁니다. 사단에 묶여 있던 신자의 영이 성령의 역사로 풀려나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에선 구원이 미래의 천국에서 발생할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자기 소유가 된 것입니다. 또 그 현재의 구원은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맞바꿈으로 확보된지라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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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기독교의 기도도 여타 종교의 기도와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만 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영적이고 의로운 기도를 먼저 많이 하고 육적이고 현실적 소원은 나중에 조금만 구하는 식으로, 기도하는 순서나 초점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구원을 확보했다는 차원에서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현실의 필요보다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내린 결론도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4) 이방인이나 신자나 기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장래를 염려하기 때문인데 신자의 장래는 이미 하나님이 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실 것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당신 백성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보호와 인도 아래에 이미 들어온 것입니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그 품안에서 절대 내쳐지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분이 지켜주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혀 자격도 없는 죄인을 사랑으로 품어주셨다면 당신만의 계획이 반드시 있으며, 또 그 계획이 이뤄질 때까지는 당신께서 책임져주셔야 함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는 신경 쓰지 말라는 또 다른 뜻이 무엇입니까? 신자더러 세상 앞에 당신의 거룩한 나라로 서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니까 자신이 그 일에 온전히 쓰임 받아 그분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나라를 절대 못 이루실 리 없다는 확신의 바탕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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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기도의 솔직한 실상은 어떠합니까? 우선 기도하는 내용이 사실상 이방인이 구하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대부분입니다. 맨 앞의 “하나님 아버지!”라는 부름과,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이라는 마침 말을 붙이는 것 말고는 그렇습니다. 중간 중간에 기독교적 용어를 섞어 넣기도 하지만 실제 간구하는 내용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다 아무래도 자기 정욕대로 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스스로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선 응답이 안 된다는 야고보 사도의 엄포(?)도 신경이 쓰입니다. 간구하는 질과 양을 조금 검소하게 낮춥니다. 또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한답시고 교회 일을 위해 잠시 기도한 후에 자기 구할 것을 구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친절하신(?) 지적대로 구하는 순서만 바꾼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도를 담대하게 하지 못합니다. 기도에 자신감을 점차 잃어가고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도 없이 기도합니다. 그저 어쩌다 응답해주시면 감사히 받겠다는 투입니다. 겸손을 가장한 것 같지만 이제는 자신의 믿음에도 자신을 잃은 것입니다.
이와 정반대되는 현상도 많이 나타납니다.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정말 문자적으로 믿습니다. 그것도 기도한대로 다 받을 줄 미리부터 믿고 무작정 끝까지 그렇게 기도하는 자들도 꽤 많습니다. 뜨겁고도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젠 자신의 기도하는 열성과 끝까지 믿어보려는 의지력을 믿은 것에 불과합니다.
기도에 자신감을 잃은 신자나, 그 반대로 너무 맹신하는 신자나 믿음으로 확보하려는 궁극적 대상이 무엇입니까? 기도의 응답입니다. 언제 어떻게 응답될 것인지에만 과민하게 신경 쓴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독교다운 즉, 당신의 뜻을 따르는 기도를 하라는 깊은 뜻은 모릅니다. 응답 빼고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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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1,32, 38,39)
성경은 분명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기에 기독교 신자도 무엇이든 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소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정말 더 당당하게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망, 장래 일, 깊음 등 세상 어떤 것도 예수 믿는 신자를 사랑하는 하나님께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신자가 어떤 깊음에 빠져 있어도, 장래 어떤 일이 닥쳐도, 심지어 사망을 해도 여전히 하나님이 신자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아무리 기도 많이 하는 신자라도 그런 어려움은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작 구해야 할 대상은 그런 일을 안 겪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 가운데서 신자답게 바로 서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에 다른 것 즉, 그분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께 사망을 막아서고, 장래 일을 미리 보여주며, 깊음에서 건져 올려주어 당신의 사랑을 다시 더 크고도 화려하게 나타내 보이라고만 요구합니다.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을 걸고서 그 사랑을 벌써 오래 전에 절대적으로 보증했는데도 말입니다. 마치 혼인신고까지 마친 아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남편보고 결혼한 사실을 믿을 수 없으니 뭔가 확실한 증표를 보여 달라는 꼴입니다. 결혼할 때 받은 다이아 반지보다 캐럿이 더 큰 반지를 건수만 생기면 사달라고 졸라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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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기도가 기독교의 그것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자기들이 비는 대상과 기도가 응답되는 근거에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빌고 또 빕니다. 또 그 비는 정성과 열심에 비례해서 응답된다고 여깁니다. 둘째, 자기들 신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비는 대상이 어떤 분인지조차 모르니까 그 대상이 품고 있는 뜻은 모르는 게, 아니 있다고 생각도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기도가 과연 그들보다 확실히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부분에선 어떠합니까? 스스로 고안 내지 계획해 놓은 여러 대체 방안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과제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 방안들이라고 해야 기독교적 색깔과 무늬로 덧칠했다 뿐이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면서 말입니다.
신자들조차 “하나님의 뜻”이 의미하는 내용 자체를 정확히 모릅니다. 하나님 뜻을 먼저 구하라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주님 가르치신 기도의 풍성하고도 권능이 넘치는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진짜로 능력 있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기도가 자신감과 당당함이 사라져 의무처럼 되었거나, 자기가 정한 대체 방안 중에 하나를 하나님께 떼를 쓰서라도 기어이 이루어내는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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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시편의 수많은 기도들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온갖 의심, 불평, 심지어 불신과 분노를 토설하지만 결국에는 그분에 대한 감사, 경외,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기도하러 들어갈 때는 우는 얼굴로 들어갔다가 마치고 나올 때는 웃는 얼굴로 변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이에 여건이 개선된 것 하나 없어도 그랬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기도를 통해 가장 먼저 구한 내용은, 최소한 구하지는 않았다 해도 응답 받은 내용만은 자기 대체 방안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방식대로의 응답만 고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기도 중에 그들에게 이런 확신이 들었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느냐? 나는 이미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지 않는가? 거기다 내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염려할 필요와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만큼 부질없는 짓이 어디 있는가?”
재차 강조하지만 그들이 기도한 대로 문제가 해결되어서 평강을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그분에 대한 믿음을 다시 바로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위로, 안전, 만족, 능력, 평강, 자유를 오직 그분에게 온전히 내맡겼습니다. 또 그러는 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재확인함으로써 신자의 신자다움도 재발견했던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기 전이나 후로 하나님이 전혀 변함이 없기에 신자도 신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다시 굳건하게 바로 선 것입니다. 자기가 이미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신분이 된 것만으로 내일 일을 염려치 않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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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존의 종교와 도덕적, 종교적, 영적 차원에서 더 높은 수준의 기도를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에서 이방인적 색채를 깨끗이 탈색해 내고, 바리새적인 율법과 종교의 냄새를 완전히 제거하려 했습니다. 당시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자신의 열성과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시키는 기도를 하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당신이 하나님 본체이셨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가르치신 기도에 놀라운 권능이 나타나는 까닭도 하나님 독생자가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자에겐 뜨겁고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이전에 반드시 구원을 이미 소유한 자답게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온전한 은혜와 권능 안에 이미 들어왔습니다. 주님 가르치신 대로 기도하는 큰 용사(Pray Warrior)가 되어서 하나님의 의가 불신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게 하고 그 나라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면 최소한 열심히 기도해놓고도 여전히 걱정하는 자(Pray Worrier)는 안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자신이 없어서 맥이 빠졌거나, 거꾸로 울부짖듯이 뜨겁게만 기도하는 것 둘 다 솔직히 내면의 염려를 기도라는 종교행위로 감추거나 줄여보려는 뜻이지 않습니까? 온전한 믿음이 아니며, 응답 받는 기도는 더더욱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독교의 기도가 이방인의 그것과 어떻게 다르다고 가르쳤는지 함께 탐구하는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합시다. 비록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긴 해도 이 책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관점과 차원에서 기도를 접근하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차 례
들어가면서 1
1 마 6:9-13 스파게티도 못 먹는 신자 7
2 마 6:9 돼지도 웃는 돼지의 자살 16
3 마 6:9 데이트 중에 가버린 여자 26
4 마 6:9 어중이 떠중이 같은 패거리 신자들 37
5 마 6:9 세상에서 최고로 시원한 사이다 46
6 마 6:9 하나님 제발 힘 좀 내세요! 56
7 마 6:9 자동 응답기를 설치해 놓으신 하나님 67
8 마 6:10 정신병원에서 왕 노릇 하는 신자 78
9 마 6:10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시오 88
10 마 6:10 천사들을 실컷 부려 먹으라 99
11 마 6:11 카터 대통령의 별난 식사기도 109
12 마 6:12 용서는 해도 절대 잊지는 못해 119
13 마 6:13 욕심을 채우며 살아라 129
14 마 6:13 김정일이 예수를 믿었다면? 139
15 마 6:13 기도 걱정 꾼들(Prayer Worriers) 149
16 마 6:14,15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159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