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 1:2-3)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린 솔로몬의 한탄입니다. 인생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합니다. 비교와 최상급 표현법이 따로 없는 히브리어로는 두 번 되풀이 하면 비교적인 강조, 세 번 되풀이 하면 최고도의 강조라는 뜻입니다. 지금 무려 다섯 번이나 헛되다고 되풀이 했습니다.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헛되다는 것입니다. 헛되지 않은 것이라곤 눈을 닦고 살펴봐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저 그냥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는 것 말고는 인생을 설명할 말이 달리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땅은 영원히 있다고 합니다. 이제 솔로몬이 인생이 헛되다고 한탄한 의미가 분명해졌습니다. 영원하지 않기에 헛된 것입니다.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산출도 결국은 다 썩어 없어지므로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결론은 지혜가 뛰어난 솔로몬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가 지닌 학식 경험 문화 사상 종교와 상관없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에는 절로 입에서 새어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렇게나 아등바등 살아왔던 인생이 너무 덧없고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절감합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따져 어떤 인생도 이 땅에서 어떤 목표를 정해서 달성하려고 열심히 살아야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인간 사회에는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각기 고유의 종교를, 최소한 그 사회에 통용되는 윤리 규정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성원들이 그 사회에서 먹고 살아가려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기준입니다. 자기는 물론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마지막에는 다 썩어 없어질 텐데 구태여 귀찮고도 힘들게 그런 기준을 따라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요?
이런 의문에 대해 한 사회가 문제없이 공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개인에 적용하면 죽어서 다 없어질지라도 그 때까지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아야만 자기도 안전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또 다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 규범들은 순전히 사회와 개인의 안전을 위하는 기능과 역할을 할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규정을 위반하여 소정의 벌칙을 준행하고 피해자에게 보상을 해주고 나면 깨끗이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이상하게도 규정대로 다 처리했는데도 씁쓸한 죄책감이 계속 남아서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은 대체 어떤 연유입니까? 그럼 그 윤리규정이 단지 그 사회를 큰 문제없이 보존하는 기능 외에 다른 역할도 있는 것은 아닐까요?
거기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나라마다 문화와 생활수준이 달랐어도 지금껏 모든 인간 사회가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지키는 몇 가지 윤리 계명들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증거는 하지 말아야 하고 이웃의 집도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십계명의 인간관계에 대한 후반(5-10번째) 여섯 계명들입니다. 이 여섯에 대해선 범죄 구성 요건이나 징벌의 수준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를 어기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인간 공동체는 유사 이래 없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모든 인간사회가 이렇게 나름의 윤리규범을 가진 것은 그 지도자들이 구성원들을 교육 훈련시킨 결과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입니다. 그런 계명들이 대대로 교육 훈련되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초에 그렇게 해야만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시행한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과 시도를 하게 된 것입니까? 공간적 시간적으로 세계 각처에 흩여져 서로 다른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든 족속들이 의논 한 번 하지 않고도 이 여섯 계명만은 똑같이 시행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나아가 사람들이 그것들을 위반하면 따르는 징벌 조항과 무관하게 누가 강요 권면하지도 않았는데 그 규정들을 잘 지키려 노력하고 있는 현상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특정 종교를 갖지 않고 윤리 과목에 우등생이었던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아무리 세대가 바뀌어도 이 계명들만은 모든 인간에게 부인되지 않고 더 잘 지키고 싶은 보편적 기준으로 그 마음 판에 이미 다 심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유감스럽게 21세기에 들어서 일부 선진국에선 그 여섯 중에 간음 하나는 더 이상 죄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적인 제제만 받지 않는다는 것일 뿐 막상 간음을 행한 당사자에게 죄의식은 여전히 생긴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해선 인간이 원래부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양심적 존재였다는 것 외에는 합당한 설명이 없습니다. 또 원래부터 그랬다면 인간이 스스로 의식하여 개발한 것이 아니라 어떤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존재가 인간 안에 그런 성향을 심어놓았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도덕적으로도 거룩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을 닮아서 도덕적 존재로 창조한 것입니다. 그 형상이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파괴 내지 왜곡되었어도 희미하게나마 양심의 형태로, 최소한의 이 여섯 공통된 계명으로 모든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이 헛되다는 고백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헛된 것 외에 단 하나의 의미도 찾을 수 없지만, 영원한 땅을 조성하신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은 비록 수고하든 평온하든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3:10-15)
작금 십계명은 몽땅 박물관에 들어가야 할 완전히 케케묵은 유산으로 취급됩니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살펴본 대로 십계명은 인간이라면 세대 장소 인종 문화 나라를 넘어서 누구나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할 바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바의 최소한이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필수적인 규범입니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의미가 있어집니다. 솔로몬도 물질적 정치적 풍요를 넘치도록 다 누려봤지만 그것만으로는 헛됨을 도무지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선을 행함으로써 비로소 그 헛됨이 사라졌다고 고백합니다. 인간관계의 여섯 계명들도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는 십계명의 전반 네 계명들을 준행하는 바탕에서만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인지라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는 아무리 잘 준행해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정말로 인간끼리만 있다면 구태여 윤리적 존재가 될 필요가 아예 없습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살펴본 대로 인간 사회 보존할 수 있는 최소의 규칙을 만들어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도 당신의 뜻에 따라서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고 인간 만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최소한의 요구인 십계명을 지금이라도 현대적 언어로 치환하여서 그 영원한 진리 됨이 손상치 않게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나아가 세속의 인간들도 인간답게 또 그들이 모인 공동체가 정말로 온전하게 유지 성장할 있는 길도 이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2018년 초에 행한 출애굽기 강해설교 중에 십계명 부분만 따로 모아서 편집했습니다. 정말로 거룩하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깨달아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간절히 소원해봅니다. 교회마다 십계명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도록 감히 소망해봅니다.
마지막이지만 제 글들을 아무 대가 없이 E-book 파일로 전환 편집해주신 박총명 형제의 노고에 제 모든 진심을 다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제 홈페이지를 통해 그런 귀한 형제님을 만나고 교제 동역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허하게 무릎 꿇으며 제게 맡겨주신 소명에 더욱 헌신하기로 다짐해봅니다.
2019년 8월
차례:
들어가면서
모든 인간은 십계명으로 구원받는다. (출20:1-17)
첫 계명의 뜻도 모르는 신자들 (출20:1-3)
우상이 정말로 무엇인지 아는가? (출20:4-6)
하느님과 하나님의 차이. (출20:7)
주일인가? 안식일인가? (출20:8-11)
효도하면 장수하는가? (출20:12)
정말로 무시무시한 살인 (출20:13)
Me too 운동의 영적 실상 (출20:14, 마5:27-32)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뜻은? (출20:15,신24:6)
목사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출20:16,신13:6-9)
십계명의 결론은? (출20:17)
신자가 평생토록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 (출24:1-11)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