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1:4) 성령이 말렸는데도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나요?

 

[질문]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21:4)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두 번이나(행21:11,12) 만류했는데도 바울은 기필코 갔습니다. 위대한 사도가 행할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니까 그런 거역도 주님의 뜻이라고 간주해야만 합니까?

 

[답변]

 

성령의 다양한 역사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경을 해석함에 제일 먼저 또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나 목사들이 지금껏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고 심지어 목사들도 동일한 오류를 범합니다. 그 동안 여러 방식과 경로로 배우고 체험했던 자신의 신앙적 지식 선입관을 성경 본문 해석에 절대로 접목시켜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완전히 백지의 중립적 상태에서 성경 본문이 말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 자체의 뜻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비로소 자신의 신앙노선과 견주어봐야 합니다. 본문의 뜻이 자기 배운 바와 일치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앙 노선을 재점검해야만 합니다. 요컨대 본문을 자기 생각에 맞추어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누구나 어떤 사안을 대할 때마다 이미 확정된 자기만의 주관 철학 가치관으로 해석 판단하여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생활을 오래한 신자는 신앙적으로도 고유의 색깔과 노선이 이미 굳어져 있고 성경 또한 자기도 모르게 그에 맞추어 해석해버리는 아주 잘못된 습관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상기의 구절은 백지 상태에서 본문을 중립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선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면” 신자라면 당연히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전제해놓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믿음이 좋고 사도로 헌신 충성하고 있는 바울의 다음 행보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신자를 초자연적 힘으로 강제하지 않기에 신자가 잘 분별 판단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지정의의 작동처럼 신자 스스로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참으로 오묘한 방식으로 신자의 영혼과 끊임없이 영적인 교통을 하십니다. 쉽게 말해 각 신자마다 교통하는 내용과 방식은 신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또 무엇보다 당신의 뜻에 따라서 각기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방식과 의미는 없습니다.

 

문제와 고난이 닥쳐서 낙심하고 있으면 영적으로 신자 내면에 위로와 격려로 채워줍니다. 기도에 힘쓰도록 이끌고 그래서 담대하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변화되도록 인도하고 삶의 방식과 인생의 목적을 바꿔서 주님을 따르도록 만듭니다. 때로 주변의 모든 악한 세력을 미리 막아줍니다. 반대로 그런 곳으로 의도적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까지 분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잘 증거 하게끔 각 사람에게 합당한 은사를 나눠주시고 그 은사의 사용까지 주관하십니다. 그런 각양 성령의 역사 가운데 간혹 상기의 진술처럼 초자연적으로 당신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해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다 장차 어떤 일에 대해서 어떻게 행하라는 계시까지 주실 때도 있습니다.

 

성령의 대표적인 역사를 원론적으로 몇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다시 강조하지만 말로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그래서 성경에조차 다 기록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하고 신비스럽고 오묘하고 완전하며 거룩합니다. 그럼 상기 본문에선 성령이 바울에게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바울에겐 성령의 감동이 없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백지 상태에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쉽게 적용하자면 일단 문학적 분석부터 해야 합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성령이 감동을 준 대상은 제자들이었지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그 뜻은 바울에게 경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지시하더라.”고 진술하지 않았습니다.

 

문학적 분석이라고 해서 국어 실력이 뛰어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여러 번 본문을 읽고서 단순히 본문이 말하는 정확한 뜻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또 그 뜻을 문맥 안에서 동일한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와 비교해가며 따져보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 본인은 자신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진술하고 있습니까? 상기 본문은 두로에서 성도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린 내용이며(행21:4), 가이사라의 형제들도 아가보의 예언(행21:11)을 듣고 마찬가지로 만류했습니다.(행21:12) 바울 본인의 고백은 행20:23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두로와 가이사라를 방문해 그곳의 형제들을 만나기 전 에베소에서 말한 것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우선 바울이 단순히 자기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합니다. 스스로 오래 생각하여 결정한 어떤 확고한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저기,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성령의 구체적인 계시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라고 합니다. 성령이 직접적으로 누구에게 말했는지 조금 분명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흠정역(KJV) 번역에는 목적어 ‘내게’가 없습니다. 단순히 각성에서 증거했다고만 합니다.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신 바가 있었다고 진술하지 않았고 앞에서 무슨 일이 기다릴지 모른다는 진술도 있기에 다른 이로부터 증거를 받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설령 바울에게도 위험이 기다린다는 성령의 계시는 있었다 해도 올라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에베소, 도로, 가이사라 등 바울이 방문하는 성마다 또 그 전의 방문지에서도 장로들과 형제들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큰 위험이 있다는 동일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도 중에 성령님이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선지자 아가보는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행21:11) 이 같이 띠의 임자(바울)를 결박해 이방인(로마당국)에 넘겨줄 것이라는 구체적 예언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 형제들 사이에서 한 성령이 역사하는 모습이 대단할 뿐 아니라 당연히 일치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분명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만난 형제들의 그런 간곡한 만류를 접한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너희가 성령의 계시를 받아서 나의 안위를 염려해서 만류한다는 점을 잘 알고 또 너무나 감사하지만 나는 결박당하는 것은 물론 주님을 위한 순교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감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형제들도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경고만 하고 만류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21:14) 흥미롭게도 그들도 마지막에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성령이 환상이든 미세한 음성이든 보여주고 들려준 것은 사실이지만, 형제들 또한 “바울을 절대로 올려 보내지 말라 그것이 내 뜻이다”라는 계시는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결박당하는 일의 구체적인 목적과 의미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인가보다 하고, 내키지는 않지만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직접 받았던 형제들마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성경해석을 우리의 선입관에 의거해 표피적 부분적으로 행하고 있는지 명백하게 드러났지 않습니까?

 

'내가 복음'으로 읽지 말라.

 

지금 질문하신 주제와 연관해 성경을 살펴봄에 특별히 심오한 교리나 신학은 전혀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본문을 시제나 태 같이 문법적으로 어렵게 분석하지도, 또 각 단어들의 원어의 의미와도 대조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전후 문맥에 따라 기록된 그대로 초등학생이라도 해석할 수 있는 국어실력으로 읽었을 뿐입니다.

 

성경적 신학적 선지식(先知識)이나 선이해(先理解)를 단 하나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것만 다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본문 21:4를 육하원칙에 따라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말을 왜 어떻게 했으며 어떤 결과가 되었는지 등만 분석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뜻이 정확한지 판명하기 위해 앞뒤 문맥에 대입해서 살폈습니다.

 

대체로 우리말의 표현법과 수사법이 논리적이지 못하고 두리뭉실합니다. 한국인들도 우리 모두 인정하듯이 이성적이지 않고 감성적이며 성격이 급합니다. 어려서부터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토론 이해하는 훈련이 잘 안 되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성경을 스스로 묵상 연구해서 뜻을 찾아보려는 소망이 거의 없고 교회에서 목사가 그것도 설교시간에 풀어주는 것만 듣고 오는 것이 성경 이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가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방법론을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을 많이 알면 머리만 커져서 목사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성경마저 깊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종교개혁 전에 사제들이 성경해석과 강론을 절대 배타적으로 독점했던 죄를 지금도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래선 성도들이 평생을 가도 성경의 깊은 진리와 은혜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심하게 말해서 아무리 교회 생활 오래 해도 삶의 변화가 없고 믿음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영성이 무미건조 나태해져서 종교적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 경건의 시간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져도 자의적인 “내가 복음” 식으로 해치우니 신앙성숙이 안 됩니다.

 

본질적인 영적 성숙은 뒷전이고 큐티를 얼마나 성실히 했는지 또 그에 따라 성경구절에 대해 지식적으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가 신자의 자랑이자 의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아침에 큐티를 했으니 오늘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며, 그러지 않고 빠트리면 뭔가 벌을 받을 것 같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까지 합니다.

 

성경을 내가 복음 식으로 해석하다 자칫 이단의 뜻이 되면 아무리 성경을 오래 묵상해도 상은커녕 도리어 벌을 받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물론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설령 일부를 잘못 해석했다고 벌을 주시진 않지만 논리적으로 따져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그만큼 성경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기어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까닭

 

본문에서 많은 신자들이 놓치는 부분은 바울에게 성령이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계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일련의 성령의 역사가 주변의 형제들에게만 일어난, 그 결과로 어찌 보면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겐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쉽게 알 수 있다시피 바울에게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기다리니까 단단히 각오하도록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영적으로 더 겸손히 낮아지고 주님 앞에 더욱 헌신 충성토록 하려는 뜻입니다.

 

바울로선 지금껏 본인에게 성령의 계시가 있었어도 이번처럼 자기 일에 관해서 자기 대신에 가는 곳마다 형제들에게 동일한 성령의 경고가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만큼 중차대한 일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일을 하나님이 지극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니까 형제들더러 더더욱 바울을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울이 결박당하는 모습을 보여준 이상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를 위해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는 선교사 개인이 일선 현장에서 자기 열심과 노력과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후방 교회의 간절한 기도와 후원이 함께 아니 먼저 동원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살필 것은 바울에게 성령의 계시는 없되 스스로의 심령에 매인바 된 것이 무엇인지입니다. 그가 형제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또한 그 뒤의 사도행전 기록을 잘 살펴보면 몇 가지로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에서 모아준 구제 헌금을 기근을 맞은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주어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서원한 일의 기한이 마쳤으므로 성전에서 결례를 드려야 했습니다. 각지의 이방인 교회들에 맺어진 선교의 열매를 교단 총회격인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고 함께 위로와 도전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들 교회에 대한 추가 지원책들도 논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 선교지로 서바나를 정했기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원과 기도 후원을 부탁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유대교의 유전을 아예 무시한다는 오해 내지 음해를 받고 있기에 스스로의 결례를 통해 씻어주어야만 하는 등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도 너무나 합당하고 중요한 이유들이었습니다. 간단히 하나만 들어도 하나님께 서원한 일의 결례를 성전에서 마치겠다고 하는데 성령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계시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바울 본인도 사전 경고는 감사히 또 심각하게 받아들였지만 어떤 위험이 기다리더라도 자신이 꼭 행해야만 할 바는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바울을 향한 뜻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바울의 그것을 훨씬 넘어섰기에 그가 결박당하는 일을 허락했고 또 사전에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사역지로 정한 서바나에 가기 전에 로마 교회에는 후원요청을 주목적으로 잠시만 들릴 계획이었습니다. 큰 위험을 겪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서 또 그렇게 오래 머물 줄은 바울도 제자들도 현 단계에선 물론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은 전혀 몰랐습니다. 나아가 서바나는 가보지도 못하고 로마에서 순교하리라고는 아무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우선 로마 군인에게 결박당해 압송당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여행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극도로 미워해서 암살하려고 모의하고 40명의 결사단체를 조직했을 정도였습니다.(행23:12,13) 유다 경내에 계속 머물면 언제 그가 암살당할지 모를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역설적으로 로마당국의 감옥 만큼 안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는 것이 하나님만의 그들을 창성시키는 비결이었듯이 말입니다.

 

로마에서도 자택에서 안전하게 연금생활 2년 정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하나님만의 전도 방안이었습니다. 로마 근위대의 장교들과 왕족과 귀족들이 오히려 그를 찾아왔고 너무나도 자유롭고 평안한 상태에서 진리를 맘껏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이 가이사라 형제들이 말했던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각 나라의 왕들과 방백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 세웠습니다. 이제 사탄의 심장부이자 당시 세상의 중심인 로마에 십자가 복음의 폭탄을 들고 가서 터트리게 할 것이며 또 그곳에 한참을 머물게 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를 그곳에서 순교시키는 것까지 하나님은 이미 다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로마 같이 이미 복음이 전해진 곳은 자신이 다시 전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항상 미전도 종족을 향해 나아갔으며 필생의 꿈은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대로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신대륙의 발견이 이뤄지기 전이라 지중해 세계의 끝은 서바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에 대한 계획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계시로 바울더러 서바나 대신에 로마로 가라고 하면 언젠가는 순종했겠지만 서바나 갔다 온 후에 가겠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 실현에 훨씬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의 가옥에서 안전하게 거하면서 이년 정도 왕족 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루살렘 체포 이후의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길은 아무리 바울이라도 하나님의 그것의 발등상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참으로 오묘하지 않습니까? 모든 일련의 사건의 결말은 에베소에서 바울이 믿음으로 고백한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순교도 각오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에게 순교를 각오하라는 성령의 직접 계시는 없었으나 성령이 내주하고 있었기에 그런 믿음을 유지하며 그런 고백까지 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 사람은 갖지도 알지도 못하는 예수 믿는 신자들만의 은혜요 특권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합니다. 성경을 본문 자체가 말하는바 그대로의 뜻만 찾아내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십시오. 성경을 읽기 전에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하되 그 전에 자신의 지식과 주관이 개입되지 않도록 생각을 비우는 기도를 반드시 하십시오. 그리고 본문에서 찾은 뜻을 문맥과 비교한 후에 이왕에 갖고 있던 자기 생각이 옳은지 점검해보십시오.

 

3/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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