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3:1)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3)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야고보서의 특징

 

상기 구절은 본문 자체로도 난해하지만 야고보서 전체가 해석하기 아주 어려운 책입니다. 마치 선행을 쌓아야만 하는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믿음으로 얻는 은혜구원이 부인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질 때에 논란이 많았고 종교개혁의 선봉장이었던 마르틴 루터마저 그 진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여러 주제를 중구난방 식으로 일관성이 없이 진술하고 있는 것 같아 해석상의 또 다른 장애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기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야고보 사도가 과연 행위 구원을 강조하려 했는지부터 온전히 분별해야 합니다. 또 그와 연결해서 앞뒤 문맥에서의 의미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신약 서신서의 가장 큰 특징을 아셔야 하는데 특정 교회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는 로마서를 빼고는 이미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을 수신자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즉, 유대인 신자들에게 문안한(1:1) 후에 곧바로 이런 말씀이 이어집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형제라는 호칭은 앞에서 열두 지파라고 했듯이 유대교와 로마 당국으로부터 이중 핍박은 물론 교회 안의 온갖 문제로 시달리는 유대인 신자를 다시 친근하게 부른 것입니다. 그들더러 그런 시험을 오히려 기쁘게 여기고 인내를 통해 믿음이 온전히 성숙해지라고 권면합니다.

 

요컨대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이룰 성화(聖化 sanctification)에 관한 서신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지 혹은 잘못하면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사도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서신은 그 길이가 일반 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짧은데 그런 서신 한편 내에서 수신자, 저작 의도, 주제, 강조점 등이 바뀔 리는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문제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는 말씀입니다. 이 한 절만 보면 행위구원을 강조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보건대”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근거로 강조 하건대”라는 뜻입니다.

 

일상적으로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한 것입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예수 십자가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한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주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구원을 뜻합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칭의의 구원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행위도 반드시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로 보건대”라는 말로 사도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잘 살피면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도 따라야 구원을 얻는다.”는 즉, 성화를 강조하려는 자신의 취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가 앞에서 설명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 행함이 없으면 능히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행위가 따르지 못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곧바로 예로든 행함이 없는 믿음을 따져 보십시오. 형제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데 말로만 평안히 가고 배를 불리도록 노력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아무 이익도 없다고 합니다. 반드시 몸에 쓸 것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5,16절) 실제로 도와주지 않으면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아예 그런 관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2:14에서 믿음이 있다고 “말해 놓고” 그 믿은 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이고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믿음이라는 뜻이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2:18) 동일한 맥락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지금 “행함이 있는 믿음”을 “행함이 없는 믿음”과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구원이 없는 반면에, 행함이 없이 믿음만 있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점을 대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20절) 그 대신에 행함이 따르는 믿음의 표본으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들고 있습니다. 결국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은 (구원을 얻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는 2장의 결론을 보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 없는 몸과 비교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으려면 영혼과 몸 둘 다 있어야 합니다. 둘 중 하나가, 특별히 영혼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행함이 같이 있어야 살아있지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야고보의 뜻은 믿음과 행함은 실과 바늘처럼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아예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단순히 도덕군자로 자신의 의만 높이는 치장 자랑 교만일 뿐이며 구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에 참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반드시 함께 따르기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한 것입니다.

 

목사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면?

 

이런 결론 후에 전혀 엉뚱한 내용의 본문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 요즘으로 치면 목사가 더 큰 심판을 받으니까 목사가 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칫 목사조차 온전하지 못해 구원이 취소된다면 일반 신자는 더 그럴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또한 전체 문맥에서의 뜻을 잘 살펴야 합니다. 먼저 당시 많은 이들이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말리고 있습니다. 자칫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인데 그 이유를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왜 선생으로써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말은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너무나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2-6절)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자가 되지만(2절), 정반대로 말은 또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는데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 합니다.(6절) 둘째는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진 말을 통제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몸도 굴레를 씌울 수 있으나(2절)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8절)

 

이런 설명으로 그치면 말을 잘못 통제함으로써 심판에 떨어진다고, 말하자면 목사도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심판받는다는 뜻으로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와는 정반대 의미의 말씀을 덧붙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3:9-12)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만, 감람나무는 감람만, 포도나무는 포도만 열매 맺지 다른 열매는 맺을 수 없는 이치와 같이 말입니다. 그럼 선생이라면 반드시 한 입으로 찬송 하나만 내어야지 만약 저주가 나오면 이미 선생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앞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선생도 반드시 그 가르침의 열매로는 찬송만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선생의 입에서 저주가 있으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듯이 이미 죽은 선생, 선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그 뜻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13,14절)

 

야고보서 전체에 일관되게 강조하는 맥락대로 행함으로 지혜의 온유함을 보이라고 합니다. 선생이라면 “위로부터 난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의 선한 열매를 맺는 참 지혜”(17절)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열매를 보면 그 믿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반면에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진리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이라고 정죄합니다.(14,15절) 결국 선생을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탄에 속한 자 둘로 나누었습니다.

 

질문하신 구절의 뜻이 이제 더 분명해졌습니다. 첫째 야고보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대로 선생은 “화평케 하는 자로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3:18, 선생에 관한 3장의 결론)는 것입니다. 선생의 책임이 그 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제대로 행하지 않으면 즉, “마귀로부터 오는 정욕적 세상적 지혜로 가르쳐서 교회에 독한 시기와 다툼과 거짓을 만연하게 하는”(14,15절) 선생은 큰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죄를 범하면 구원이 취소되고 큰 심판을 받으니 목사가 될 꿈을 꾸지 말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성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저자의 저작 의도와 강조하려는 책 전체의 주제에 맞추어 앞뒤 문맥 안에서의 뜻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3/2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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