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2:20-22)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2)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 후서의 저작 의도

 

베드로후서의 이 구절도 앞선 글 히브리서 10:26-27처럼 언뜻 보면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고 세상의 더러움에 얽매여서 지면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비참한 나중 형편을 이스라엘의 속담에 비유함으로써 그런 뜻을 더욱 분명히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수신자가 누구이며, 저작 당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를 갖고 썼는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는 교회가 외부로부터 겪는 핍박에 대해 위로하고 믿음으로 이겨내라 권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후서는 교회 내부의 거짓 교사로 인해 분열되고 특별히 도덕적 타락에 빠져 배교하는 일에 대한 경고가 주제입니다.

 

이 서신에 어떤 지역이나 교회 이름 대신 저자인 베드로로 가름하는 이유는 수신자가 특정하게 제한되지 않고 여러 지역의 모든 신자들이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전서1:1에서 사도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밝혔습니다. 후서도 마찬가지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신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 당시 그 지역의 여러 교회가 공통적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이 서신은 순교 직전 네로 통치의 말기인 AD 66-67년경에 저작된 것으로 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지 한 세대가 채 지나기 전부터 교회 안에 이단이 침투한 것입니다. 본문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선 사도가 경고한 거짓 가르침이 무엇인지부터 아셔야 합니다.

 

늦어진 재림

 

주님의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사도들마저도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한 세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차츰 십자가 사건의 직접 목격자들도 많이 죽어 없어졌고 주님의 재림은 요원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은 제일 먼저 재림을 대비하라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비난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16)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주님의 신속한 재림은 사도들이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비난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비난에 대해 사도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자신의 직접적인 목격체험을 들어 반박했습니다. 변화산에서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천국에서 불러 내려서 대화를 나누는 신령한 모습을 보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1:17,18) 이어서 “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말라”(20,21절)고 합니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오역하여 그릇되게 가르친다고 지적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은 없고 세상만사는 단순히 합리적인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선동했습니다. 재림의 심판이 없다면 이 땅에서 마음 놓고 안락과 쾌락을 즐겨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실제로 이들은 더 이상 정죄가 없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자유롭고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교인들도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라고 독려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기승을 부리던 영지주의 이단이 이미 교회마다 침투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에 기원을 두는 영지주의란 간단히 말해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고 믿습니다. 물질로 이뤄진 육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원래부터 악한 데서 나온 것이니까 아무 문제 삼을 것 없으며 영혼만 깨끗하게 유지하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아무리 방탕해도 죄가 아니며 그것이 오히려 인간이 자유를 누리는 모습이라고 강변합니다. 영혼의 자유는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으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 바로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는 것이 그들이 깨닫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반드시 가르치고 실현해야 할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정반대 편에서 훼방 대적하는 가르침입니다. 사도는 그들의 이런 가르침에 대해 경고 정죄하며 교인들더러 참 진리인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베드로 후서의 2장 전체는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폐해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2:2)

 

‘저희’는 거짓 선생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호색을 하고 있으면서 교인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도 즉,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얻은 구원의 길이 훼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일부교인들이 참 복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짓 선생을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참 복음을 알면 주님을 좇아서 세상의 멸시 핍박을 기꺼이 감수하며 거룩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고 이단에 넘어간 자들이니까 덩달아서 호색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10절)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 육체를 따라서 - 영지주의 주장대로 육체는 아무 죄가 없으니까 -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특별한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배짱 좋게 자기들 고집대로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과 그 모임인 교회를 훼방하고 있습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13,14절)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행한 불의의 대가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낮에 연락을 취합니다. 향락은 주로 밤에 취하나 아무 염치가 없기에 낮에 온갖 타락을 담대하게 행하는 점과 흠 – 큰 죄를 범합니다. 거기다 너희와 함께 행한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그런 짓거리를 예사로 행합니다. 쉬지 않고 음행을 행하면서 믿음의 뿌리가 없는 자들을 유혹하여 함께 탐욕으로 빠트리는 저주의 자식이라고 정죄합니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18,19절)

 

거짓교사들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합니다. 자기들처럼 방탕하게 즐기는 것이 오히려 율법의 구속과 육체의 욕심에서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자랑합니다.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 즉,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지만 그런 방탕한 생활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초보 단계의 신자들을 집요하게 음란으로 유혹한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겨우 피한 자들도 다시 그들 꾐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악에 진 사탄의 종으로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의 참 자유

 

그리고 20-22절의 본문이 이어집니다. 그럼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르치겠습니까? 명확한 구분이 없어 약간 모호하지만 그래도 두 가지 가능성뿐입니다. 이 2장 전체가 거짓교사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저희’라는 대명사로 지칭했기에 우선적인 가능성은 거짓교사들입니다. 또 20-22절 본문이 2장 전체를 마무리 짓는 결론이므로 거짓 선생의 꾐에 넘어가 부화뇌동한 믿음의 뿌리가 없는 자들에게도 함께 경고한 셈입니다.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하니까 마치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거룩한 생활을 하다가 다시 타락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단순히 세상의 더러운 삶을 피하려고 예수를 믿어보려 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표현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진리와 대조하여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뜻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궁극적 지식(gnosis)을 알면자유로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진리는 육체가 행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방종하게 쾌락을 추구하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리스드를 알면 자유로워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주님도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고 했습니다. 단 조건을 달았습니다.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31절) 우선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임을 믿고 십자가 대속 구원의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에 거(居해)야 합니다. 그 말은 우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원과 심판으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런 소망을 품고 항상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참 신자는 가장 먼저 지옥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또 성령이 내주하여 죄의 노예 됨에서 풀려나고 성령의 법에 따라 거룩하게 살도록 보호 인도해줍니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되신 주님처럼 마지막 때에 신령한 육신을 덧입고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갖고 있기에 세상의 어떤 비방 멸시 핍박은 물론 죄악의 유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십자가 복음 안에서만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는 초기 이단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하여서 참 복음만이 진리이자 인간을 자유케 할 수 있다고 변증합니다. 그와 동시에 거짓 선생들의 진리와 자유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지적 경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더러움에 다시 얽매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 들어왔으나 곧바로 이전의 방탕했던 음행과 향락에 다시 빠진 자들입니다.

 

거짓 선생들과 그들의 선동과 유혹에 넘어간 믿음이 연약한, 정확히 말해 참 믿음이 생성되지도 않은 구원 밖의 교인들입니다. 베드로의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이라는 표현을 다시 보십시오.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려고 믿음을 가진 자가 어떻게 다시 그 더러움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도 음행 방탕 향락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가르침에 쉽게 넘어갈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본문의 ‘저희’는 다시 강조하지만 거짓 선생과 그들과 함께 방탕에 빠진 자들로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정말로 믿음으로 구원 얻은 신자가 때때로 윤리적 죄에 넘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처음부터 구원과는 상관없는 불신자, 이방인, 이단들을 말합니다. 본문에 이어서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3:2-5)

 

먼저 선지자들의 예언과 주님이 사도들에게 가르친 복음을 기억하라고 권합니다. 말세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주의 재림은 없고 창조 때부터 자연 법칙대로 굴러간다고 속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창조 자체도 ‘부러’ - 의도적으로 잊으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재림이 없으면 음행과 쾌락을 추구한 삶에 대한 심판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 사상을 가진 자에게는 아무리 교회 안에서 종교적인 의식과 언행을 행해도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멸망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가 마지막에 전래 속담을 첨부한 까닭은 그들은 처음부터 개와 돼지였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의 부정한 동물의 대표로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라는 의미로 비유했습니다. 개와 돼지가 양이나 소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원래 놀던 더러운 곳으로 돌아갔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신자의 구원 취소와는 전혀 무관하며 교회에 가만히 침투한 이단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주는 경고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관한 지침입니다.

 

3/1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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