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9:9-17 무폭력의 예수 비폭력의 간디12/12/2017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9:10)
이사야서 다음으로 메시아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통치에 대해 가장 풍부하게 예언한 책이 스가랴서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대적들에 대해 갑절이나 갚되(12절) 피가 동이에 가득 차도록(15절) 참혹하게 심판할 것이라고 한다. 오실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탈만큼(9절) 겸손 온유한데 비해,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 입성할 때에 문자적으로 이뤄졌지만(마21:5),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시적 표현으로 헬라에, 모든 이방인을 상징함, 대한 완벽한 심판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또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새로 돌아오려는 소망을 키우라는(12절) 명령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려는 뜻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분의 양떼가 되고 왕관의 보석처럼 여호와의 땅에 빛나게 될 것이다.(17절) 참으로 아름답고 힘이 넘치는 소망의 약속이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큰 기쁨으로 찬양하며 이런 구원을 소망해야 한다.(9절)
그러나 메시아가 오셔서 행하실 일이 여전히 조금 이상하다. 이스라엘의 병거 말 활을 끊겠다고 한다.(10a) 이스라엘의 대적 “헬라 자식들”(13절)을 심판하려면 헬라의 병거 말 활을 끊어야 하지 않는가? 또 이방사람에게 화평이 아니라(10b) 전쟁을 선포해야 하지 않는가? 무기를 다 없애므로 이스라엘이 더 이상 전쟁치를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뜻인 줄은 알겠다.
이처럼 언뜻 비논리적으로 여기게 말씀하신 까닭을 본문은 크게 둘을 든다. 먼저 메시아의 통치는 땅 끝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헬라 자식들도 당신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당신의 양떼가 될 백성이라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은 이미 언약의 피로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임을 받았기(11절) 때문이라고 한다. 시내 산에서 제사장 나라로 세움 받는 언약을 피 뿌림의 속죄제를 통해 하나님과 이미 체결했다.(출24:1-8) 이스라엘이 이미 구원 받았으면 메시아 구원의 다음 대상은 이방 사람이므로 그들에게 반드시 화평을 선포해야 한다.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탈 것이라는 예언이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겸손히 오시는 모습만을 뜻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상기 구절에 따르면 그분에게 구원 받을 백성은 절대로 무기를 가져선 즉, 다른 민족과 화평만 선언하지 전쟁을 해선 안 된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과 구원의 유일한 방식이 그러하기에 그분의 제자들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알기 쉽게 말해 그분은 간디의 비(非)폭력과 달리 무(無)폭력이다. 간디는 폭력으로는 도무지 영국에 승산이 없으니 대안으로 무저항주의를 채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민족에게 큰 복이 되는 독립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다른 효과적인 수단이 있었다면 그것을 채택할 수 있었지만 무저항을 최선의 방책으로 택했다는 뜻에서 비폭력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폭력이 전혀 없다는 뜻에서 무폭력이다. 강압적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당신의 말씀만으로 이 땅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무엇보다 예수님 당신에게 돌아올 유익은 하나도 없다. 당신이 죽음으로써 죄인을 살려내려는 사랑뿐이다. 세상 모든 나라의 무력을 다 동원해도 이길 수 없는 분이 그 힘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는 하늘에 놓아두셨다. 마지막 날 밤에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칼을 거두라고 말씀하신 까닭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무폭력의 상징인 양 떼다. 참 제자의 길은 비폭력과 무폭력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