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흘린 만큼 전해지는 은혜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행16:25-32)
하나님이 세운 조연배우
사단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한 영혼을 하나님이 자유케 하는 과정은 정말 놀랍고도 신비롭습니다. 모든 여건, 사건, 사람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가운데 당신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실패로 보이는 일조차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결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케 하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회심한 사건에도 본인과 사도들 외에 반드시 주목해야 할 하나님이 마련한 조연배우와 그들이 연출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들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입니다.
“밤중쯤”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사실 한 밤중(midnight)을 의미합니다. 그 날 낮에 사도들은 귀신 들린 점치는 여종을 치유해주었습니다. 종의 주인이 돈 벌이 할 소망이 끊기자 사람들을 선동해 송사하는 바람에 사도들은 관원들에게 매를 맞았습니다.
바울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므로(고후11:24) 아마 이 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멜 깁슨이 만든 영화 "Passion of Christ"에서 예수님이 매를 맞은 것처럼 쇠 방울이 달린 물에 적신 채찍으로 등에 매를 맞고 차꼬에 채워져 지하 감옥에 내던져졌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 밤중까지 실신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실라는 정신이 들자마자 찬양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컴컴한 지하 감옥에서 옷은 걸레처럼 헤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말입니다. 과연 우리라면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들은 원체 믿음이 좋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칩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죄수들이 아무 불평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감옥이 어떤 곳입니까? 상하위계질서가 가장 센 곳 아닙니까? 오늘 처음으로 감방에 들어온 최고 신참 죄수가 다들 곤하게 자고 있는데 소란을 떤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렸는데도 죄수들은 한 명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별이 여럿 달린 흉악범들이 단지 종교사상범에 불과한 바울 앞에 꼼짝 못하고 조용히 있는 그 모습을 간수가 보고는 더 놀라고 두려워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신자 앞에 주눅 드는 불신자
여러분 간수를 비롯해 그 흉악한 죄수들이 사도들 앞에 순한 양처럼 공손해진 이유가 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곱 등을 제자로 삼을 때에 단지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 말만 했는데도 그물과 배를 내던지고 즉시로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를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흠모할만한 모습이라고는 하나 없는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유대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선뜻 따라나선 까닭은 예수님에게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대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거룩하고 신령한 권능이 제자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수들이 바울이 부르는 찬양의 가사나 기도의 내용에 감격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에게 충만히 임재한 성령의 권능이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죄수들이 처음 깨어났을 때에는 틀림없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것입니다. “이 오밤중에 오두방정을 떠는 놈이 대체 누구야?” 당장 잡아먹을 듯이 눈을 부라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들을 쳐다보니까 속으로는 화가 부글부글 끓는데도 이상하게 그 화를 터트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당장 야단치거나 두들겨 패서 그만두게 해야 할 텐데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으리만큼 생각대로 안 되었습니다.
인간은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죄수들이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는 지정의를 넘어선 영혼이라는 차원이 있다는 증거이지 않습니까? 불신자가 아무리 모르고 부인하고 싶어도 그들 영혼이 사단에게 붙잡혀 있는 반면에 신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가 진짜 성령이 충만한 신자 앞에 오면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듭니다. 신자가 전한 복음의 진리를 안 듣는 척하고 심지어 반발을 해도 그 영은 듣고 있습니다. 신자의 교양, 지성, 도덕성이 그들보다 우월해서가 아닙니다. 신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 속에 있는 사단의 영을 눌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힘겨루기 해서 이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은총이 전해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
성령이 충만하면 신자 자신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방언으로 기도 하고 신유의 능력이 나타납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으로 드러난 성령 충만의 결과로 성령이 당신의 뜻에 따라 교회의 덕을 세우려 각자에게 나눠준 은사입니다. 그런 은사를 소망하고 받아서 적절하게 사용하고 또 개발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으로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모습은 신자의 영혼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너무나 온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선한 은총과 권능에 대비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무나도 추하고 더러운 벌레보다 못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추하고 더러운 자신을 스스로는 도저히 씻을 길이 없음을 절감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가서 눈물로 엎드리게 됩니다. 그분의 보혈의 공로 없이는 아무런 구원의 소망이 없음을 절감합니다. 나아가 그분 없이는 자기 인생의 의미와 가치라고는 단 한 치도 발견할 수 없기에 오직 그분의 십자가 긍휼만 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겸비하게 낮아진 영혼을 예수님은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당신만의 사랑과 은총과 권능으로 그 영혼에 충만하게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신자는 그 은혜가 너무나 귀하고 귀해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절로 입술에서 새어나오게 됩니다.
그렇다고 성령 충만을 너무 심오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그저 예수님 이야기만 하고 싶어지며 혼자 있을 때에는 예수님을 묵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기쁨인지, 감사인지, 겸비함인지, 경외함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되는, 아니면 그 전부인 그런 눈물이 영혼에서부터 흘러나옵니다. 성경을 읽으면 말씀이 정말 살아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정말 꿀 송이 같이 달지만 때로는 영혼을 비수로 찌르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신자에게 주는 신령한 은사의 근본을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고전12;1-3)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오직 그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게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입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행1:8) 아주 담대해진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담대해지는 것입니까? 죄악과 사단과 사망에 대해 더 이상 그 유혹이나 염려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증거하는 데에 담대해집니다.
그렇다고 당장 땅 끝까지 선교사로 나서야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들을 보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저절로 눈물이 앞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도움이나 섬김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부터 알게 해주고 싶은 애끓는 심정이 솟구칩니다. 혹시 성격이 내성적이라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를 두고 간절히 기도는 하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바울과 실라가 찬양하고 기도하자 죄수들이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바로 그런 심정으로 죄수의 영혼을 붙들고 기도하고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불신자를 주눅 들게 하는 것이 최면이나 마취를 걸듯이 꼼짝 못하게 옭아맨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향한 충만한 사랑으로 사로잡는다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 사도들이 생판 처음 보는 죄수들을 향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멸시하고 인간 취급도 해주지 않으며 심지어 지옥에 가도 싸다는 취급만 받던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알게 해주려는 사도들의 애끓는 심정이 영과 영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아무리 천하의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킨 이유는?
그럼 여러분에게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큰 지진을 일으켜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는 기적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도를 감옥에서 구원해 내려는 것입니까? 상식적으로 따지면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건의 진행은 전혀 반대로 되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절대 탈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탈옥하면 추가로 죄목만 늘게 됩니다.
만약 사도가 진심으로 죄수들의 영혼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즉 성령이 충만하지 않았다면 죄수들은 다 도망갔을 것입니다. 간수가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간수들이 도망간 줄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연유가 되었든 그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는 죄수들이 도망쳤다는 뜻입니다.
또 죄수들이 도망갔다면 간수는 당연히 잡으러 쫓아갔거나 바울이 아무리 말려도 자결했을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고픈 생각이나 여유는 전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의 회심은 일어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간수는 나중에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 주축이 되었는데 죄수와 사도들이 도망갔으면 그곳에 복음이 증거될 기반이 오랫동안 마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사도들이 하나님께 감옥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도 않은 지진이 일어났고 또 사태가 의외로 진전되었을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이 당시에는 빌립보 지역에 교회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까지는 당연히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사도들이 성령 충만하여 죄수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사단에 묶여 있던 간수 한 사람의 영혼을 자유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너무나도 완벽한 연출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조연배우로 죄수들이 동원되었고 무대 배경 장치는 지하 감옥의 갑작스런 지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출의 클라이맥스는 무엇보다도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렸는데도 도망가지 않은 사도들과 죄수들, 특별히 사도들의 성령 충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간수를 구원하고 빌립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들을 감옥에 쳐 넣은 것입니다.
지금 간수의 회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터널을 통과했는지 모릅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건과 온갖 형편의 상황과 이 모양 저 모양의 사람들을 완벽하게 동원해 우리를 예수 믿는 자리에 다다르도록 그분께서 연출했습니다.
여러분이 “내 팔자가 왜 이리 기구한가? 하는 일마다 왜 이리 꼬이고 안 풀리는가?”라고 한탄하고 눈물지을 때마다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연출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영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여러분보다 더 깊은 한숨을 쉬시고 더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여러분의 미혹된 영혼이 너무나 애처로워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죽이기까지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하여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Why me?" "왜 이 쓸 데 없는 자를 구원해 주시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고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초대할 것인가?
그럼 다시 여러분에게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내주에 있을 한 영혼 품기 전도 축제에 불신자를 어떻게 초대하시겠습니까? 기도하고 찬양 했더니 옥문을 열어주고 차꼬를 풀어주는 능력의 하나님, 즉 예수 믿으면 병이 낫고 사업을 흥하게 해주는 하나님을 만나러 오라고 하실 것입니까? 제발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단순히 탈옥시킬 목적이라면 구태여 처음부터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자에게 일부러 병 주고 약 주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신자가 심심풀이 땅콩 같은 장난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 어디서든 바울처럼 피투성이로 만들고 차고를 채워 지하 감옥에 처넣을 수 있습니다. 불쌍한 한 사람의 간수를 살려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아가 전도된 바로 그 사람을 통해 장래에 교회를 세우는 등 엄청난 당신의 일을 하게끔 만드는 원대한 계획도 있을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당시에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한 영혼을 살려내는 일을 이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간수가 바울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게 된 단계까지는, 즉 본문의 30절까지는, 여러분 각자가 맡으셔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여 불쌍한 이웃의 영혼을 끌어안고 기도하고 섬기셔야 합니다. 목사님은 그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풀어 설명하고 세례를 주는 일을, 즉 본문의 32절의 일을 맡을 뿐입니다.
전도 축제는 결코 우리 교회의 교인 숫자를 늘리는 행사가 아닙니다. 사단에 미혹된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주 예수를 믿어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령 충만한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또 그러려면 초대한 여러분부터 성령 충만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능력이나 은사를 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초대한 불신자를 향해 애끓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은혜는 정말로 놀랍고 신비합니다. 몇 년을 기도하고 전도해도 꿈쩍도 않던 완악한 자라도 한 순간에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제대로만 전해진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온전하고도 절대적인 사랑 앞에 고꾸라지지 않을 만큼 악한 영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많이 전해지느냐는 오직 여러분이 그 사람을 향해 흘린 눈물의 양에 비례합니다. 이곳 LA의 산타모니카 해변의 이름이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아십니까? 천하의 탕자 어거스틴을 회심시키려고 평생을 두고 기도하며 흘린 엄마 모니카의 눈물의 양이 그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의 흰 거품만큼 많았다는 뜻입니다. 눈물로 제단에 씨앗을 뿌릴 때에 틀림없이 기쁨으로 한 불쌍한 영혼의 복된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11/6/2007
지난 11/3 아름다운 교회 새벽 기도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