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의자를 전세 내어라.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마22:8-10)
D. L. 무디가 살던 시절에는 교인들이 매주 교회의 긴 의자를 전세 내는 것이 일반 관례였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돈으로 좌석을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매주 어떤 가족이 앉는 좌석을 지정해두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무디는 항상 장의자 네 개를 세를 내어 놓고 매주 길거리에서 만나는 거지, 환자, 소외 받은 사람들을 데려다 그 자리를 채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초대하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길거리에 나가 만나는 대로 다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요즈음 미국 교회는 안락하고 화려해져 푹신한 개인별 의자로 바뀌었습니다만 당시는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나무의자였습니다. 아마 열 명쯤 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정석 제도라 빈자리가 생기면 안 되니까 무디가 주일마다 데려온 사람은 근 40명이나 되었을 것입니다. 어지간한 개척 교회 규모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교회더러 꼭 Homeless 구제 사역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사람을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라고 했고 종들도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 데려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드러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어떤 차별이라도 있으면 벌써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사람이 평생에서 가장 시급하도고 진지하게 들어야 할 소식이 바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생명과 죽음이지 현실적 풍요와 궁핍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인데 어찌 시기와 장소와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비유에서 처음에 청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혼인 잔치에 합당치 않았다고 합니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인”(5,6절) 자들이었습니다.
우선 청함을 받은 자들이 그 초대를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천국 복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이 땅의 현실에만 관심이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밭이나 상업에 목매달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자기 일에 충실했다면 틀림없이 상당한 위치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또 종들을 잡아 능욕했습니다. 종교적인 일을 현실에 연관시키지 말라고 했거나, 타종교를 미워했거나, 자기들을 죄인이라 지적하니까 도리어 핍박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좀 이상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왜 처음 초대는 전부 실패하고 두 번째 초대는 전부 성공했습니까? 첫 초대를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2,3절)
우선에 만나는 사람을 전부 청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만 청했습니다. 자기 아들 혼인 잔치의 수준과 격식에 맞는 성공한 사람들만 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이미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갖춘 자들이라 복음이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색이 왕이 초대하는데 아무리 별로 내키지 않아도 체면상 가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기를 (아예) 싫어했다고 합니다. 평소에 그 왕과 왕자를 전혀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했다는 뜻입니다.
이쯤이면 뭔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까? 오늘 날의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사회에서 행세깨나 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대접을 받습니다. 또 아예 의도적으로 그런 자들을 집중적으로 찾아가 전도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직분을 준다는 조건으로 흥정까지 합니다. 처음부터 교회가 그들 손에 놀아나도 좋다고 각오를 했습니다. 교회 의자를 진짜 돈을 받고 팔아넘긴 셈입니다.
또 전도를 하면 첫 마디로 되돌아오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예수쟁이들이 더 심하더라.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심지어 전도하고 오면 뒤에서 소금을 뿌리고 심하면 욕도 하지 않습니까? 신자들이 미워서라도 예수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 중에 하나로 교회가 돈 많은 사람에게 너무 굽실거린다는 것도 틀림없이 포함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초대는 만나는 대로 청한 것만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함을 사거리 길에서 했습니다. 물론 가장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곳이라 가능한 더 많은 사람을 초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초대는 가진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효과도 분명 나타났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돈을 밝히지 않고 권세 있는 자를 우대하지 않으며 누구나 동일하게 대우한다는 것 하나만이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인식시키면 사정은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사실은 진정한 복음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영혼은 생수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영생을 주는 생수가 있는 곳과 어떻게 해야 마실 수 있는지 몰라서 찾아가지 못하지 나름대로는 열심히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수와 가장 근접해 보이는 교회가 전하는 천국마저 돈 많은 자 우대하는 천국으로 보이니 전혀 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신자가 전해야할 천국 복음이 그렇게 고상하고 심오한 것이 아닙니다. 무디는 신학교도 심지어 고등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전도에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길거리에서 말쑥하게 빼입은 신사숙녀에게만 다가간 것이 아니라 거지, 병자, 알콜 중독자, 갱 등 겉모습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복음만 전한다는 사실이 그들 눈에도 확실히 보였던 것뿐입니다.
겉모습과 상관없었다는 것은 무디가 전하는 복음은 진짜로 영혼에 관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의 형통과는 상관없는 곳이라 죄 많고 불쌍한 영혼이 그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입니다. 요컨대 무디가 자기들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그 열정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신자더러 무조건 노방전도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도 천국 복음은 전해져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전하는 복음이 시간과 공간과 대상에 구애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꼭 교리적인 원리를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셔서 이 땅의 모든 죄인들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만은 어떤 형태로든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부터 죄인을 아무 차별 없이 섬기는 모습보다 더 효과적인 길이 없기에 사거리 길에서 만나는 대로 청하라고 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죄인들이 구세주에게 오기를 원한다면 우리부터 죄인들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교회가 세상의 죄인들로 그 의자가 채워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아무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그들에게 가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반드시 끼리끼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교회에 나올 만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찾아 갈 것이며, 예수를 믿어 그 더럽던 죄가 사해진 은혜가 너무 귀하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더러운 죄에 빠져 있는 불쌍한 사람을 찾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이 땅에 오시면 교회의 빈 좌석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거리 길에 나가서 만나는 대로 청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그런 예수님을 대신해서 청하러 나가야 합니다. 지금은 교회 안에 예수님이 실종되고 세상에서의 성공처세술만 가르치는 담임 목사만 남아 있으니 신자들도 똑 같이 거기에 합당한 자들만 초대하려 듭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l자가는 그 합당하지 않은 자들 모두를 천국으로 초대했기에 복음이 됩니다. 그래서 더더욱 세상사람 모두가 그 복음을 들어야만 합니다. 합당한 자만 초대해 교회의 의자를 채우려는 교회는 틀림없이 하나님에게 합당치 않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대신에 도저히 합당치 않은 자들 모두를 초대하는 신자는 하나님에게 합당한 종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디처럼 매주 전세 내고 싶은 교회 의자가 몇이나 됩니까? 당신이 앉을 자리 하나만으로 족합니까? 혹시라도 바로 곁에 같이 앉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머리 속에 누구인지 떠올려 보십시오. 특정한 몇몇 사람들이 떠오릅니까? 그럼 잘못된 것입니다. 전도 대상자를 두고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부터 전도대상으로 삼아 더 기도하고 섬겨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만나는 대로 천국 복음을 어떤 형태로든 전해야 합니다. 천국에 합당한지 안한지는 천국의 주인 되시는 분이 판단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 초대장을 전하는 종일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먼저 그 자격 여부를 판단하려 든다면 사실은 우리부터 천국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일 뿐입니다.
0/2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