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부흥의 유일한 길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우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1-24)
불신자들을 향해 복음을 열심히 전해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반발만 살 때가 많습니다. 또 궂은일을 도와주고 어려운 형편을 위해 기도해주어도 잠시 고마워할 뿐 복음에 대해선 여전히 마음을 닫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구원 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다면 어차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텐데 내가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의심이 듭니다.
말하자면 정말 ‘전도의 미련한 것’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도가 미련하다는 것은 전도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즉 예정이 되어 있어 전도의 효력이 높지 않다든지, 특별한 테크닉 없이 무조건 교리를 선포하고 밀어붙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도를 통해 전해지는 내용이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 부족 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내용이 있어서 아무리 전해도 미련스럽게 못 알아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율법대로 선하게 살려는 자들입니다. 헬라인은 무신론자이거나 스스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대표합니다. 비록 유대인과 헬라인 두 민족을 들었지만 사실은 전체 인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적을 보이면 믿겠다는 자와 스스로 깨우쳐 지혜를 얻으면 믿겠다는 자로 나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 두 가지 요구 어디에도 부응하지 못하니까 전함을 받는 자의 입장에선 복음이 좋은 소식은커녕 도리어 미련해 보이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신자가 전한 내용이 불신자들에게 전혀 미련하지 않게 여겨지고 쉽게 수긍하고 좋아하면 잘못된 것으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과 헬라인이 구하는 지혜를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이 구한 표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가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이적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기들을 구해주었듯이 예수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주는 해방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습니다.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했듯이 손쉽게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당장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고 자식이 공부 잘하는 등 현실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예수를 믿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이 그런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즉 “무거운 짐을 진자는 예수께로 나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세상에서 형통합니다.”라고 전하면 사람들에게 미련해 보이기는커녕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또 헬라인은 어떤 지혜를 구했습니까? “모든 아덴 사람과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17:21) 가장 최근에 유행하는 철학과 사상에만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든지 스스로 깨우쳐서 의롭고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기에 만약 그런 일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가르침이라도 받아들였습니다.
헬라인들이라고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온성에 우상이 가득” 했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있었기에 바울이 그들을 두고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평했습니다. 즉 조금이라도 그럴싸해 보이는 사상, 도덕, 종교는 그 종류를 불문하고 자기들이 수양하고 정진하는데 이용하려고 채택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기독교도 자신이 의로워지며 정신세계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많은 종교 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복음을 산상수훈대로 살면 경건하게 되며 기독교의 박애주의 가치관을 실현하면 가장 고급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전하면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든지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이 두 가지 요구를 맞춰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이 표적 아니면 지혜 둘 중 하나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 수는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너무 힘들기에 먹고 마시는 문제만 해결되면 한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인은 먹고 마시는 문제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소원입니다. 둘 다 인간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더 가치 있고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그런 요구를 완전히 부인합니다.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뒤집습니다. 모든 인간이 과거나 현재에 전혀 선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선해질 가능성도 아예 제로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요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아니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 아예 죽은 지 나흘이니 지나 냄새나는 시체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가장 경건했던 유대인과 가장 지혜로웠던 헬라인을 구분할 것 없이 말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듣고도 아무리 지성적으로 심오하고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자들이 더 크게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에게 가장 먼저 배척을 당했습니까? 율법사와 공회원들과 제사장들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일반 서민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로마를 물리쳐 주리라는 기대가 무너지자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했던 군중들이 돌변하여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 쳤지 않습니까?
인간은 지성인이든 학문이 없든 자유자든 노예든 부자든 거지든 구분 없이 스스로 잘난 맛에 사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최고가 되든지 최소한 마음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자신들이 선하고 얼마든지 더 경건해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더러 회칠한 무덤인지라 속에서 썩는 냄새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반발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면, 본문대로 하자면 전도의 미련한 것이 행해지면 사람들이 내보이는 반응도 오직 두 가지 뿐입니다. 크게 반발하며 난리를 치든지 아니면 정말로 가슴에 찔려 자기라는 존재와 인생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뒤집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든지 말입니다. 단순히 어떤 새로운 종교의 사상과 교리를 배워 그대로 자기를 고쳐보겠다든지 아니면 절대자에게 빌어서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보겠다는 반응을 보이면, 예수님의 참 생명을 또 다른 하나의 종교 체계 내지 교리로 바꿔서 전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작금 주로 행해지는 전도 방식은 어떠합니까? 아니 강대상에서 전해지는 메시지의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불신자의 요구에 맞추어 주는 방식이자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내용, 즉 환난을 이겨내는 위로나 도덕적 가르침뿐입니다. 이 세대에 만연하는 죄를 지적하려 들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끌어내려지고 산상에서 지혜를 설교하거나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는 예수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고 전도해서 일단은 사람을 끌어 모은 후에 나중에 차츰 가르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거짓 복음을 소개한 것으로 엄격히 말해 사기입니다. 표적과 지혜를 준다고 해서 교회에 나왔더니 피 묻은 십자가를 꺼내 놓으면 화들짝 놀라서 도망갈 것 아닙니까? 처음에 잘못 전한 것을 번복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형통만 주는 도우미나 경건한 도덕선생으로 둔갑해버렸습니다. 교회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유대인과 헬라인들로 가득 찹니다.
전도가 미련해지지 않고는 기독교가 다시 부흥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 사람들은 마귀의 노예가 되어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마15:19)라고 당당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 전도든 강대상에서 선포되든 기독교 진리는 반드시 불신자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사야합니다. 교회와 신자를 죽이기까지 핍박하려고 덤빌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당당하게 선언하라고 해서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든지 혹은 그렇지 않은 양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신자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자백을 항상 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은 자기 같은 그런 천하의 죄인에게도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당신의 보혈로 용서해 주셨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도저히 스스로는 자기 죄를 사죄, 변상할 방법이 이 세상에 없었고 심지어 잊어버릴 수도 없었다는 것과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인생을 살 소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진리를 당당하게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전도의 미련한 것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무조건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외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말고는 자기에게 아니 전 인류에게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리임을 본인부터 확신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썩은 시체이자 사단의 노예라고 선포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요컨대 전함을 받은 자가 심각한 찔림을 얻거나 크게 반발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여야지, 수긍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잘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6/26/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