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후4:1-3)
전도를 하다 보면 아무리 복음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해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황당한 궤변으로 핏대를 세우며 거꾸로 대드는 자들도 만납니다. 사실은 지금 믿고 나니까 황당하다고 깨닫게 되었지만 믿기 전에는 우리도 똑 같은 생각과 말을 했던 바로 그런 핑계와 궤변으로 말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말로 자기 잘 되라고 전도하는데 우리 성의도 몰라주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덤빈다고 여깁니다. 어차피 사단에게 미혹되어 있는 영혼인지라 아무리 전해도 못 알아먹는구나 하고 더 이상 전도할 생각을 못합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만일 내 전도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전하는 자의 열심과 성의가 모자란 탓이 아니라 순전히 듣는 자의 영적 무지 아니면 사단의 탓이다.”라는 것입니다. 과연 바울도 우리와 같은 의미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이라고 말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행했던 일의 종류와 그 열거한 순서에 주목해 보십시오. 낙심하지 아니 했다는 것이 맨 먼저 나오지만 의미의 흐름상 맨 뒤에 적용되어져 하는데 그 이유는 차츰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다고 합니다. 남들이 모르는 숨어서 저질렀던 잘못은 완전히 버리고 더 이상 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법적으로 이미 과거에 끝난 일을 뜻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궤휼, 교활한 속임수라는 뜻, 가운데도 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치사하고 비겁한 일 뿐만 아니라 남을 비방 음해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지 않게 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전했다”고 하지 않고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당시 바울의 대적자들은 복음 외에 율법도 함께 지켜야 한다든지, 반대로 율법을 폐기하여 죄를 방관한다든지, 심지어 복음이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니까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고 악선전 내지 음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외에는 어떤 인간의 공로도 첨가하지 않고 순수한 복음만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은 절대로 부끄러운 일과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알수록 더 거룩해질 수 있고 또 은혜로만 구원 얻음이 도리어 인간이 경건해질 수 있는 유일한 진리임을 자기 삶을 통해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요컨대 전해진 복음을 자기 몸으로 증험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자신뿐 아니라 복음을) 천거한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거나, 고린도 교인의 믿음을 고무하기 위해 과장한 표현도 아닙니다. 오직 복음의 진리 됨을 확신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숨은 부끄러운 일이란 남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심지어 자신도 지나치기 쉬운 허물과 잘못입니다. 그것마저 버렸으니 남들이 바울에게선 최소한 도덕적 하자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남들이 자기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비방, 음해해도 자기는 언제 어떤 경우가 되었던 반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피전도자의 양심에 비추어 봐도 자기는 전해진 복음과 상치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시기한 자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비방, 음해, 핍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베푸신 긍휼을 생각하며 낙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도의 열매가 맺히든 않든, 사람들이 반발하고 대적자들이 어떤 위해를 가해 오든, 심지어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령의 열매가 미처 맺지 못해도, 오직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에만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단 몸으로 먼저 진리를 실천하여 나타낸 후에 진리를 전하는 방식으로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복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 우리 복음이 가리워진다면 그 이유는 사단의 미혹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단순히 기독교의 구원 교리를 몇 마디 문장으로 가르친 후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고 사단의 자식이니까 별 수 없어 식으로 체념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에게서 불신자를 얕보거나, 무시하거나, 외면 혹은 체념하겠다는 뜻은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진리가 순전하게 선포되고 또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그 진리 됨을 몸으로, 실제로 기꺼이 사자 밥이 되는 순전함으로, 증험했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너무나 안타깝다는 뜻입니다.
또 사실은 자기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그랬기에 주님의 은혜가 언젠가는 내려지기를 바라고 실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로선 자신이 받은 주님의 긍휼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크게 낙심할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러 다녔던 당신의 철천지원수마저 거듭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가장 위대한 종으로까지 삼아 주신 그런 긍휼이지 않습니까?
나아가 불신자들이 복음 앞에 완악하고도 끈질기게 대항하는 만큼 그들을 묶고 있는 흑암의 세력 또한 의외로 강력하며 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럴지라도 이 또한 주님의 십자가 권능에 비추어보면, 자기 같은 자도 완전히 무릎 꿇게 만드셨기에, 낙심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낙심이란 반드시 어떤 결과가 스스로 정한 기대치에 못 미칠 때에 발생합니다. 이만큼 열심히 전도했으면 알아먹고 교회에 한 번은 나와 주어야 하지 않느냐가 우리의 기대치입니다. 반면에 낙심하지 말아야 할 바울의 궁극적 이유는 본문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 “가려진 수건을 벗고 주의 영광을 볼 때”(3:18)가 반드시 있을 것이며, 또 정말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3:17) 함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을 오직 천국에 두었고 구원은 하나님의 몫이니까 전하는 자로선 진리대로 살고만 있으면 된다는 자유함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비록 사단에게 끝까지 붙잡힌 자는 망할 수밖에 없겠지만, 당신이 은혜 주기로 택한 자의 경우는 성령의 놀라운 권능이 임하면 사단의 견고한 진에 작은 틈새가 생기고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탕에서 자유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자신이 전파하는 것 즉, “복음”에는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된다고 했습니다.(5절)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입니다. 전자야 당연하지만 후자는 혹시라도 조금, 아니 너무 생소한 것 같지 않습니까?
불신자의 종이라고 해서 현실적으로 성심성의껏 도와주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반사해서 그들에게 비추는 주의 종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또 불신자들의 영혼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미혹된 영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 그들을 위해 흑암의 세력과 끝까지 낙심하지 말며 담대히 맞서 싸우는 종입니다.
바꿔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열심 있는 종이 되었음에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으면 아직도 우리는 바울처럼 불신자의 종까지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반부만 전하고 후반부는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의 경우는 심지어 후반부를 먼저 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9/17/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