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소리를 외치고 있는가?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게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3:1-4)
잘 아시는 대로 성경에 기록된 침례 요한의 생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한마디로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경고의 나팔을 불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잠시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지만 자신은 주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함을 잘 알았습니다. 곧바로 주님께서 성령과 불의 침례를 줄 수 있게끔 목자 없는 양떼는 물론 자기 제자들마저 주님께 인계해주었습니다.
본 복음서의 저자 마태는 그런 요한이기에 이사야 선지자가 약 육백 년 전에 이미 예언했던 일이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요한 본인으로선 성령의 이끌림에 따라 행하느라 사역할 당시에 스스로는 의식을 못했겠지만 하나님의 십자가 구속이 완성될 골고다로 가는 첫 문을 연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간과해버리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흔히들 요한이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했다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고 치웁니다. 본문과 자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가 지금껏 이해한 것과는 조금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일을 완수한 선지자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에서 요한 본인에게 적용되는 내용은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까지 뿐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요한이 외쳐야 할 메시지입니다. 요한 본인에게 직접 해당되기보다 그 메시지를 듣는 자들이 행해야 할 바입니다. “너희”부터 복수 표현이지 않습니까? 요한 한 명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의 길을 예비할 자는 요한보다 유대인들, 나아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의로운 왕임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요한의 외침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다윗 같은 왕이 이제 곧 오니까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메시아가 광야에서부터 임하실 것이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후에 비로소 공생애를 시작할 것이라는 뜻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다는 것뿐이지, 왕이 반드시 광야에서 오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왕은 도성에 출현하거나 임해야 합니다. 최소한 왕이 온다는 소식은 도성에서부터 들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아무도 없고 또 왕의 다스림과도 직접 연관이 없는 광야에서 요한더러 외치게 만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외침은 도성을 향해 외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광야를 보고 외쳐봐야 아무도 듣지 못하고 메아리가 되어 흩어질 뿐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자연히 죄도 없는 곳이 됩니다. 요한은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서로 많이 차지하려 아귀다툼하는, 다른 말로 죄가 들끓는 도성을 향해서 구원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세상의 힘이 아닌 하늘의 권세를 지녔으며 다윗의 육신의 후손이 아닌 하늘의 왕이 이제 곧 죄에 파묻혀 사는 너희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한의 이런 외침이 있자 도성에선 어떤 반응이 나타났습니까?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5,6절)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습니다. 죄악의 도성에서 떠나 하늘의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요한의 메시지에 순응했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들은 자들이 주님이 자기에게 오실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한 것입니다. 또 바로 이것이 요한이 준 물 침례의 의미입니다.
이 기사가 오늘날의 독자에게 주는 의미 내지 적용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는 “신자”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할 “너희”는 신자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을 “불신자”들입니다. 신자는 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외치는 메시지도 요한과 똑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주변 사방에서 신자에게로 나아와 자기 죄를 자백하고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신자가 구원을 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최소한 침례 요한 같은 역할을, 그는 단지 물 침례만 주었고 구원을 주실 불과 성령의 침례는 예수님이 하셨음, 성실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요한처럼 심플한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한처럼 누구나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만 먹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또한 단순히 겸비하고 청렴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신자는 죄의 소굴에서 빠져 나와서 죄가 없는 광야에서 살아야 합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평생을 두고 죄악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자기들도 죄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 찔림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신자는 또 도성의 것으로는 자신에게 어떤 기쁨, 만족, 평강, 안식, 자유, 능력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하기에 광야에서 광야의 것으로 먹고 입고 지내야 합니다. 세상에 의지할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으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들로 지금까지 자기 능력으로 경쟁에서 이겨 자신만 안일하게 사려는 도성의 생활 방식은 버리고, 대신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사로잡혀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광야의 삶으로 바꾸고 싶다는 도전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혹시라도 예수님의 이런 꾸중을 듣게 되지는 않을까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는니라.”(눅7:24,25)
불신자가 막상 도성(세상)에서 처음으로 광야(교회)에 나왔더니 도성과 같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부드럽고 화려한 옷 입은 자들만 보이지는 않을까요? 갈대나 화려한 옷이 단순히 문자적 의미가 아님은 눈치 챘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광야 같은 인생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만으로 충족하게 살지 못하고 갈대처럼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알량한 믿음마저 세상 안일과 형통을 추구하는데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대신에 주님은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선지자를 보기 위해 광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 했습니다.(눅7:26) 교회 강단에선 죄악에서 떠나라고 외치는 선지자적 설교가, 또 그 회중들은 광야에서 하나님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로 주님의 길과 그 첩경을 예비토록 독려하는 일은 요한에게만 맡겨진 사명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이 응당 함께 맡아야 할 의무이자 기쁨입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눅7:28) 불신자더러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면서 주님의 불과 성령의 침례를 받고 싶다는 도전을 준다면 요한보다 큰 자라고 즉, 천국에서 요한보다 더한 상급이 기다린다고 주님이 약속했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주님이 풍성히 베풀어주신 비단 옷을 입고도 조금만 힘들면 흔들리는 갈대처럼 안절부절 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도성의 사람들에게 광야로 나가 봐야 아무 볼 것도 없더라는 실망만 안겨 주지는 않는지요?
10/7/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