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은 어떻게 전도해야 합니까?
[질문]
장애인들과는 대화하는 것조차 힘들기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기에 분명 전도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비장애인들보다 더 힘써서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일에 장애아들과 같이 예배하고 성경공부를 시키다 보면 이 아이들이 정말 내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고 대답하는 건지 처음엔 분간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아이들과 마음으로 눈빛으로 서로 통하다보니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장애의 종류가 많은데 그 중에 눈이 안 보이는 친구들과 말을 못하는 친구들은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보통 장애인 친구들은 한 가지 장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복합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나오는 친구들 가운데는 그런 복합장애자는 그리 많지 않는 대신에 주로 발달장애(자폐)를 가진 아이들이 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아이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당신만이 치료해주시고 그 상처를 감싸 안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상처는 그렇다 쳐도 구원은 어찌 해야 할까요? 흔히 입술로 고백을 해야 구원 받는다고 하는데 말도 못하는데 어찌 해야 하나요? 그렇다고 이런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손가락 끝에 힘이 없어서 글자를 쓰기도 힘든데 글자로 고백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정말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만 구원이 꼭 입술로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인지 성경에 입각해서 알려주십시오.
참고로 일반인과 장애인을 부를 때 정상인 비정상인 이런 것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호칭이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비정상인이 아니고 몸이 불편할 따름입니다, 몸이 불편한 것이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지요. 역지사지 하는 마음으로 호칭으로라도 그들의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주면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답변]
하태광님 신자들마저 접촉하기를 선뜻 내키지 아니하는 장애인들을 섬기신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은밀히 보시는 주님께서 모든 필요한 것들을 은밀하고도 신비한 은혜로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장애(다운증후군) 아들을 두고 있는 김유상 집사께서 이미 정답을 다 말씀해주셨네요. 저는 구원에 관한 일반 원리를 설명 드리면서 조금만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구원.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8-10)
로마서 9, 10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가 그 주제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먼저 받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잘 믿지 않고 이방인들부터 많이 믿지만, 그마저도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로운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해 먼저 믿은 이방인의 구원을 보고 유대인더러 시기가 나게끔 해서 구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유대인이 하나님 안에서 선택 받아 특권을 먼저 누린 것이나, 이방인이 십자가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것이나, 둘 다 하나님의 차별이나 편애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이자 신비라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예수를 마음으로 믿는 자만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장의 사실상의 일차 독자는 유대인이고 또 이스라엘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 요지는 은혜 구원의 재확인입니다. 본문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그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문제는 입술로 시인하라는 구절이 덧붙여진 것인데 그 첫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들이 일차 독자인지라 그들에게 익숙한 구약성경 구절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8절은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4)를 인용한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입경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여호와를 온전히 믿는다면 율법도 온전히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율법이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임을 이미 온전히 믿고 있기에 지키라는 뜻입니다. 즉, 출애굽한 자로서(칭의의 구원 받았음을 상징),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하나님 자녀답게 성화를 이룸의 상징) 율법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네 입에 있는 것과 네 마음에 있는 것은 동일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자연히 말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마음에 없는 것이 말로 나오는 것은 앵무새나 로봇입니다. 즉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혹은 이해타산을 따져 위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4-37)
예수님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단지 말을 잘못했다고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에서 나온 악한 말 때문에 심판 받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당연히 그 믿음을 입술로 시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암송해야만 하는 율법
바울이 인용한 신명기 구절도 사실은 복음을 드러냈듯이,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신약성경과 비교하여 십자가의 예표나 상징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신자들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미처 모르는 중요한 해석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기록될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소량으로 필사만 했습니다. 따라서 성경 두루마리를 대중이 갖기는 힘들었고 필연적으로 구전(口傳)이 성경을 접하는 근본수단이었습니다. 또 모든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암송하게, 지금도 유대 가정에선 마차가지임, 했습니다.(신6:1-9)
다른 말로 구약은 암송하기 편한 문체로 기록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시적 운율을 유지하면서, 히브리 알파벳에 따라 운을 맞추며, 무엇보다 같은 내용을 자꾸 반복하는 표현법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 전체를 외웠고, 그중에서도 출애굽 사건과 하나님의 계명 부분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는 사실상 같은 의미를 단지 외우기 좋게 병치(竝置)하는 경우가 아주 잦습니다. 명료하게 다른 의미가 아닌 이상 구태여 따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신명기 구절에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도 같은 뜻의 병행구절입니다. 서로 다른 뜻이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별도의 준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또 그 앞의 "말씀이 네게 가까워"라는 말을 풀어 설명한 것입니다. 말씀이 이미 네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잘 암송하고 있듯이 마음에도 입술에도 다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출애굽 사건에서 보듯이 그들 가운데 임하여서 함께 행하시는,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온전히 믿는다면 율법대로 따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구태여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우선 일차 독자인 유대인들더러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이 수여하신 율법을 온전히 믿었기에 암송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그렇게 믿고 입술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믿음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9, 10장에는 유독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구절이 많은 까닭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예수 오심을 증거 했어도 잘 믿지 못했지만 이제는 정말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6-21절에서 이사야(16,20절), 엘리야(18절), 시편기자(18절), 모세의 예언(19절)을 차례로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예 19절에선 이방인을 먼저 믿게 하여 이스라엘의 시기를 일으킨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이미 모세가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신32:21) 유대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기에 암송했고 그래서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 얻는다고 착각했던 바로 그 신명기의 뜻도 사실은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입술로 시인하라고 하기 전에 어떤 말씀을 했습니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9:30-32) 이스라엘의 실패는 율법을 믿음으로 받지 않고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라는 것은 구원진리를 유대인에게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한 보충 설명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지금껏 율법의 의로 구원에 이르려 열심히 노력했지만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입술로 시인하는 것이 율법을 암송했던 유대인에겐 특별한 의미를 갖지만 비유대인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앞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인시키고 앞으로 신자답게 살겠다는 헌신의 의미는 있어도 구원 자체와는 무관합니다.
하나님이 구원 여부와 아무 관계없는데도 입술로 시인할 수조차 없는 장애인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실 리는 없습니다. 질문자님도 장애인의 눈빛을 보면 성경을 가르친 내용을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눈빛이야말로 비장애인이 입술로 시인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입술로는 거짓을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때로는 자기 의사와 다르게 분위기에 묻혀갈 수 있지만 눈빛은 거짓말을 못하지 않습니까?
장애아의 구원
"분명한 것은 이런 아이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당신만이 치료해주시고 그 상처를 감싸 안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야말로 아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구원은 정말 모든 이가 궁금해 하는 주제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사항은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 불공평, 편애, 편견은 전혀 없고 또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몇 가지 조금 더 구체적인 원리가 도출 됩니다.
-모든 세대와 모든 장소의 모든 인간은(영아나 장애아나 아프리카 오지와 북한의 아이들도 다 포함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입니다.
-인간의 자격, 공로, 의, 심지어 믿음마저도 구원을 결정짓는 요소가 절대 되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그분의 뜻에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 선택한 자는 그분께서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누가 선택되고 누가 유기되는 지에 관해 그분께는 어떤 책임도 하자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둔 인간을 몽땅 죽여도 인간에겐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복잡한 신학적 논쟁은 주제가 아님으로 생략합니다.-롬9:13,14,21)
-신구약시대 공히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세례, 신앙고백, 교회출석 같은 기독교적 관행을 행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진정으로 겸비하게 시인하고 오직 그분의 긍휼만 소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의 #47 "구약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 받았나요?"와 # 146 "북한의 배고파 죽는 아이도 지옥가나요?"의 두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장애아 중에서도 스스로의 지각 능력이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구원을 주실 자로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 방식과 때는 오직 하나님의 신비에 속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신비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 가봐야 그 신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장애아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도 누가 구원 받았다 받지 않았다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 본인만 알 뿐입니다. (때로는 본인도 모를 수 있습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예정에 의한 하나님의 행위라고 해서 즉, 어차피 구원 받을 자는 구원 받을 것이며 인간이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해서, 전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말은 완전 어불성설입니다.
우선 누가 예정이 되어있는지 모르니까 더더욱 전해야 합니다. 자기 아들이 구원으로 택함 받았을 수 있으니까 구태여 전도하지 않겠다는 바보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구원이 단지 죽은 후에 지옥 가지 않는 문제에 불과하다면 그래도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구원만은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은혜와 권능 가운데 천국을 누리는 것이기에 더더욱 빨리 구원 받도록 전도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인간의 전도라는 방법과 하나님이 절대 주권으로 구원 주려 예정한 것과의 사이에는 어떤 상충과 모순도 없습니다. 복음이 전해진 자 중에서 당신께서 예정한 자를 당신께서 당신만의 때와 방법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물어야 할 질문은 장애인이 구원 받느냐 안 받느냐, 혹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지가 아닙니다. 질문자님의 말씀대로 "어떻게 전할 것이냐?"여야만 합니다.
참고로 김유상 집사님이 소개한 김홍덕 목사님도 "장애신학"(2010 도서출판 대장간 발행)이라는 책에서 장애인 구원에 관해 간단히 원리만 언급했는데 그 일부를 아래에 인용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밝히면서도 장애인 특유의 고려할 사항을 잘 언급했기에 아주 좋은 참조가 될 것입니다. (저자 김 목사님도 장애아 딸을 두고 있습니다.)
[지적장애인 구원의 문제도 다른 보통 사람들 구원의 문제와 다를 바 없다는 결론을 말하고자 한다. 구원은 적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서 그 뜻에 반응하는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구원에 대한 반응이 다르다고 해서 구원의 질이 다르거나 구원의 여부를 다르게 말할 수 없다. 비록 이성적인 언어적 표현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계획이 있으며 또 그들이 구원을 인식할만한 특별한 은혜의 증거가 있다고 본다. ...... 사람이 확인하는 구원에 대한 검증이 성령 하나님의 확증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구원 자체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지적장애인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미숙한 주장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꼭 지적 능력을 통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일이다. .....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지적 능력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꼭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지적 활동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영적 활동이다. ...... 장애인의 복음화율은 형편없이 낮다. ... 하나님이 장애를 이유로 장애인의 구원 확률을 낮게 정하시지 않았다고 하면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현저하게 떨어져 있는 장애인의 복음화율을 높이는데 최대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415,16 page에서 발췌 인용함)
어떻게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예수 믿어 구원 얻는다는 의미는 가장 먼저 자기의 의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어 그분의 죽음의 진노 아래 있었던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대신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그 죄 값을 다 치루셨음을 믿고 겸허히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는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삶을 살겠다고 헌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적장애인에게 이런 하나님과 불화한 원죄, 주님의 무조건적 사랑, 주님의 대속 사역, 성령의 거듭남, 십자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 주님께만 헌신 등등의 교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비장애인이라도 처음 예수 믿을 때에 그런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믿은 자도 사실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자기중심으로 살던 삶에서 유턴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것뿐입니다.
장애신학에서 상기에 인용한 대로 표현하자면 장애인의 구원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이전에 하나님의 예정한 자는 당신만의 신비로운 방식으로 구원을 주십니다. 또 당신과만 통하는 방식으로 그 장애인으로 하여금 당신께 반응토록 합니다. 그래서 김홍덕 목사님은 “비장애인들의 구원을 확인하는 방법을 지적 장애인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같은 책417p)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전도하려는 신자나 교회로선, 최선을 다해 그들의 지적 수준에 맞게 복음을 쉽고도 간단하게 전하기는 해야 합니다. 개인별로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관찰하여서 전해지는 복음의 깊이와 폭도 그에 맞추어서 조절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애인 한 명에 복음 전하는 인도자가 한 명씩 전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복음 전파 후에도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수준을 항상 정확히 점검하여 그에 맞추어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자원봉사자, 복음전도자가 수적으로 너무 모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간단히 전한다 해도 꼭 전해야 할 기본적인 내용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점, 절대 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 천국은 눈물과 고통이 없는 곳이라는 점,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점, 또 그들도 주님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는 점, 각자가 원하고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 사랑을 표시해야 한다는 점 등이 그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심장을 갖고서 이렇게 전한 다음에는 오직 성령의 역사만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상인과는 달리 그들의 구원 여부와 또 믿음 안에서 자라는 변화를 확인할 길은 거의 없습니다. 눈빛으로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아주 오랜 기간이 걸리고 또 전담하는 사역자라야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잘 아는 장애부 여자전도사님이 7년을 섬겨도 아무 변화가 없어서 탈진할 정도였는데 그 이후로 아주 조금씩 변화가 있는 것을 순전히 눈치로 알 수 있더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래서 장애인 전도는 복음을 말로 전하고 입술로 시인시키는 것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저들이 느끼도록, 그것도 지성이 모자라니까 영적으로 체감하도록 해주어야만 합니다. 오직 사랑과 인내뿐입니다. 정말 조건 없이,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 아마도 인간이 하는 사랑 중에 가장 아가페 사랑에 가까운 사랑으로 섬겨야만 합니다. 아무 열매가 없어도 평생을 섬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로 그 부모나 가까운 자들이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들만큼 외롭고 소외된 계층이 없기에 더더욱 사랑으로 섬김이 바로 복음 전파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장애인이다.
모든 신자가 정작 알아야만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모두가 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어쩌면 육체적으로만 장애지 그 영혼은 우리보다 훨씬 깨끗하고 순수할 것입니다. 비장애인은 몸만 잘 움직인다 뿐이지 그 영혼은 더럽고 추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장애인 사역을 하면 오히려 섬기는 비장애인들이 주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고 또 은혜도 더 받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이자 경륜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에 시기가 나서 유대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한다고 했듯이, 장애인들의 순수성을 보고 비장애인 신자들을 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로 사고만 쳤던 문제 청소년들에게 장애인을 사흘간만 전담해서 섬기도록 했더니 회개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자기들보다 훨씬 더 불쌍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 영혼은 더 깨끗함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장애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아담이 타락한 원죄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결과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모든 이가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구원이 따로 차별, 혹은 그 반대로 편애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때의 온전한 구속을 기다릴 뿐입니다.
말하자면 아무 하자 없고 믿음이 좋은 부모에게 왜 장애아가 태어나는지, 또 그 구원 여부가 불명해 보이고, 나아가 오히려 비장애인더러 그들을 섬기도록 하는 등, 이 모든 의문은 오직 천국에 가서야 확실해 질 것입니다. 그 때까진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든, 사실은 하나님 눈에는 모두가 똑 같은 장애인이지만, 천국 영광과 마지막 부활의 소망을 안고 인내하며 서로 사랑으로 섬기기만 하면 됩니다. (거꾸로 읽는 성경 사이트의 #3 “종신 운전수와 평생 식모”의 글도 참조 바랍니다.)
요컨대 장애인 전도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다하고, 구원은 하나님의 몫으로 넘겨야 합니다. 대신에 비장애인 신자들은 종말론적 소망을 귀하게 가꾸어서 이 땅의 어떤 죄악과 흑암의 세력과도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고 동시에 어떤 환난 가운데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18-23)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3/24/2011
P. S.
참고 겸 보너스(?)로 미국 뉴욕 신체장애자회관에 적힌 작자미상의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난 부탁했다.”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그러나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이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열등감을 선물 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로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