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에서 자유할 수 있는 한계는?
[질문]
유대인 신자를 얻기 위해서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얻기 위해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없는 자처럼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그처럼 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구원관이 제일 중요하니까 전하는 사람의 겉모습이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요? 이것을 어떻게 적용해야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19 & 22)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바리새인으로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동시에 로마시민권자로서 헬라 관습 및 사고에도 능통했습니다. 당시로선 최고 지식인이자 종교인으로서 세상에서 칭송을 받던 자였습니다. 스스로 육체로는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으면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인생이 뒤집어지면서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또 자기에게 맡기신 이방인 선교 소명의 실현을 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충성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전도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 배경을 활용하여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헬라인에겐 헬라인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는 단지 전도 방식에 관한 설명이지 영적 진리를 언급한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여러 종교 배경의 불신자나 무신론자를 전도할 때에 기독교교리를 교회에서 통용되는 방식, 문화, 용어로 무턱대고 전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대와 상황에 비추어 적절하고도 설득력 있는 전도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입니다.
우상제물과 전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런 원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실제 적용할 때 애매한 경우가 많아서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열정만 앞세워 간절히 기도한 후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4:2) 일방적으로 전해버릴 수도 없습니다. (참고로 때를 얻고 못 얻고는 어떤 상황도 무조건 전도할 기회로 삼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범사에 오래 참음으로"라는 말이 바로 이어지듯이 구원여부는 오직 하나님께 달렸다는 뜻입니다.)
우선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 얻지만 율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즉, 전도자가 도덕적 잘못을 저지르면서까지 전도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또 그와 반대로 율법을 복음과 함께 강조하거나 필수 조건이라고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아무래도 바울 본인이 설명한 예를 살펴보는 것이 정확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상자체가 인간이 만든 것으로 실존하지 않기에 이방 종교 우상에 바쳐진 고기 제물도 사실상 우상에 바쳐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진리를 모르는 자가 있는 자리에선 혹시라도 신자가 우상제물을 먹는 죄를 범한다고 오해해 시험 들게 할 수 있으니 절대 먹지 않겠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헬라인만 있는 모임에선 바울도 거리낌 없이 제물고기를 먹으며 교제하고 전도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유대인이라면 우상제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적 지식 내지 의심이 있는 자가 있다면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은 그런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먹었더라도, 나중에 그 문제를 제기해 오면 오히려 전도 기회로 삼아서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실재조차 않는 우상을 상호 비교하며 잘 설명해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내가 주 예수 안에서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4,17)고 선언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는 어떤 음식이라도 먹을 자유가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율법의 문자적 규정보다는 자신의 영적 실체를 거룩하게 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굽이 갈라진 돼지는 부정하다고 여기고 (지금도) 먹지 않는 유대인들과 교제할 때는 절대로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5:20,21)
바울과 베드로의 차이
그러나 이런 정도의 설명만으로는 실제 상황에 닥치면 여전히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규정을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하고 또 기억하더라도 정확히 해석 적용하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세속적인 것같아 보이는 일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느 선까지 해도 되는지, 최소한 전도에 장애가 안 되는지 스스로 판단하기 무척 힘듭니다.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1-14)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 교제를 하는 중에 유대인들이 왔습니다. 유대 관습은 이방인과 교제를 금하기에 황급히 그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러자 유대인들도 베드로와 똑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위선적으로 행한다고 그를 야단쳤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 교제했고 또 유대인의 관습에도 맞춰주었습니다. 언뜻 바울이 말한 대로 유대인에겐 유대인 행세를, 헬라인에겐 헬라인 행세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을 전도하려면서 그들이 거부감을 갖는 관습을 시행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와 비슷한 경우에 둘 중 더 중요해 보이는, 지금 식으로 말해 교회에 더 유익이 될 것 같은 권세와 재물 많은 사람 위주로 전도해야 합니까? 아니면 양쪽의 비위를 다 맞춰주어야 합니까? 아예 식사 교제는 양쪽 다 하지 않고 교리만 전해야 합니까?
단순히 어느 쪽 관습을 따르느냐 않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그가 저지른 잘못부터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이방인에게도 차별 없는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져야 함을 몰랐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환상을 통해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계시를 맨 처음 받은 자였습니다. 또 주님은 동일한 의미의 계시를 준 고넬료와 대면케 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그 스스로 열게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믿는 바를 행동으로 완전히 옮기기에 주저했습니다. 아직은 믿음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이 몸에 베여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사마리아도 넘어선 변방, 이방과 다름없는 갈릴리 출신인지라 유대인에 대한 태생적 열등감이 있어서 그들에게 잘 보이려 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복음은 교리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그대로 실현되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래서 음식이 복음과 무관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인 것입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2,23)
만약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탁에 계속 머물러서 교제했다면 나중에 온 유대인들로선 우선 당황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율법도, 정확히 말해 장로들이 정한 유전도 모르는 무식한 어부라고 속으로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자기들을 차별하지 않는 통이 큰 사람이고 또 자기들에게 전해준 복음대로 행하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속으로 존경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로선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율법과 대비하여 복음을 더 정확하고도 자세하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어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환상을 보여주었고 고넬료와 대면케 해주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이방 전도의 당위성을 설명할 자로 부름 받았으면서도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에 절하지 않는 신자
어떤 재벌 회사의 신자 간부가 저녁마다 술 먹는 회식 자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그런 자리에 초대도 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그룹 전체 신년하례식에서 불교신자였던 회장이 부처를 모셔놓고 모든 간부가 그 앞에서 회사의 발전을 빌면서 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모든 간부가 자기 종교와는 무관하게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만은 회장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인지라 부처상에 절을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에 회사 발전을 위해서 제가 믿는 하나님에게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회장은 오히려 "당신은 내가 온전히 믿을 만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고 하면서 사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이런 경우 유대인에게 유대인이 되고 헬라인에게 헬라인이 되라고 해서 무조건 회장의 요구대로 따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나는 신자니까 죽어도 절 안 하겠다, 차라리 파면시키라"고 회장에게 대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럼 정말 고리타분하고 배타적인 기독교이고. 광신 맹신에 빠진 신자라고 매도당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서 그렇게 배우고 또 그대로 행하다보니 그런 욕을 실제로 듣고 있지만....)
베드로는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다보니 이방인 즉, "사람"을 차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가장 근본 되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지은 죄는 끝까지 저주하되 죄인은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아닙니까? 요컨대 사람을 절대로 외모대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관습, 규정이라는 것은 단순히 질서나 도덕을 바로 세우는 역할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를 따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게 만듭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유대인과 헬라인이 각기 따로 있기만 하면 아무 걱정 없이 각각에 통용되는 관습대로 전도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반드시 함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불신자와 일대일로 만나도 기독교의 관습과 상충되는 일이 비일비재 생깁니다. 그 때에 우리가 반드시 따르고 지켜야만 할 유일한 원리는 바로 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5,16)
재벌 회사 간부는 진정으로 회사도 사랑하고 회장도 사랑해 다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신자라는 외모 즉, 세상에서 통하는 관습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전해서 반드시 신자로 만들어야겠다고 작심만 한 것이 아닙니다. 회사 사정이야 어떻게 되던, 또 그런 자리에서 회장 체면이야 어떻게 되든 일단 신자니까 죽어도 절 안한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도 물론 회장을 언젠가는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겠지만, 포교할 대상보다 사랑할 대상으로 먼저 본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진정으로 그 죄인을 사랑하되 자신이 믿는 복음대로 말과 행동이 일치했던 것입니다.
전도의 더 중요한 원리
나아가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믿는 바대로 행하기만 하면 전도의 시기와 방법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믿은 것입니다. 바울처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고전2:4) 됨을 확신한 것입니다. 또 성령으로 전도된 자만이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한다는 것은 각 사람이 선호하는 방식, 각 민족의 관습과 문화에 잘 적용해서 전도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정말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그 모든 허물과 죄를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 주고 싶은 열정이 앞서야 합니다. 사탄에 미혹된 불신자를 주님의 자녀로 변화시켜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락을 은혜로 누리게 하고 싶은 진심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설령 전도자가 피전도자의 관습과 문화에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베드로의 경우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먼저 걱정했지, 그때까지 교제했던 이방인은 물론 뒤에 온 유대인들의 심령까지는 진정으로 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의 회사 간부로 인해 그 회장이 당장 개종은 안 했어도 그런 열렬한 불교신자가 기독교와 기독교 신자에 대한 인식은 다시, 올바르게 했을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전도에서 문화나 관습에 차별을 두려하지 않기 보다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복음 안에서 진짜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자기 믿는 바대로 언행일치가 되어야 하며, 믿음의 분량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지 세심하게 유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는 믿음마저 남들에게 의심받는 행위라면 절대 해선 안 됩니다. 이것들에 위배되지 않는 한 전도하면서 그 상황에 적합하다고 스스로 판단되는 대로 무엇이든 진정한 사랑과 함께 행하면 됩니다.
바울이 상황에 따라 유대인, 헬라인처럼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이런 말로 결론을 맺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傳播)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6,27)
본문을 지금껏 설명한 원리로 바꾸자면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면서 무엇보다 성령의 역사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되, 주님의 심정으로 불신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몸가짐은 믿는 바대로 온전하게 갖춘 후에, 상대의 문화와 관습에 맞추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질문하신 주제는 전도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하지 않은 사항에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선 본 성경문답 사이트의 #41 "불신자와 함께 술 먹으면서 전도해도 되는지요? (신자와 술 담배)"의 글도 함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3/1/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