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에 재갈 물릴 수 있는 방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1:19,20)
인간 사회의 말의 원리
성경은 지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한다. 그러나 말이란 너무 안 하거나 늦게 해도 탈이다. 때와 장소와 경우에 맞추어 적절히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세 치 혀만 잘 조절해도 인간관계를 아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말이 단순히 의사소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이해와 감정 교류의 폭을 넓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빨리 해야 할 말이 있고 무조건 천천히 해야 할 말이 있다. 빨리 말하면 할수록 좋은 말은 용서, 이해, 감사, 격려, 칭찬, 위로, 등등 사랑으로 섬기는 말이다. 신자에겐 어려운 자를 위해 하나님 말씀으로 권면하고 기도해 주는 것도 포함된다.
반대로 늦으면 늦을수록 좋은 말은 자랑, 핑계, 변명, 의심, 판단, 시기, 질투, 비난, 정죄, 불평, 불만, 책임전가, 분노, 저주 등의 말이다. 또 자신의 편견, 선입관, 고집, 독선, 가정, 공상, 억지추측 등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신자로선 특별히 자기 눈의 들보는 뒷전이면서 남의 눈의 티끌을 밝히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에서 말을 더디 하라는 뜻은 듣는 것에 비교해 더디 하라는 것이다. 22절에서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만 앞세우지 말고 그 진의를 잘 헤아려서 꼭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것과 성내는 것을 같은 성격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빨리 해야 할 말은 늦게 하고 늦게 해야 할 말은 빨리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말을 함과 동시에 성을 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상대에 대한 칭찬에는 아주 인색하고 분노에는 너무나 빠르다는 것이다.
너무 자주 쉽게 빠지는 잘못을 방지하려면 처음부터 그럴 수 있는 기회부터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듯이 말을 하면 할수록 실수가 더 많아진다면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가만히 있으면 이등이라도 하는 셈이다. 웅변은 은이지만 침묵은 금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누구라도 말을 하면 할수록 실수가 잦다는 것은 그 마음이 여전히 죄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예수님이 자신을 사단에게 빗댄 바리새인들을 향해 야단친 말씀이지만 그 원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신자의 본성도 여전히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아가 인생을 살아가며 마음에 쌓아둔 많은 상처와 쓴 뿌리들도 많다. 한 사람의 예외 없이 그렇다. 그런 사람들끼리 말이 앞서다 보면 자연히 성을 내게 된다. 또 죄와 상처가 씻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성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 말씀에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말하기 전에 먼저 마음속에 쌓인 죄와 악부터 제거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에 심긴 (십자가의) 도를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의지적 노력만으로는 좋은 말보다 나쁜 말부터 먼저 하는 뿌리 깊은 습성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정말 겸손하게 구하면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야 한다.
무조건 빨리 말을 많이 해야 할 경우
우리 모두 체험으로 실감하듯이 말은 가능한 적게, 심지어 안 하는 것이 분명 도움이 된다. 또 이왕에 말을 하려면 좋은 말만 골라서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원칙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니 정반대로 무조건 많이 빨리 말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가능한 자기를 많이 알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경우다. 주님과 정말 일대일로 대면했을 때다. 앞으로 닥칠 위급한 문제를 해결해주고 지금 아주 힘들어 하는 고난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구는 누구나 쉽게 아뢸 수 있다. 그 외에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아주 세세하게 아뢰어야 한다. 억울하게 당한 것, 감정이 상한 것, 상처 받은 것, 나아가 남에게 원망과 분노가 생기는 것, 심지어 하나님 당신을 향한 의심 불만 불신 분노까지 하나 남김없이 다 털어 놓아야 한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까뒤집어서 더 이상 남아 있을 것 없이 토설해야 한다. 살다 보면 새로 자꾸 쌓이는 것들도 생기자마자 주님께 아뢰어야 한다. 무슨 이런 시시한 일까지 하나님에게 아뢰어야 하는가,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 아뢸 필요가 있는가 걱정할 필요 없다. 신자를 자녀로 삼아 사랑하는 하나님에게 작고 시시한 일이란 없다. 그분은 신자의 모든 일들을 지금 당장에 해결해주어야만 할 가장 중요한 일처럼 취급해주신다.
자신의 인간적 계획과 뜻은 아닌지, 정욕과 탐심에서 나오는 소원이 아닌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솔직히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기도 전에, 성령의 깨우침이 있기도 전에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선한 뜻에 합당하다고는 알지 못한다. 무조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정말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아뢰어야 한다.
흔히 신자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고 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전적으로 그분만 의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일차적 의미가 자신의 현실적 소유나 계획을 다 버리거나, 기도를 했으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응답만 기다린다거나,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오지의 선교사로 빈털터리로 떠나야 한다는 것 등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의 대화 통로를 완전하게 열어놓고 또 실제로 대화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가장 우선적이다.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오직 주님의 주권과 통치 하에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또 그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정말 모든 것을 그분께 털어 놓아야 하지 않는가? 다른 말로 괜히 주위 사람들에게 성을 빨리 내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께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언제 어디서나 죄악이 들끓게 되어 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과 죄인끼리 만나는 관계에서 산출 되는 것도 자연히 선보다는 죄가 훨씬 더 많다. 신자의 속에 날마다 새로 쌓이는 것도 죄이기에 자연히 말도 죄의 색깔을 알게 모르게 띄게 된다. 결국 하나님 앞에 모두 쏟아 놓지 않은 한 성 내는 것이 절대 더디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과연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남들에 대한 저주와 심지어 당신에 대한 원망과 불신마저 꺼내 놓을 수 있는 것인가? 혹시 믿음이 없는 불경한 행위이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 말고는 누구에게 꺼내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남들에게 꺼내 놓으면 죄만 더 만들게 된다. 모든 허물, 실패, 죄악들을 하나님에게만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더 진정하고도 온전한 믿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뜻도 바로 그것이었지 않는가? 또 그 모든 것을 하나님 말고 누가 온전하게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대부분의 신자들이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거나 환난에서 구출되어야만, 즉 현실적 가시적으로 뭔가 좋은 일이 생겨야만 응답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급하고 위중한 문제만 기도하지 일상적인 것, 특별히 영적인 문제는 기도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부모에게 매번 자기 소원대로 해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너무나도 초보적인 신앙이다. 불신자 시절에 먹고 마시는 것의 풍요와 안락을 위해 “비나이다!, 비나이다!” 했던 수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간 것이 없다.
기도의 응답은 당장의 문제 해결보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 씻음, 권면, 충고, 소생, 지혜를 얻는 경우가 훨씬 많다. 때로는 추궁, 야단, 징계도 받아야 한다. 또 그분의 뜻을 알게 되기에 자신의 잘못과 뜻을 수정 내지 포기하는 절차가 반드시 수반된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분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 동참하게 되는 것이 온전한 기도의 응답이다.
그분의 권면, 지혜, 충고, 뜻, 계획 등을 알아야 하니까 항상 기도는 성경 말씀과 병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지 않고는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다. 아니 그분의 말씀인지 사단과 자신의 뜻인지 그 진위(眞僞) 여부조차 분별할 수 없다. 말씀은 안 보고 급한 일만 무조건 해결해달라고 떼쓰는 것이 기도의 전부인 줄 아니까 응답 받는 일도 드물고 그분과 관계가 항상 힘들기만 하다.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단순히 목사나 수도사에게만 해당되는 줄 착각한다. 평소 말씀을 항상 읽고 묵상하지 않고는 그분이 주시는 위로와 지혜를 깨달을 수조차 없다. 위급한 문제만, 그것도 자신의 뜻대로 해결받기를 원하는 신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종으로 여기는 것밖에 안 된다. 요술 램프 거인처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만 해결해주는 자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자기 기분대로 할 것이니까 말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할 말을 구별하라.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털어놓으라는 것이 응답을 다 받고자 하는 뜻만이 아니다. 예컨대 주위 사람에 대한 저주를 하나님에게 아뢰었다고 해서 그분이 대신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억울한 사정은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만의 선하고 의로운 방식으로 신원(伸寃)해주신다.
그러나 신자가 마음, 그 마음이 여전히 죄에 젖어 있음을 절대 잊지 말라, 먹은 대로 다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한 대로 기도를 통해 오히려 그분의 용서, 위로, 권면, 지혜 등을 더 받는다.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갖는 대상은 기도하는 그 본인이다. 일대일 대면해서 만나 주시는 것이 기도이지 않는가? 그래서 당신의 자녀가 당신의 자녀답게 변하는 것이 그분에게 가장 급선무다. 신자가 영적으로 바로 서서 당신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중에 미웠던 상대에 대한 분노, 저주가 다 풀어지게 해주신다. 단순히 그분의 신령한 능력으로 “뿅!”하고 신자에게 새로운 감정으로 바꿔 주는 것이 아니다. 신자의 믿음을 먼저 성숙시켜 주신다. 악한 것으로 쌓여 있던 신자의 마음에서 하나님께 그 악한 것을 뱉어내고 난 빈 공간에 당신의 말씀으로 채워주셔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절대 없어지지 않았을 미움의 쓴 뿌리가 뽑혀 나가고 대신에 살아 운동력 있는 말씀이 그 심령에 심기는 것이다.
따라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앞에 말을 많이 빨리 하는 자는 자연히 사람 앞에 말을 적게 더디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 더디 내게 된다. 이미 기도하면서 미워하는 감정을 해결 받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람 사이에 빨리 많이 해야 할 좋은 말들은 입술에 넘치고 대신에 더디 적게 해야 할 나쁜 말은 줄어들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에 모든 일을 걸어놓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들 사이에 말로서 문제를 야기하는 자는 천성이 말 많고 성격이 급한 사유도 있지만, 신자의 경우에는 그만큼 기도를 적게 했다는 반증이다. 그런 단점을 가진 자일수록 더더욱 기도해야 한다. 단순히 기질과 습성을 고쳐달라는 기도로 그치면 안 된다.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오직 주님만이 통치하신다는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나의 혀마저 주관하셔서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도 그분이 심어준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기도란 그래서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선하고 의로우심이 얼마나 풍성하고 완벽하신지 철두철미 깨달아 나가는 작업이다. 또 그렇게 깨달으려면 매사를 두고 자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정말 미주알고주알 대화를 하면서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알아나가야 그분의 풍성함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또 그 풍성함을 알게 되면 오직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으로 그분을 대하게 되며 저절로 모든 것을 그분 앞에 쉬지 않고 토설하게 된다. 기도를 많이 하는 자라야 오히려 더 많이 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 받는 은혜의 폭과 양이 깊고 넓어지는 법이다.
신자들이 믿음에서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도덕적 실천에만 제한하여 적용하거나, 그것만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옳고 정당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말해도 되는 양 착각한다. 판단, 정죄, 비난의 말을 성경 말씀을 잣대 삼아 너무 쉽게 대놓고 말한다. 그런 말은 가능한 늦게 적게 해야 함에도 그 반대로 하면서 아주 잘하고 있다고 오해한다.
지금 야고보 사도도 바로 그런 자의 잘못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아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가지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26,27절)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 자는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그 마음에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부터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케 하지 않으면 자연히 자기 자랑이나 남을 판단 정죄하는 말이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정말 날마다 자기 속의 모든 것을 주님께 털어 놓고 그분의 위로와 권면으로 새롭게 되는 자는 성을 내기는커녕 말도 앞세우지 않고 오직 행함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사단에게 빌미를 주지 말라.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2,23)
예수님이 곧 고난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자 베드로는 그리하지 말라고 말렸다가 주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았다. 물론 그가 십자가 구원의 깊은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첫째 이유였다. 그 외에도 그는 옳고 바른 일이기에 얼마든지 당장 말해도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자기 마음에 쌓였던 그대로를 뱉어낸 것이다. 스승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의리가 쌓여 있었다는, 부분적으로는 있었겠지만, 뜻이 아니다. 메시아는 반드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현실의 안락과 풍요를 주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말하자면 방금 자기 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분이 그런 엄청난 말씀을 하셨다면 대체 무슨 뜻인지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데도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예수님이 곧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슬프고도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베드로가 말린 것이 나쁜 짓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억울하고 힘든 일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뜻을 묻고 모든 대응을 그분에게 맡겨야 한다. 베드로의 잘못은 옳고 바른 일이라고 말만 앞세우다 예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는 잘못 즉, 사단에게 스스로를 넘기는 빌미를 준 것이다. 예수님과 반대라면 사단에게 속한 것이다. 자기 생각에만 묶여 있는 것이다.
신자에게 정말 억울한 일이 많을 수 있다. 자기에게 전혀 책임과 잘못이 연유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상대가 완전히 잘못한 것이 분명히 맞다. 반면에 자기는 옳고 바르다. 그럼에도 그 상대에게 대놓고 바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단에게 빌미를 주는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상대도 마찬가지다. 죄의 본성끼리 부딪히면 죄는 곱절로 늘어날 뿐이다. 그렇다고 신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또 선해질 수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만 손해 보라는 뜻이 아니다. 바로 그 일이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최우선적인 일이기 때문에 신자도 반드시 그에 걸맞게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상대를 바로 세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자 그분만이 올바르게 세울 수 있다. 신령한 능력으로 상대를 졸지에 변화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가 도리어 주님의 사랑으로 가해자를 섬기게 만들어 주신다. 야고보 사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고 말한 대로다. 피해자의 진정한 섬김을 통해 결국에는 그 상대도 당신의 은혜와 권능을 맛보게 해주신다.
믿음이 좋다는 것이 옳고 바른 일을 판단하고 행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양심으로 남아 있는 불신자 가운데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자도 있다. 믿음의 본질은 오직 주님께 모든 것을 아뢰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옳고 바른 일조차 자기가 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신자는 단지 그분의 지혜에 자신부터 맞추어 나가며 그 맞추어진 모습으로 상대를 사랑해야 한다.
사단에게 빌미를 준다는 것은 사람 사이에 사랑 대신에 미움을 싹트게 하는 것이다. 미움은 분열에서 시작된다. 또 분열시키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 옳고 바른 일로 남들을 판단 정죄하는 것이다. 그 판단과 정죄한 내용 자체가 그릇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히 나쁜 데도 나쁘다고 지적당하면 더 나빠지는 것이 인간 본성이기에 분열은 필수적으로 따른다는 뜻이다.
말이 빠르고 많으면 또 그래서 성 내는 것도 빠르면 사단에게 빌미를 주는 최적의 길이다. 참 경건에 이르는 길은 그 반대로 가면 된다. 사람들을 향한 말에는 재갈부터 꽉 채워야 한다. 미운 놈 쳐다보지도 말고 더러운 곳에 가까이 가지도 말라는 뜻이 아니다. 반드시 그 밉고 더러운 모든 점들을 주님께 먼저 고자질해 바쳐야 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시어 선으로 바꾸어 달라는 소망과 그분만이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그래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놀랍게도 자신부터 깨끗케 해주신다. 또 사람에게 꼭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반드시 깨닫게 해주신다. 요컨대 마음에 쌓인 것이 먼저 바뀌면 밖으로 나가는 것도 자연히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나쁜 말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 방안은 오직 그것뿐이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빨리 많이 하는 편인가? 하나님에게 가장 먼저, 그 다음에는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말인가? 아니면 사단에게 빌미를 주는 말부터인가?
5/9/2009
이런 말씀으로 가르치는 지도자가 없었기에요.
기도의 형식을 잘 몰라 그저 미주알 고주알 아뢰고 심지어 고자질도 매일 매순간
하였던 저의 기도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면 늘 손가락질 당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초신자에게 특별히 더 설명되어져야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