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목회자로 헌신할 것인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쒸우리라."(약3:1,2)
한국인들은 감정적이라 부흥회나 수련회 같은 집회에서 비상한 은혜를 받으면 당장 목회자의 길로 가겠다고 서원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사역자가 맡은 임무가 너무 막중해 당연히 더 큰 책임을 갖게 되므로 쉽사리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벌을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벌받는 이유를 야고보 사도는 좀 특이하게 규정 지었습니다. 흔히들 목회자들이 가장 실패하기 쉬운 원인으로 금전적, 성적 잘못을 첫째로 꼽습니다. 사도는 그 대신 말의 실수를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말에 완벽할 수 없는데 아무래도 말을 가장 많이 해야 하는 사역자가 실수할 확률이 가장 높고 또 실제로 잘못도 가장 많이 범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가장 쉽습니다. 물론 실제로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그 원리는 너무 간단하다는 뜻입니다. 사역자가 말을 가장 많이 해서 실수할 확률이 가장 높으니 거꾸로 가장 말을 적게 하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것을 "그 입에 재갈을 먹여 온 몸을 어거(禦拒)하며"(약3:3)라고 표현했습니다. 입에 재갈을 먹이면 몸도 굴레를 쒸우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어거란 한자 말은 막을 ‘어’와 막을 ‘거’가 중복된 것입니다. 당시의 번역자가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야말로 입에 재갈 먹이면 몸도 통제가 된다는 이중의 굴레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헬라 원어를 보면 어거가 사실은 막기만 하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준다"(turn about)는 뜻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지 못하면 죄악을 범할 수 있지만, 재갈을 물리면 오히려 선한 행동이 따를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사역자가 가능한 말을 적게 해서 과묵해지고 성도들과 상담한 말이 교회 안에 나돌지 않아 존경 받게 된다는 뜻입니까? 사역자는 그 직무 수행상 필연적으로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상담하여 위로하고, 심방하여 기도해 주고, 성경의 비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직무상의 말은 오히려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소나 말에 굴레를 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되새김질을 하거나 침을 많이 흘리지 않게 하는 대신에 오직 밭을 갈거나 짐을 운반하는 일에만 집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식사 때가 되면 굴레를 풀어줍니다. 입에 재갈을 먹이는 것은 오직 맡은 바 할 일만 하고 나머지 일은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역자도 직분 상의 말만 하고 나머지 쓸데 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역자의 직분 상의 말이란 다른 것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전해지는 말씀이 성도에게 영적 유익을 주고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우는 목적으로만 하라는 뜻입니다. 사역자는 자나깨나 불 조심이 아니라 자나깨나 입 조심인데, 다른 말로 하면 입만 벌렸다 하면 예수님 이야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란 항상 본인의 생각의 표현입니다. 본인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말로 나오면 그것은 푼수 혹은 정신 이상입니다. 또 동일한 말을 자꾸 하는 것은 그것을 가장 많이 생각했다는 증거입니다. 사역자가 오직 예수만 생각하면 예수의 말만 하게 됩니다. 그런 사역자는 당연히 금전이나, 여자 문제로 실패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결국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자나 깨나 오직 예수가!" 된 자만이 감히 선생이 되겠다고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부흥회나 수련회에서 일시적으로 충만을 받은 것이 반드시 성령 충만, 오직 예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적 흥분이 절정에 이르렀거나, 당시의 영적 분위기에 같이 휩쓸렸을 가능성이 더 다분하다는 것입니다.
그 헌신이 진정으로 예수 충만인가 점검하는 방법도 아주 간단합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상인이라면 어떤 결심의 강도(强度)가 삼일 이상 지속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집회가 끝나고도 삼일을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 헌신이 집회 때와 동일하게 생생한 감격으로 다가 오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헌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그때부터는 다시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기도하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평생을 두고 자나깨나 예수만을 외칠 수 있을지, 정말 예수 외의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입에다 이중의 재갈을 먹이고 몸도 함께 어거할 자신이 있는지, 요컨대 항상 모든 생각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실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지금 사역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자가 성화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의 비결도 동일한 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대로 말이 나오고, 말하는 대로 몸이 움직입니다. 말의 힘으로 몸이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몸이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이나 말이 아니라 생각에 재갈을 물려 성도로서 꼭 해야 할 생각만 하면 성화는 자연적으로 됩니다.
1/4/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