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4:13-17 신자의 감사는 달라야 한다.

조회 수 241 추천 수 0 2016.11.30 15:11:00

신자의 감사는 달라야 한다.

2016 추수감사주일설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3-17)

 

 

맹세는 악한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어떤 도시에 가서 무슨 장사를 해서 이득을 낼 것이라고 함부로 장담하지 말라고 말한다.(13절) 그렇다고 미국에 유학이나 이민 올 때에는 분홍빛 미래를 꿈꾸며 앞날의 계획을 세워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그런 것마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다.(16절) 장사에 성공을 하지 못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든지 혹은 내 성을 갈겠다는 식의 맹세를 금지한 것이다. 신자도 실력을 쌓고 정보를 수집하여 계획을 정밀하게 작성해서 성공할 자신감을 가지는 것까지는 괜찮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남들 앞에 떵떵거리며 큰소리치는 것은 장래 일을 감히 인간인 자기가 주도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 된다.

 

예수님도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에 옳다 아니다만 말하고 이에 지나치는 것은 악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머리카락 하나 검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마5:33-37) 야고도 사도도 같은 맥락에서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은 다 악한 것이라고 선언했다.(16절)

 

야고보는 또 생명은 잠시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 같다고 했다.(14절) 하나님이 언제 우리 생명을 거두어갈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취할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이다. 자신감을 갖고 계획을 수립해 성실히 수행하되 15절의 말씀대로 주님 뜻대로 이끌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만약 자기 계획이 그분의 뜻과 어긋나서 그분이 수정 취소시키더라도 내 뜻대로 마시옵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즉 예, 예라고 하면서 수용하고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그랬지 않는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미리 알 수 있는 경우는 평생에 한두 번밖에 없다. 신자가 하나님 뜻을 다 알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지 않는가? 오히려 그분의 뜻을 미리 알고자 하는 것이 커다란 교만이다. 본문이 말하는 바에 비추어 따지면 악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신자에 대한 그분의 뜻은 간단하다.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시는 당신에 대한 소망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절대로 놓지 말라 것이다. 설령 스스로 세운 계획에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실행했지만 완전히 무산된다 해도 자신에게 유익이요 하나님의 영광도 반드시 드러남을 확신하는 가운데 살아가라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이전 교인 중에 화학공학 박사를 취득해 교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유학 온 똑똑한 청년이 있었다. 겨울 방학 때 스키 타러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하반신 불수가 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의사가 되어서 환자를 돕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의대로 진로를 바꿨다. 미국은 유학생에겐 의대 입학을 시키지 않는데 그때만 해도 잘 몰라서 백방으로 입학해보려다 몇 년을 허비했다.

 

다시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는 바람에 남보다 훨씬 오래 10년도 더 걸려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갔다.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도 하지만 전국장애인재단의 사무국장직을 맡아서 장애인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하나님의 그를 향한 계획은 교수로 형통 출세하는 것보다 장애인을 섬기라는 것이었다. 본인으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그 교통사고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진로수정을 시키려는 필수적 과정이었던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기독교만의 명절이 아니다.

 

이번 주는 추수감사절 주간이다. 유럽의 청교도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와 첫 수확을 얻자 하나님에게 감사의 제단을 드린 것이 유래가 되었다. 신자라면 당연히 올 한 해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오직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이미 받은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도 가능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의 추석이 그 실례이지 않는가? 또 세계의 모든 종족들이 유사한 축제를 오래 동안 지켜왔다.

 

고대는 농업이 주산업이었다. 수시로 태풍, 가뭄, 메뚜기 떼 등이 닥치면 인간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제어가 불가능하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풍년이 되거나 평년작만 되어도 그 절대자나 대자연에게 감사하게 된다. 청교도들이 추수감사절을 제정하기 전에 미국 인디언들에게도 추석은 분명히 있었다는 말이다.

 

성경적으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방황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자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 전에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부터 분명 추수감사제였다. 그들이 드린 제사는 죄를 지은 후에 회개하는 속죄제가 아니었기에 동물의 희생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었다. 율법의 감사화목제사도 자기 생업의 소산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그들도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배운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었다. 결국 추수감사절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한 것이다. 인간이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에 감사하지 않으면, 최소한 그분의 주도하심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인간됨을 의심해봐야 한다.

 

예수님과 야고보 사도가 맹세를 금지시킨 첫째 이유는 어느 누구도 자기 미래를 통제는커녕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그분의 권능과 사랑이 역사하지 않는 순간은 일초도 없음을 믿는 신자라면 감히 맹세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대신에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범사(凡事)란 당연히 좋은 일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의 감사는 달라야 한다. 신자가 놓치고 있는 감사의 요소가 많지만 오늘은 셋만 살펴보자.

 

일상에 감사하라.

 

첫째로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 감사가 없거나 너무 부족하다. 아주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내 능력으로 이뤘다고 착각한다. 감옥과 수도원은 외부와 접근이 차단된 폐쇄된 집단이다. 특별히 기쁜 일이 있을 수 없다. 매일 간단한 일과만 반복된다.

 

만약 감옥의 안전이 완벽히 보장된다고 가정하고 얼마 동안 어느 쪽에서 살고 싶은지 물어보면 백이면 백 수도원을 택할 것이다. 수도원은 매일 해내야 할 과제가 있고 그 의무를 채우지 못하면 형벌이 따른다. 감옥은 그저 놀고먹기만 해도 되는 곳인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둘이다. 감옥은 하루 종일 불평불만이 가득한 곳이다. 반면에 수도원은 하루를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마친다. 최소한 감사하는 것을 훈련하는 곳이다. 종교를 가져야 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조하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더 중요한 둘째 이유는 감옥은 정말 놀고먹기만 하지만 수도원은 아무리 무미건조해도 노동, 기도, 말씀 등 매일 해야 할 일상적 일이 있다. 바로 그래서 감사가 가능한 것이다.

 

일상적인 일에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박의 은혜만 기대하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도 그것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크고 급한 일이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평소 에 말씀도 보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필수요소인 공기 물 빛 음식 등을 인간이 계획 조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 전부를 하나님이 마련해서 무상으로 무한대로 베풀어주신다. 우리 생명은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한다.

 

매일의 삶 속에 신자가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는 수도 없는 위험 속에서 하나님이 지켜 보호해주신다. 성령이 신자의 전후좌우를 두르고 흑암의 세력과 세상의 죄악에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신다. 가정과 직장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또 하나님의 일이라면 크고 중요하지 않는 일도 단 하나 없다.

 

적은 일에 그분의 은혜를 발견해 누리지 못하면 정작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큰일에 숨겨진 은혜에 무감각해진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받은 복만이 아니라 평소에 지나쳤던 사소한 일상에 더 감사하자. 그것이 신자가 행할 참 감사의 출발이다.

 

현재의 고난에 감사하라.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면 현재의 고난도 그분이 당연히 주관하신다. 그분이 주관하신다면 당연히 그분의 은혜도 있다. 신자가 행할 두 번째 참 감사는 현재의 고난 중에 감사하는 것이다.

 

벤자민 에어라는 미국 선교사가 서방국가에 잡혀 있는 테러리스트와 교환할 목적으로 레바논에 인질로 잡혀 감옥에서 16개월을 고생하다 풀려났다. 기자들이 어떻게 그 지루한 시간을 보냈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망감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질문했다. 그는 제가 받은 축복을 헤아리며 이겼다고 대답했다.

 

인질로 잡히기 전에 받은 축복을 회상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감옥 안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받은 축복이었다. 어떤 날은 샤워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또 어떤 날은 고기를 먹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했다. 거기다 가족 친구 교인들이 지금도 나를 사랑하며 나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는 것이다.

 

고난 중에 억지로 감사 거리를 찾으려 하거나 부정적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잠깐만 유용할 뿐이다. 속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감사가 아니면 지속되지 않는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오랜만에 샤워하거나 고기를 먹으면 저절로 감사가 되리라 속단해선 안 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소에 불평하는 자들은 물 온도가 뜨겁지 않다거나 고기가 저질이라고 또 불평하게 된다. 평소 일상의 사소한 일에 대한 감사가 몸에 밴 자만이 가능하다.

 

가족과 친구와 교인들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는데도 풀려나지 않고 계속 억류되어 있기에 선교사는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수시로 뉴스로 보도됨으로써 테러에 대한 경각심이 고취되고 파송한 교회는 기도에 불이 붙었을 것이다. 그런 일들에 자기가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제가 암에 걸려 수술하고 입원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 담임하고 있던 유학생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교인이 증가했다는 뜻이 아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하여 가난한 학생교회임에도 자체 예배당을 마련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건물을 산 것이 부흥이 아니다. 교인들 모두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얼마나 귀중한지 깨달았고 그런 교회를 사랑하는데 한 마음이 되는 부흥이었다.

 

좋은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은 믿음의 초보자도 가능하다. 그 때는 또 유난히 은혜를 많이 주시는데 하나님이 살아 있고 인생을 주관하며 기도에 응답해준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려는 뜻이다. 신자의 믿음과 인격이 아름답고 진실하고 선하게 성숙되는데 최고의 수단은 사실상 고난뿐이다. 제가 가장 연장자로써 수많은 고난을 겪어본지라 감히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진리다. 실제로 고난 중에 더 오묘한 은혜가 반드시 풍성히 숨겨져 있다.

 

불만을 억지로 참거나 부정적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은 마인드 컨트롤이다. 종교적 의무로 행해도 다 참고 나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하나의 공로가 되어서 자연히 그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려 들게 된다. 그런 와중에 믿음과 인격이 자랄 여지는 없다.

 

틀림없이 선교사의 아내는 혼자 살아가기 힘들다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남편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 더 견고해졌을 것이다. 각자의 영혼에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해졌기 때문이며 감옥 안에 있는 선교사도 아내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거룩한 뜻을 당장에 모를 수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난다. 고난 중에 어려운 여건으로 감사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고난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보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가 행하는 둘째 참 감사다.

 

미래를 감사하라.

 

야고보 사도는 생명은 안개와 같다고 했다. 내일 일은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주관하고 그 성공 여부도 오직 그분의 손에 달렸다. 그럼 한 개인에게 내일이 있음도 무조건 당연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에 새 날을 주심을 감사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오늘 하루 평강으로 인도해주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솔직히 일반인도 할 줄 안다. 신자가 행할 참 감사의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감사는 저녁에 잘 때에 내일 새날을 줄 것에 대해 미리 감사하는 것이다.

 

나아가 오늘은 어제보다 나았고, 그래서 내일도 오늘보다 더 활기차고 풍성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게 이끌어 주실 줄 믿고 감사해야 한다. 자기가 계획한 미래의 소망을 하나님이 키워주실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도 그분이 반드시 이뤄주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해야 한다.

 

벤자민 선교사는 당연히 풀려날 것을 소망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담대히 대비했을 것이다. 미국은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특공대원을 침투해 구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자기를 위해 구출작전을 세울지도 의문이고 설령 작전을 벌려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상식적으로 따져 그에겐 미래의 소망이 없었다. 죽음이 기다릴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럼에도 틀림없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감사했을 것이다. 선교사, 그것도 중동 선교사로 헌신할 때는 아예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물론 죽음에 대한 육신적인 두려움은 생기겠지만 그 영혼은 순교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큰 영광임을 알고 감사했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Mission을 다 보셨을 것이다. 브라질 아마존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복음은 한 마디도 전해보지도 못하고 전부 식인종에게 살해당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순종한 선교사는 성경 외에 피리를 들고 갔다. 말이 전혀 안 통하는 원시부족의 영혼을 터치하여 마음 문을 열게 하는 데는 하나님의 찬양이 능력이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성령이 역사해주길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마저 실패하면 자기는 하나님께 찬양하면서 순교하겠다는 각오였다. 자기 장례식에 부를 찬송가를 자기가 연주하려는 계획이었다.

 

미래에 대해 감사하는 것, 찬양으로 내일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참 감사다. 감사의 절정이자 완성이다.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내년을 감사, 아니 30-40년 뒤의 미래를 꿈꾸며 감사하라. 그 소망이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한 손에 붙들려 있음에 감사하라.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분의 섭리와 주권으로 내 인생을, 특별히 내게 주신 소명을 그분이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며 이뤄줄 것을 믿고 감사하라.

 

내가 소망하고 계획한 것들보다 훨씬 더 좋게 하나님이 결실 맺어 줄 것을 믿고 감사하라. 그런 소망을 갖게 한 것 자체가 그분의 간섭인데 그분이 안 이뤄주실 리가 있는가? 내일 일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인간이 감히 장담할 대상이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내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기도하며 오직 그분께 맡겨야 할 대상이다.

 

감옥 안에서 찬양하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하다 감옥에 갇혔다. 손발은 쇠사슬에 묶였다. 로마 지하 감옥의 그 어둡고 축축하고 더러운 곳에서 한 밤중에 일어나 하나님을 찬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세상에서 핍박받을 수 있는 신분이 된 것 자체를 감사했다. 그들에게 박해는 일상적인 일이었고 그 일상성을 감사한 것이다.

 

그날 낮에는 점을 치는 여종에게 예수 십자가 복음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다. 빌립보에 예수님의 이름이 크게 높아졌음에 감사했다. 또 감옥에 갇힌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줄 믿고 감사했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지만 풀려나면 하나님이 자기들을 또 어떤 땅 끝으로 보내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는지 크게 기대하며 설렘과 기쁨으로 찬양했다.

 

알다시피 그들이 찬양하자 지진이 일어났고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렸다. 놀라서 두려워 떠는 간수장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온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단순한 복음을 선포했다. 간수장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앞에 성령의 역사로 겸손히 엎드렸고 그 선포된 말씀대로 간수장과 그의 집안이 구원받아 빌립보에 교회를 세우는 역사가 일어났다.

 

전교인 성경공부에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과거를 회상하며 살 수 없다. 심지어 현재도 인간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겼다고, 어떤 생각을 했다고 인지하는 순간 그 모두는 이미 과거로 변해버렸다.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만큼 무시무시하게 빨리 미래는 순간의 정지나 후퇴 없이 막무가내로 다가온다. 모든 인생은 그래서 미래만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과거에 받은 복을 회상하는 것은 잠시 위로받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고난과 자꾸 비교되어 오히려 불평불만만 생긴다. 현재도 살 수 없으니 미래 그 자체가 바로 인생이다. 그 인생을 아무런 믿음과 계획과 소망도 없이 불안 염려에 휩싸여 끌려가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미래를 설렘과 기쁨으로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제가 드리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선언하는 진리다.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갈 바 모르는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하며 순종하며 따라갔지 않는가? 믿음이란 내 인생을 하나님이 이끈다는 확신가운데 기뻐할 수 있는 실력이다. 감사하고 설렘으로 미래를 기대해야 한다. 최소한 미래에 대한 평강이 없다면 믿음마저 의심해야 한다.

 

왜 선을 행해야 하는가?

 

본문의 미래를 장담하지 말라는 의미는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사람이 선을 행할 줄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라고 뜬금없는 결론(17절)을 내리는가? 하나님 뜻대로 선하게 살라는 의미인 줄은 쉽게 알겠지만 맹세하지 말라는 본론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가?

 

천신만고 끝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의 소망은 오직 어서 빨리 누명을 벗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 야곱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 당시로선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기근을 해결하고 나아가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영광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말하자면 미래를 위해 간절히 기도만 했지 감사는 못했다.

 

그런데 그는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답게 범사에 정직하고 성실하고 의롭게 행동했다. 결국은 석방되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기근을 해결했다. 단순히 그의 의로운 행동의 보상이라고 봐선 안 된다. 요셉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인생을 위해 세운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 시련과 연단을 통과시켜서 믿음을 성숙시킨 후에 하나님이 완벽하게 이루신 결과다.

 

요셉도 총리가 된 후에 비로소 어렸을 때의 그 꿈대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끄신다고 깨달았을 것이다. 또 그때부터 고난에도 감사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고 감사할 수 있었거나, 최소한 설렘으로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감사는커녕 현재의 고난에도 심지어 일상의 사소한 일에 대한 감사도 잘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는 미래는 전혀 알 수 없다. 아직도 내 인생에 대한 소명을 찾고 있는 중인 자도 있을 것이다. 저부터도 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은 붙들고 있지만 조금만 현실적으로 힘들면 눈에 보이는 여건에 따라 의심 불안 불만이 수시로 생긴다. 기도와 말씀에 한창 정진해야 감사보다도 겨우 평강을 회복하는 수준 밖에 안 된다. 아주 잘 봐주어야 다시 소망을 붙들고 가꾸려 한다.

 

예수님이 예 혹은 아니오만 하라고 했다. 야고보도 주님의 뜻이면 살기도 죽기도 해야 한다고 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을 때는 민족을 구할 사명감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자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순종했다. 말하자면 신자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하나님의 큰 일이 닥칠 바로 그때에 예 기꺼이 죽겠습니다라고 하며 순종하라는 것이다.

 

미래는 주님께 완전히 맡기면 된다. 대신에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살아야 한다. 성실하게 실력을 쌓고 소망하는 대로 계획을 짜서 열심히 기도하며 수행하되 거룩하신 하나님이 마련해놓은 나에 대한 영광스런 미래를 그분이 이끌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한다. 현재의 현실에 아무리 궁핍하고 내 처지가 내가 봐도 부끄럽더라도 하나님의 미래에는 절대로 수치 불안 이 없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2:20에서 어떻게 고백했는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지 않았는가? 신자는 그리스도가 대신 살아주는 인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대체 무엇을 염려하는가? 예수 안에서 바뀐 내 신분과 정체성을 제대로 안 다면 일상성에 대해서, 현재의 고난에 대해서, 나아가 미래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 설교를 감옥 비유에서 시작해 감옥 이야기로 그쳐서 조금 송구스럽다. 그러나 감옥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참된 감사이지 않는가? 세상 사람은 감옥에서 풀려나야만 비로소 감사 내지 안도할 수 있다. 신자가 기쁜 일에만 감사하면서 감사절을 보낼 수는 없다. 세상 사람이 갖지 못한 특권을 신자가 갖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감옥에서 찬양과 감사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11/2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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