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1:2-4 정말로 믿음이 자라고 싶은가?

조회 수 1471 추천 수 13 2012.04.17 00: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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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믿음이 자라고 싶은가?
(조급증도 큰 죄다 시리즈 8)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연단과 시험과 유혹

한 간호사 초년병이 그 병원에서 가장 유명하고 노련한 외과의사의 큰 수술을 도왔습니다. 수술이 끝날 때쯤에 그녀는 수술에 사용한 12개의 솜뭉치 중에 11개만 회수 되었고 나머지 한 개는 아직 환자의 몸속에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의사는 열두 개 다 꺼냈으니 이제 봉합하면 된다면서 바늘과 실을 집어 들었습니다. 간호사는 “절대 지금 꿰매면 안 됩니다. 분명히 아직 하나 남아 있습니다. 환자의 안전부터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끝까지 우기며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자기 발밑에서 솜뭉치 하나를 꺼내 보이며 “앞으로 내 수술에 전속으로 도와 달라. 같이 열심히 잘해 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그녀의 성실성과 책임감을 시험해보려고 일부러 하나를 몰래 숨겼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신자에게 이런 방식의 시험을 허락할 때가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갈고 닦게 만들어서 정금같이 바꾸려는 시험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고난 가운데서 기도로 인내하면서 주의 율례를 깨달아 믿음이 한 단계 높아지게 하는 것은 연단(鍊鍛, Trial)이지 시험이 아닙니다.  

예화에 나오는 시험은 문자 그대로 Test(試驗)입니다. 의사는 간호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현장에서 확인해보려고 문제 하나를 제출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신자에게 정말로 굳건한 믿음이 있는지 또 그 믿음을 실제로 삶에서 행사하고 있는지를 보시길 원합니다. 따라서 신자로 어떤 특별한, 주로 급하고 힘든 경우에 맞닥뜨리게 해서 즉각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것이 시험입니다.

비유컨대 연단은 학생이 밖에 나가서 놀거나 빨리 자고 싶은 유혹(시험이 아님)을 이겨내고 밤늦게까지 학기 내내 꾸준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해당됩니다. 시험은 그 공부한 실력을 중간시험, 기말시험, 입학시험 등을 통해 점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성경에 좋은 예들이 있지 않습니까? 욥에게 엄청난 재앙을 당하게 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음을 포기하는지 사단과 내기를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더러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든지 아니면 풀무 불에 던져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만들었습니다. 노년의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지 두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그 시험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통과하기까지는 길고도 힘든 연단의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믿음이 그토록 강해진 것은 아닙니다.  

학생이 공부를 쉼 없이 해야 하듯이 신자가 믿음을 성숙시키는 것도 평생을 두고 이룰 과업입니다. 또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어려운 과제가 학생에게 주어지듯이 연단도 신자의 신앙연륜이 깊어질수록 더 무거워집니다. 한마디로 연단은 신자가 지닌 당장의 믿음에 비해 버거운 부하(負荷)가 걸리는 고난을 통해 주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겐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평생 끊이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성숙의 합격점에 완벽하게 다다를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온전하심 같이 신자도 온전하길 바라며 모든 신자의 인생을 끌어가는 것입니다. 또 신앙 성숙이 당신께서 보기에 어느 정도 성취된 단계마다 수시로 시험을 제시합니다.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반응하느냐, 아니면 세속적 인본주의적으로 접근하는지 여실히 드러나게 만드는 시험입니다.    

거기다 신자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이 문 앞에서 우는 사자 같이 항상 웅크리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라면 배고파 죽을 지경인지라 그 덮치는 힘이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죄악으로 타락한 세상은 화려하게 치장하고서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자기 품에 안기라고 온갖 교태를 떱니다. 이는 또 다른 종류의 시험, 정확히 말해 유혹(誘惑-Temptation)입니다. 결국 신자가 싸울 영적전투는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을 잘 통과하면서 시험과 유혹을 잘 분별하여 시험에는 합격해야 하고 유혹은 물리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세포적인 신앙

간혹 예수를 믿으면 고난이 없어지거나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전도를 받을 때에 모든 수고와 짐을 덜어준다는 거짓 약속에 속았고 교회 출석 후에도 계속해서 기복주의적인 설교만 들어서 그렇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과 피조세계가 받아야만 하는 징벌인 고난이 신자라고 결코 비켜가지 않습니다. 아니 살펴본 대로 일생을 두고 연단을 통과해야 하며, 수시로 시험도 받아야 하며, 유혹은 단 한 시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신자의 일생은 세상 사람의 형편이나, 믿기 전의 자신과 비교해 오히려 더 고달플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경우 연단, 시험, 유혹을 믿음으로 구분 대처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믿음 자체가 없으니 그냥 자기 기분대로 삽니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기준 자체가 신자와 다르지만 성공은 자기 공로로, 실패는 남과 세상 탓으로 돌려 버리면 그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에겐 이 셋이 아예 적용되지 않습니다. 연단은 누구나 겪는 힘든 세상사요, 시험은 자신의 판단과 의지력을 자랑할 기회요, 유혹은 즐겁게 사는데 필수적인 오락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으니 그분이 그들 믿음을 성숙시키거나 시험해볼 근거라곤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사단 또한 가만 놔두어도 스스로 죄악의 노예가 되어 있기에 따로 유혹하고 훼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이 셋을 잘 분별하여 그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불신자는 고난이 닥치면 그저 힘들어서 속히 탈출할 궁리만 합니다. 신자마저 그런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응답해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 외에 영적으로 자란 것이 없습니다. 또 작은 환난을 이겨내었기에 다음의 큰 환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며 그렇게 된다고 해서 믿음이 성장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배짱이 는 것일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도리어 즐거워할 수 있어야 정말로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연단의 도착지가 믿음이 정금같이 변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환난이 닥치면 어서 빨리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그치면 기도자 스스로도 자신의 믿음이 자라고 있다는 인식은커녕 믿음을 자라게 하고 싶다는 소망마저 없는 셈이지 않습니까? 대신에 이렇게 열심히 잘 믿는데 환난을 주시는 하나님이 야속해지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환난을 허락했는지 그분의 뜻은 알려하지 않고 빨리 구해달라는 투정만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연단 중에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현재 겪는 고난을 연단으로 간주하지 않고 단지 고난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주시는 연단이라는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혹은 한 번이라도 그분의 뜻을 물을 것입니다. 그 대신 순전히 환난이라고만 간주하면 시급한 탈출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연단을 겉모습만으로 환난이라고 여기는 이유 또한 너무나 간단합니다. 신앙을 갖는 일차 목적이 자신을 안락하고 풍요롭게 만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범사를 자기를 힘들게 하는지 아닌지의 기준으로만 판단합니다. 자신에게 즐겁고 기쁜 일이 생겨서 육신적 정신적으로 아무 불편이 없으면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 반대가 되면 무조건 징계입니다. 신앙이 너무나 단세포적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주면 단번에 울음을 그치고 주지 않으면 마냥 우는 꼴입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믿음 자체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믿음이 자라는 것도 그분에 의해서입니다. 믿음을 소지하여서 자라게 하는 주체는 분명 신자이지만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에 혼자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자라게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만나는 사람, 사건, 환경 모두가 그의 믿음을 자라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그 가운데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방식이 바로 연단입니다.

따라서 연단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면 믿음이 자라지 않게 됩니다. 굳센 의지력으로 인내하고 어서 빨리 환난을 끝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연단을 통과하는 필요조건일 뿐입니다. 연단을 통해 믿음이 자라게 만드는 충분조건은 따로 있습니다.

바꿔 말해 열심히 뜨겁게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좋아진 표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뜨겁게 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며 믿음이 자란 한 증표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환난이 닥치면 신자라면 자연히 뜨겁게 기도하게 됩니다. 심지어 불신자도 천지신명에게 그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자랐다면 열심히 기도하는데 반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비유컨대 의사가 대학을 갓 졸업한 간호사더러 자꾸 아주 어려운 수술에 참여하라고 명하는 것은 연단입니다. 그런데 너무 정밀하고 어려운데다 시간도 오래 걸리는 수술인지라 “왜 나 같은 경험도 없는 자더러 이 고생을 시키지?”라고 의심과 불평을 잔뜩 품고 어서 빨리 수술아 끝나라고 참고만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본인의 실력은 자랄 길이 도무지 없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수술에 불려도 온갖 핑계 대면서 빠지려고만 할 것입니다. 그 유명한 의사와 개인적 교제를 나눌 기회도 점점 없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간호사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 같은 신참을 이렇게 큰 수술에 참여시켜 주다니 너무나 감사하고 큰 영광이다. 정말로 정신 바짝 차려서 하나에서 열까지 놓치지 않고 배워야지. 앞으로도 어떤 어려운 수술이라도 불러만 주면 절대 빠지지 말아야지.” 당연히 수술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고 정밀한 수술이라도 피곤한 줄 모를 것이며 실력은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범하는 신앙상의 가장 큰 오류는 종교적 행태를 취하기만 하면 바른 신앙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뜨겁게 하고 성경을 줄줄 외우면 신앙이 자란 표시거나, 신앙이 자란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세상 출세만을 위한 기도는 아무리 철야와 금식을 겸해도, 또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예수를 부인하는 자료를 찾으려는 비교 종교학적 연구라면 오히려 불신앙이지 않습니까?

재차 강조하지만 신앙을 갖는 목적이 자기 평안에만 둔다면 환난을, 그 대부분이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임에도, 어서 빨리 끝내달라는 기도 밖에 할 줄 모릅니다. 또 그렇게 기도해서 응답을 빨리 받아내면 믿음이 좋고 신령한 신자로 대우 받습니다.

처음 믿은 신자는 주로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또 그 응답도 비교적 잘 됩니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믿음부터 신자에게 확고하게 심어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두려워 말고 기도부터 시키려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생기고 나서도 기도하는 목적을 하나님이 문제 해결할 수 있는 분인지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면, 다른 말로 어서 빨리 환난을 끝내달라는 기도만 한다면 참으로 곤란하지 않습니까? 제게 믿음이 없으니 믿음부터 심어달라는 셈입니다.

기도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하나님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방식”이 되었던 반드시 문제가 해결된다고 신자 스스로 이미 전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신자가 자신의 계획을 멋대로 세워서 하나님을 그 일을 수행하는 종처럼 부려먹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떤 방식이 되었든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 없이는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단순히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만으로 기도해선 안 됩니다. 그분은 내가 원하는 때와 방식보다 분명 더 좋은 때와 방식으로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는 비결

하나님이 연단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문제를 당신께서 직접 해결해 주시기보다는 신자더러 그 자라난 믿음으로 문제에 당당하게 맞서 스스로 해결하라는 뜻이 됩니다. 신자 독단으로 온갖 현실적 방안을 다 동원해서 자기 힘으로 해결하라는 뜻은 물론 아니지만 말입니다.  

인간 만사는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섭리 주관 통치하십니다. 그러나 신자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은 신자와 함께 그 문제를 처리해 나가면서 신자의 믿음도 같이 자라게 합니다. 신자더러 기도하도록 하고 또 기도한 후에 믿음으로 그 일을 이겨나가게 만드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신자가 스스로 행하는 것 같아도 당신의 궁극적인 계획과 전혀 상충하지 않게끔 인도하십니다. 신자에게 연단을 주신 당신의 목적은 신자가 바르게만 반응하면 완벽하게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올바른 기도를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먼저 그 기도 중에 문제 해결의 지혜를 심어주십니다. 아무리 환난이 중(重)해도 인내하는 힘을 주시고 또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도록 심령에 당신의 충만함으로 채우십니다. 나아가 당신만의 신령한 방안을 동원해서 단번에 상상도 못하는 은혜와 함께 고난을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는 기도응답방안이 당신의 크기만큼 질적 양적으로 무한대로 예비 되어 있습니다.

연단을 통해 믿음이 자라면 가장 먼저 세상의 어떤 풍파가 닥쳐도 요동치 않고 평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천국의 영광을 소망하여 하늘의 신령하고 거룩한 가치를 이 땅에 실현케 됨으로써 환난 중에 오히려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현실적 형편이 부요하든 궁핍하든 그리스도를 위하고 증거하는 소명에 붙들린 일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럼 환난의 모습을 띤 연단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를 열심히 해서 인내력을 키워야 합니까? 아닙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주신 연단이니까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불경한 마음을 가져선 안 되고 무조건 순종해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연단의 목적이 나를 자라게 하는 것이게 그 목적에 전적으로 동의하여서 감사함과 경외함으로 감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앞에서 비유한 간호사처럼 정말로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도 무엇입니까? 인내만 온전히 이루면 문제 해결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영어로 따지면 Test가 아닌 Trial(연단)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어지고 싶다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환난 중의 신자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은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정말로 믿음이 자라고 싶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라서 하나님 보시기에도 합당하고 기쁜 사람이 되고 싶은 소원이 진짜로 있다면 어떤 연단이 와도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당연히 인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자라게 해주시겠다는데 신자가 괴로워할 이유라곤 없어야, 아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초년병 간호사가 어려운 수술에 불려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윗, 모세, 사무엘, 바울, 같은 인물로 바꿔주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기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뻐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받은 고난이 너무 중해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과 그들이 고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락만 추구하기에 고통이 따른다면 자신이 그런 의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도 거절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구체적으로 미리 알아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러는 것은 그리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궁핍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진짜로 원하는지부터 먼저 정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자라게 하는 특별한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문제는 신자가 가진 근본 태도입니다.  진짜로 믿음이 자라길 소원하면, 믿음의 내용이 문제이긴 하지만, 자라게 됩니다. 또 정말로 소원하는 일이라면 그 이루는 방법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다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결국 조급증이 문제다.

작금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음으로 평생토록 하는 일이라고는 환난을 없애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어서 그러라고 독촉하는 것뿐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환난을 없앨 뿐 아니라, 환난도 주실 수 있고 사실상 그 환난을 주셨던 분인데도 그 사실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아니면 그런 진리를 알아도 항상 잊고 있거나 짐짓 잊으려 듭니다. 영적 전투의 첫걸음은 신자에게 환난이, 정확히는 연단이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정확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흔히 믿음으로 환난을 한 번이라도 잘 이겨내면 다음에 어떤 환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잘 견딜 것 같이 여깁니다. 아닙니다. 불안하기는 여전합니다. 그동안 믿음을 자라게 하기 위해 한 일이라고는 기도하여서 하나님이 해결해줄 때까지 인내한 것뿐인데 어떻게 자기 믿음으로 다음의 더 큰 환난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그저 힘들게 인내만 했던 이전의 과정을 이번에도 겪어야 하는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지금껏 환난 중에 기뻐해 본 경험이 전혀 없기에 다음 환난에 기뻐하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합니다.  

어떤 중한 환난을 만나더라도 믿음으로 이겨내고 또 믿음이 자랄 수 있는 관건은 따로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확신하기에 가슴 설레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기에 당신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는 그 환난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더러 현실적 형편이 어떻게 되든 하나님의 영광부터 소원하게 되는 그 때까지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원리는 신자에게 닥치는 또 다른 영적도전인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을 이겨내는데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 말은 또 많은 신자가 이 둘에 대한 영적 반응에서 범하는 실수 또한 연단의 경우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이미 바뀐 근본 신앙 자세로, 방법이나 비결이 아닌, 대처하여 스스로 이겨내어야 하는데도 단순히 기도하고 말씀을 읽다보면 자연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쉽게 말해 신자의 눈앞에 닥친 시험과 유혹 그 자체를 하나님이 몽땅 없애주길 바랍니다. 또는 자신에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없다가 갑자기 생기거나, 약했지만 기도로 아주 강해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연단은 장기간에 걸친 훈련입니다. 시험과 유혹은 이미 눈앞에 닥쳐있는 당장 풀어야할 과제입니다. 시험은 하나님께로, 유혹은 사단에게 온 것만 다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평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연단이며,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시험과 유혹입니다. 시험과 유혹 그 자체로는 평소실력이 확실히 다져지기는 해도 없었던 실력이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이 시험 점수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 않습니까? 나쁠 때는 더 열심히 공부하여 다음에 잘 치면 됩니다. 최종 결과는 대학 혹은 취직 시험에서 결정됩니다. 벼락치기 공부로는 한두 번은 성공할지 몰라도 매번 그럴 수 없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시험과 유혹도 벼락치기 기도와 말씀으로 이기려드니 한두 번은 성공해도 패배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자연히 자꾸 내 믿음은 왜 이렇게 자라지 않는지, 혹은 하나님은 왜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지 등의 의심과 불만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    

학생이 장기적으로 성실히 공부하여 한 계단씩 실력을 쌓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일단 시험만 끝내고 보려니 벼락치기 공부를 합니다. 신자도 같은 의도로 위급할 때만 기도하고 말씀 봅니다. 모든 영적 실패의 주범도 결국 조급증이라는 것입니다. 연단(고난)은 물론 시험과 유혹도 어서 빨리 벗어나고픈 열망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하면 하나님이 몽땅 빨리 없애준다는 맹신(?)에 빠져 있고, 또 얼마나 뜨겁게 오래 매달리는 기도를 할 수 있느냐가 믿음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적전투를 승리하는 비결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길은 정작 따로 있습니다. 강한 믿음보다 정확한 분별력입니다. 그 분별력 또한 평소 실력이지 벼락치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하나님께로, 유혹은 사단에게서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기대나 예상과는 반대입니다. 하나님께로 오면 당연히 풍요하고 좋을 것이며 사단의 경우는 반대라고 여기는 그 기대 말입니다.  

유혹은 거의 매번 달콤하고 화려하고 풍성합니다. 그러니 유혹은 유혹이라고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미 넘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시험은 거의 매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드는데 문제는 포기해야 하는 쪽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통과하려면 주로 좋아 보이는 쪽을 포기해야 하므로 희생과 수고가 따르며 힘들고 아픕니다. 유혹과 시험의 이런 특성상 유혹에는 쉽게 넘어가지만 시험은 잘 이겨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둘 다 실패가 잦다는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선 하나님이 참 짓궂지 않습니까? 우리 죄의 본성이 생생하게 남아 있고 아직도 믿음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데도 너무 어려운 숙제를 매번 던져주지 않습니까? 조금 더 쉽게 금방 답을 알 수 있고 또 고통도 따르지 않는 시험을 주고, 유혹도 악한 냄새가 진동하도록  나타나주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면 시험도 유혹도 아닙니다. 믿음도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대학생이 되도록 덧셈 뺄셈만 하게 하면 오히려 학생이 더 신경질 낼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신자들이 그렇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공부해서 실력을 늘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대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초등학교 과정과는 천양지차가 나야 합니다. 시험과 유혹도 갈수록 더 어려워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에게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기분 내키는 대로 갖고 놀거나, 갈수록 고통을 주며 즐기는 새디스트는 결코 아니니까 말입니다.

시험과 유혹은 거의 동시에 유사한 모습으로 올 수 있으며, 때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건의 두 측면일 수 있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것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며, 시험을 통과하면 유혹은 벌써 멀리 떨어져 나가 있습니다. 욥기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함께 내기를 걸듯이 한 사건 안에서 시험과 유혹이 공존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시험과 유혹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해선 안 됩니다. 각각의 경우를 두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먼저 따져 봐야 합니다. 모든 경우의 수(數)를 대입하여 컴퓨터 시뮬레이션 하듯이 현실적인 결말을 예측 계산해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영적 전투를 살피고 있지 세상 출세를 믿음으로 쟁취하는 방법을 알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탄은 신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렇게 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풍성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하나님의 허락 하에 신자에게 보장해줍니다. 그러나 필연적이고도 분명한 결과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점차 그 삶과 인생에서 퇴색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시험은 그 정반대입니다. 비록 고통스런 과정을 겪어야 하고 때로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큰 희생을 치러야 하지만 자신의 영혼은 점점 더 새로운 생명력으로 활기차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경외, 사랑, 감사, 찬양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도 진지하며 충만하게 됩니다. 정말로 그분과 동행하는 것만이 삶의 최고 기쁨이요 인생의 첫째, 아니 유일한 목적으로 변합니다.  따라서 유혹과 시험을 만나면 자기가 선택한 어떤 대처방안이든 그 결말이 하나님과 자신이 더 친밀해지고 그분의 뜻이 실현될지 여부로 세심히 따져본 후에 실행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연단, 시험, 유혹, 어느 것이 되었던 영적 전투를 신자가 잘 치러낼 수 있는 관건은 하나뿐입니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있기에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그분의 거룩한 계획이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는지 여부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아니 그런 확신이 없으면 성령의 인도가 따르지 않습니다. 기도와 말씀도 아무리 신령하고 경건해도 일회성 종교행사로 그치게 됩니다.

신자란 그래서 예수를 믿은 직후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당연히 세상의 어떤 환난도 비록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충분히 감내하고 그분이 주신 소망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영적 전투에 실패하는 유일한 이유도 기도나 말씀에 등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전혀 높여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높여지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자신이야 어떻게 되던 교회가 연약해지고 성도가 실족하는 일에 염려가 가장 앞서지 않는다면 영적전투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3/22/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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