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성내는 것과 하나님의 의
[질문]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1:20)는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솔직히 저도 경상도 사람인데다 남성우위를 고집하는 완고한 집안에서 자란 중늙은이로서 성을 잘 내는 편인입니다. 이 질문에 답변 드리기가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순전히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성경 구절이라도 정확히 해석하려면 반드시 앞뒤 문맥에서의 의미를 먼저 살핀 후에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말하는 것과 연결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본문에서의 뜻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溫柔) 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19-22)
야고보서는 알다시피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선행을 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당연히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양극단 즉, 실제적 순종이 없이 기독교교리에 대한 관념적 믿음으로나, 십자가의 의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없는 단순한 선행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영생을 주는 복음은 영혼 속에 이미 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심긴 도가 없는데도 행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긴 도를 어떻게 행할 것이냐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내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 또한 당연히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영혼을 구원할 도는 심겨져 있습니다. 또 본문 자체가 성 내기를 “더디 하라”고 했지 아예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예수님도 성을 내신 적이 있습니다.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에겐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까지 하셨고, 성전 장사치들에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고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문장을 잘 분석해보면 “성내는 것”은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는 것에 대비되는 표현입니다. 또 온유함으로 받는 것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만 가능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결국 성내는 것은 마음에 넘치는 모든 더러운 것과 악에 연관되는 것입니다. 성낸다는 헬라 원어 ‘오르게’도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노여움을 뜻합니다.
이 문단을 포함하는 1장 전체의 주제는 시험을 거치면서 믿음이 더 성숙해지는 법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앞 18절까지 시험은 자기 욕심에 끌린 것이며 그 욕심이 죄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자기 욕심에 넘어가는 시험을 이기려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14,15절에서 말하는 죄를 잉태하는 욕심도 바로 21절의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과 일맥상통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속에 남아있는 깊은 분노로 성을 내면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도를 행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내는 것의 반대인 온유함은 마음속의 쓴 뿌리들을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함을 보일 수 있고, 또 욕심에 넘어가는 시험을 이겨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절)는 말씀이 본문에 이어집니다. 그 행하는 일로 영생을 얻는다고 하지 않고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구원 얻은 자가 누리는 복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율법을 그냥 듣기만 하지 말고 온전히 실행하면 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복입니다. 또 그러려면 깊은 분노를 버리고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의 뜻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5-27)
바울 사도는 분을 내어도 되지만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합니다. 동일하게 깊은 분노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귀로 틈을 타게 해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된다는 앞 절과 연결시키면 인간관계나 성도간의 교제에서 내는 화를 말합니다.
분노란 정당한 것에서 벗어난 일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가 바리새인이나 성전 장사치들의 죄를 미워하는 의분(義憤)이었듯이 말입니다. 아무리 교회 안의 지체라도 어떤 기준을 벗어나는 잘못을 범하면 당연히 화가 납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동안 화를 되새기고 있으면 주체할 수 없도록 더 큰 화를 불러와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게 되며 오히려 자신이 죄를 범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이어지는 설명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함 같이 하라.”(30-32절)
야고보서의 본문과 뜻이 일맥상통하지 않습니까? 이미 인치심을 받은 즉, 구원을 얻은 자에게도 마음속의 모든 악독, 노함, 분냄 등을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합니다. 대신에 지체 간에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주님이 너희를 용서함 같이 하여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라고 합니다. “분을 해가 지도록 품어서 용서해주지 않는 것”은 바로 마귀에게 넘어가 죄를 짓게 되는 틈을 내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9-21)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선 분을 내어도 해지도록 품지 말고 반드시 용서해주어야 할 이유로 인간에게는 원수 갚을 권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특별히 성도는 지체들에게 오직 선을 행할 책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도니까 더 선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을 행해야 악을 이길 수 있지, 악을 악으로는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선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도덕적으로 선해도 죄의 본성은 남아 있습니다. 남이 분명 잘못을 범했기에 자기는 정당한 화를 내었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편견, 고집, 선입관, 이해관계, 친밀도, 야고보서가 말하는 깊은 쓴 뿌리, 등등에 따라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정당한(?) 기준마저 왜곡해서 적용할 소지가 다분합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는 잘 지적하는 잘못을 너무나 자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짜로 정당한 화를 내었어다 쳐도 화를 계속 품지는 말아야 합니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깊은 앙금으로 남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앙갚음 하고픈 마음이 생깁니다. 질책, 야단, 비난, 조롱, 무시, 멸시, 모독은 물론 금전적 인격적 사회적 복수를 계획하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이기려다 자신이 더 악해지는 우에 빠지고 자연히 하나님의 의 즉, 지체 간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해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기준은 절대적 선에 따라 완벽합니다. 인간처럼 이해타산관계나 감정적 앙금이나 자기중심적인 판단력 부족 등은 전혀 개입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모든 선행과 잘못에 대한 당신의 상벌은 완전하고 공정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의미는 인간끼리는 오직 서로 사랑만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지금도 변함없기에 신자로선 원수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몫일뿐입니다. 정당한 의분이 아닌 감정적 앙금과 복수심리가 깊은 분노는 물론 사람 사이에 담을 쌓을 수 있는 분노는 내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사람의 노”와 “하나님의 의”를 대조하는 뜻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본문의 적용
이미 살펴본 대로 야고보서 본문의 “듣기는 속히 하라”는 일차적인 문맥상의 뜻은 하나님의 도를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속히 듣고 속히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 일에 방해되는 깊은 분노를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다른 부분의 화를 내지 말라는 의미와 연결하면 지체 간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회 안의 지체들을 대상으로 권면한 내용입니다. 또 듣는 대상이 하나님의 도라고만 해석하면, “말하기”의 해석이 애매해집니다. 사도가 아닌 형제들이 하나님의 도를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이 구절을 일반적인 성도교제에서의 보편적인 의미로 해석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끼리 상대를 존중하는 자제로 경청해 주되 자신의 의견은 심사숙고 후에 신중하고도 정중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땅히 성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의 몇 절 뒤에 이런 권면을 덧붙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 말을 빨리 하는 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칫 자기 마음을 속이게 된다고 합니다. 자기가 판단하는 기준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부터 앞서면 잘못된 기준에 따른 말이라 헛된 경건으로 결말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선 아무래도 직분이 높아 경건해 보이는(?)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 그들도 불완전한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판단이 섣부를 수 있습니다. 말을 더디 하지 않으면 자신의 경건에 자기도 속게 되며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해 하나님의 의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말이 이럴진대 섣부르고 잘못된 판단으로 화를 내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또 말이 많이 격하게 나가는 것이 바로 성을 내는 것이지 않습니까?
물론 성도가 의분은 내어도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력이 완전하지 않기에 누가 봐도 확실하게 잘못한 경우에 한해야 합니다. 또 화를 냄이 상대의 잘못만 지적 내지 탓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여 관계가 더 좋아지고 또 본인도 잘못을 고쳐서 더 거룩해지게끔 하는 것만이 근본목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깨달아서 순순히 용인할 수 있고, 또 온전하고 진정어린 사랑이 바탕이 된 분 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경우와 방식으로만 화를 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원수에게 선으로 악을 갚는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장 쉽고 좋은 해결책은 분을 아예 내지 않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논리적인 방책이지 전혀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분을 내지 않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럼 차선책은 바로 분이 날 때에 그 자리와 상대를 당분간 피하는 것입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으려면 상대를 보지 않으면서 다른 일에 정신을 쏟아야 합니다. 시간이 조금 경과하면 분의 세기는 자기도 모르게 약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인도 행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성도는 그 정도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선으로 악을 갚아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은 우리의 일반적 성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 받은 신자에게 성령을 내주케 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표현으로 하면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고, 야고보 사도의 말로는 능히 영혼을 구원할바 도가 마음에 심겨져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마음에 쓴 뿌리부터 제거하여서 자기 심령에 주님의 긍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모든 지체를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섬기려는 열망이 생기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 와 성 내기는 더디 할 수 있습니다.
3/18/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