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20-23 헬라인과 예수님 영광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요?
[질문]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0-23)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배웅하려는 것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요?
[답변]
행간의 의미를 본문에서 찾으라.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가장 먼저 본문(text)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살핀 후에 앞뒤 문맥(context) 상의 뜻의 흐름과 연결시켜봐야 합니다. 뜻이 애매한 구절일수록 본문 내용이 앞뒤로 어디까지 연결되는지 그 범위를 잘 파악해서 비교 분석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복되는 단어나 문구, 비슷하거나 관련성 있는 표현들, 어떤 접속사로 연결되었는지 등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의 원전은 장절의 구분이 없이 저작되었기에 모든 성경은 반드시 죽 이어서 읽으며 묵상 해석해야 합니다.
상기 본문이 말하는 문자적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질문하신 대로 헬라인이 예수님을 배웅하려는 것과 예수님의 답변이 어떤 연관이 되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그럼 본문에는 생략된 행간의 의미부터 개연성과 타당성 있게 추정해서 그 해답을 구하는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몇 가지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헬라인이 왜 예수님을 뵙고자 했는지 그 동기나 목적에 대해선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무리하게 추측할 수는 없습니다. 분문과 문맥에서 확실히 말하는 사실이나 진리부터 먼저 찾아내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은 또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지 않았고 제자들로부터 그런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만 전해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이 왜 만나고자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몰랐습니다. 물론 완전하신 하나님이기도 하신 주님이 복음서의 다른 기사들이 진술하듯이 다른 사람의 생각까지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상황이나 기록을 무시하고 무조건 주님이 헬라인의 뜻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전제하고 해석하면 자칫 무리한 억측이 생길 수 있습니다. 행간의 의미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합리적으로 파악한 후에 주님의 생각은 마지막에 추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셋째는 그렇다면 예수님은 헬라인이 주님을 만나 알고 싶어 했던 사항에 대한 답변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단순히 헬라인들이 당신을 만나서 뭔가 상담하길 원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당신께서 뭔가 말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헬라인 즉, “이방인들마저 당신께 제 발로 찾아온 그 때”가 바로 “당신께서 영광을 얻을 때”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추정은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나 기독교 교리에 대입한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본문이 말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 문학적으로 분석한 결론입니다. 제가 이 홈피를 통해서 일반신자들도 올바른 “성경해석법”을 배워야만, 아니 교회에서 정식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계속해서 강조하는 까닭입니다.
문맥상에 연결된 의미를 추적하라.
본문에서 추정한 행간의 의미들이 앞뒤 문맥의 흐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바로 앞의 12-19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범위를 잡은 것은 작은 동그라미로 구분된 한 문단으로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에 이렇게 작은 동그라미로 구분되는 최소 단위만이라도 반드시 함께 살펴야 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절)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영광을 얻은 후에야 이 일을 깨달았다고 하니까 주님이 받을 영광은 십자가에 대속구원을 이루는 것이라는 뜻입니다.(요한복음서 전체가 일관되게 그렇게 표현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또 주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한 것을 두고 15절은 구약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바로 주님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상기 본문 뒤에 나오는 말씀에서도 예수님이 영광을 얻는 것이 십자가 죽음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12:27,28)
그러니까 주님은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고 당신께서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31,32절)라고 선언하셨고, 요한사도도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33절)고 설명한 것입니다. 요컨대 십자가에 당신께서 매달리심으로 죄에 빠진 인류 구원의 길을 활짝 열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 모두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헬라인이 찾아 왔을 때에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와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반복 혹은 연결되는 말을 찾으면 의외로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장절의 구분 없이 읽으면 앞 문단은 12절 “명절에 온 큰 무리라”는 말로 시작하고, 본문이 속한 다음 문단도 20절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한 저자가 저작한 한 책 안에서, 그것도 곧바로 연결되는 짧은 이야기 속에서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뭔가 독자더러 알게 해주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단순히 반복한 것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문단은 예루살렘 입성 때 있었던 일을 유대인들 위주로 설명했고, 둘째 문단은 그러는 중에 헬라인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첫째 문단은 성중의 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는데 죽은 지 나흘 되는 나사로를 살리는 큰 표적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신학적 의미를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고된 메시아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 앞 문단은 바리새인들이 보인 반응을 설명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요12:19) 지금껏 자기들이 백성들에게 열심히 율법을 가르치고 성전 중심의 경건생활로 인도했지만 온 세상은 표적을 일으키는 나사렛의 한 랍비를 따른다고 시기하며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문단의 첫 구절인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20절)로 이어집니다. 연결해서 읽으면 주님을 만나길 원했던 헬라인 몇 사람들도 바리새인들의 말한 “예수님을 따르는 온 세상” 중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젠 예수님이 왜 헬라인의 면담 요청을 받자 영광을 받을 때 즉,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는지 대충 감이 잡힐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을 영광과 헬라인
성경을 12:12에서부터 33까지(가능하면 50절까지도) 이어서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시길 원했는지 생각해가면서 다시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공사역의 마지막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당신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러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동족인 유대 백성들은 나사로를 살린 것 같은 현실적 축복을 주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예수님을 크게 미워하여 십자가에 죽일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요11:53-57) 주님은 그 모든 사실을 다 아시고서, 아니 이 땅에 오실 때부터 골고다에 오를 계획이었기에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그 의미를 제자들에게 풀어 설명했습니다.
헬라인의 면담 요청을 받자 그 말씀을 시작한 것은 19절에 바리새인이 불평한 그대로 온 세상이 당신을 따를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모든 이방인들도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당신께선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당시 헬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았고(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들은 율법에 따라 유대 삼대 절기(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와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당시의 이방인들의 추악하고 음란한 모습과는 달리 도덕적 종교적으로 아주 의롭고 경건했기에 일부 헬라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이런 “경건한 헬라인”들도 유대 절기에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 올라왔으며 장사나 여행 목적으로 방문한 이방인들도 많았습니다.
헬라인 몇이 주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사역, 기적들에 관한 소문이 직간접으로 이방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나갔음을 입증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김에 예수가 정말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오실 메시아가 맞는지 직접, 필요하다면 표적을 통해 확인하고 또 구원으로 이끄는 천국복음도 배워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주님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고 대신에 십자가 죽음으로 영광 받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삼년간 동고동락하며 배운 제자들도 십자가 대속 구원의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헬라인을 지금 만나 가르쳐주어도 마찬가지이며 오직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서 온 세상에 당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계시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또 다른 보혜사이자 진리의 영인 성령을 보내어서 십자가 은혜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들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서 구원진리를 깨우쳐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가 36절 후반부터 43절에 잘 드러나 있고 36절 중반에 작은 동그라미가 있음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주신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당신께서 영광을 받는데 그 구원의 효력은 당연히 헬라인에게도 미친다는 뜻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7/3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