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7:37-43)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가?
2020 성탄 주일 설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요7:37-43)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고 선포했습니다.(37절) 이어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 즉, 성령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38절) 주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줄이면 “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처럼 내가 가르친 것을 잘 배워서 그대로 준행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 땅에서 랍비로 아주 짧은 생애를 살았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절대적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런 확신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이 참으로 그 선지자로 그리스도가 맞다 아니다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뉘었습니다.(40-43절) 그 선지자라는 호칭은 모세 같은 선지자가 메시아로 오신다는 예언(신18:18)에서 인용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기름 부은 종이라는 뜻인데 마찬가지로 메시아 대한 별칭입니다.
그런데 괄호 친 39절 후반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기에 성령이 아직은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하나님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 죄인들을 대신해 죽어서 인류 구원의 길을 활짝 여심으로써 당신이 영화롭게 되고 또 부활 승천함으로써 잠시 내려놓았던 성자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차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기도를 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신과 동일한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 세상을 책망할 것인데 죄는 바로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요16:9)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면 당신을 믿게 되면 당연히 죄에서 구원 받게 됩니다. 결국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역사해야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온전히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십자가처형 전이라 성령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했어도 온전히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괄호를 쳐서 구별해 놓은 말씀이 가끔 나오는데 대다수의 사본에는 없고 소수의 사본에만 발견되므로 후대에 본문의 뜻을 보완하기 위해서 추가한 것으로 봅니다. 지금 일부 청중이 예수님을 그 선지자요 그리스도라고 시인했지만 성령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온전한 믿음이 생겼다고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가 가장 먼저 동일한 고백을 했지만(마16:16)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후에야 비로소 주님을 순전히 믿을 수 있었지 않습니까? 본문의 일부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이적을 두고 판단했을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메시아가 될 수 있다고 인정만 했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나를 믿으라고 선포하신 말씀은 허공에 뜬 메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영어로 cried out이라고 번역되었듯이 작심하고서 절규하듯이 외쳤는데도 아무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시기 전이라 당연히 아무도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당신께 와서 물을 마시고 당신을 믿으라고 크게 외친 그 까닭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초막절에 물을 바친 뜻은?
먼저 예수님이 명절 끝날 큰 날에 외쳤는데 7장 전체가 이어지는 기록으로 2절에서 초막절이라고 밝혔습니다. 초막절은 출애굽 후의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보호 인도해주셨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서 초막을 짓고 7일간 기거하는 절기입니다. 유대력 칠월 십오일, 양력으로 9-10월 중이라 일 년 동안 경작했던 곡식을 추수하여 창고에 들인다고 수장절이라고도 부르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초막절의 끝 날 아침 예배에는 특별한 행사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실로암 연못의 물을 황금 그릇에 담아서 성전의 남쪽에 있는 물의 문을 통해서 성전으로 들고 갑니다. 그 때에 나팔이 세 번 울리고 백성들은 이사야서 12:3대로 “그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외칩니다.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대제사장 주변을 행진하고 성가대가 찬송 시편인 113-118편을 부르며 하나님께 그 물을 봉헌합니다.
지금 성중의 유대인들이 초막절 절기의 하이라이트 행사를 참관하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성전의 물이 아니라 자신이 주는 생수를 마시라고 초대한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따지면 이는 엄청난 일입니다. 출애굽을 기념하므로 한국으로 치면 일본강점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 행사입니다. 그런 행사에 나사렛 출신의 비주류의 한 랍비가 나타나 자기를 믿으면 여호와가 출애굽 때에 베풀었고 또 올 한해 수확한 곡물보다 더 좋은 은혜를 주겠다고 큰 소리로 외친 셈입니다.
초막절의 끝 날에 하나님께 물을 봉헌하는 것은 광야 방황 중에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서 생명을 보존케 해주신 은혜를 기념하고 모세 같은 그 선지자가 빨리 오시라고 간구하는 의미입니다. 또 올해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히 내려주셔서 풍성히 수확했기에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물을 하나님께 봉헌할 필요가 없고 대신에 자기에게 와서 자기가 주는 물을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그 능력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바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사칭하는 꼴입니다. 그 물이 십자가 구원사역을 완성한 후에 강림하실 성령이지만 성경을 기록한 요한 사도의 설명입니다. 현장에 있던 유대인들로선 황당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며 그 자리에서 신성모독죄로 돌로 쳐서 죽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성경에 일렀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의 특정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서 55:1과 출애굽 때 여호와가 반석의 물을 내신 기적과 에스겔이 메시아가 도래해 세울 새 성전에 성령을 상징하는 물로 가득 찬 환상을 본 것(겔40-44장) 등의 의미를 예수님이 종합해서 반영한 것입니다.
먼저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고 외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당신께서 주실 생수는 배에서 흘러나온다고 했으니 돈을 주고 산 것도 값을 치른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성전에서 경건하게 여호와께 헌정되는 물은 메시아와 상관없이 돈을 지불하고 값을 치러야만 마실 수 있는 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럼 또 아무리 초막절 행사를 엄숙하게 치루고 있어도 지금의 성전이 메시아가 임할 새 성전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생수와 예수님의 생수
그리고 출애굽 때 모세가 반석에서 낸 생수는 돈으로 사거나 값을 준 것이 아니지만 당신께서 주시는 강같이 흘러나오는 생수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조금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열광하여 예수님을 자기들 왕으로 삼으려 시도했으나 그런 움직임을 미리 아시고 예수님은 멀리 피신해버렸습니다.(요6:14,15)
주님은 이미 불치병자들과 나면서 불구자들을 많이 고쳤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렸으나 전혀 그러지 않다가 오병이어 기적을 보자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우선 먹고 마시는 기적이라 현실의 삶을 풍요케 해 줄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기적은 전부 개인에게 은혜를 준 것이었던 반면에 오병이어는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일으킨 기적들도 민족 전부를 현실적 고난에서 구출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자기들 민족 전부를 로마 압제에서 구출해줄 모세 같은 선지자가 될 수 있다고 만장일치로 합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기적 직후에 사람들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열광한 것입니다.(요6:14) 주님은 그들의 요구와 기대를 외면하고 피신했는데도 기어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까지 쫓아온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요6:26,27) 너희가 배부르게 먹을 떡을 얻기 위해서 나를 왕으로 삼으려 들지만 그 떡은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양식이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육체를 보존 유지하는 용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주님은 인자로서 영생하도록 있는 썩지 않을 양식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신을 아버지 하나님이 인 치신 인자라고 칭했는데 하나님의 외아들로서 너희를 구원하러온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6)고 덧붙였습니다. 주님은 마침 생수를 바치는 절기 끝 날에 오병이어 때에 이미 가르쳐준 내용을 이사야서55:1에 비추어서 다시 잘 상기해보라고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한마디로 성전의 물을 마시지 말고 당신이 주는 물을 마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도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받고 싶어 하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이스라엘을 로마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켜서 현실적인 안락과 풍요를 줄 메시아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나 다윗 같은 영웅이 와서 이스라엘을 최고로 부강하게 만들어도 너희들 개인의 영혼이 갈급하고 허망하긴 여전하다는, 아니 더 심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로암 연못의 물을 성전에 바치는데도 그런 잘못된 소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원래 여부스 족이 살고 있었는데 높은 산 위에 있어서 오랫동안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로마의 디도 장군도 AD 70년에 토성을 성과 같은 높이로 반년이나 걸려서 쌓은 후에야 성안으로 진격이 가능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에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원지라고는 성 밖의 실로암 연못뿐이었는데 그 물을 터널을 통해 성안으로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수구를 막아서 성중에 물이 마르게 하여서 성을 정복했습니다.(삼하5:8) 초막절에 그 실로암 연못의 물을 여호와께 바친 것은 다윗의 때처럼 이방에 대한 찬란한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다시 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국력을 가장 융성시켜서 로마처럼 주변 약소국들을 식민지로 삼아 조공을 받았던 솔로몬 왕이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해 아래에서 인생이 돈을 주고 값을 치르며 수고한 일과 그 결과물들이 전부 헛되고 헛되며 헛되어서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백만장자나, 최고 지성인이나 권력자나, 건강을 자랑삼던 자들이나 병균 하나에 완전히 무력하게 당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이뤄낸 현실적 풍요가 자기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생생하게 증명해주었지 않습니까? 불완전하고 어리석으며 죄에 찌든 인간이 행한 것은 아무리 의롭게 보여도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갈급함과 허망함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들은 영원토록 썩지 않고 선하신 하나님만 마련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희가 솔로몬의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을 한귀로 흘러 듣고는 아직까지도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서 너무나 헛된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제사 절차가 경건하고 나름의 선하고 의로운 뜻이 있으며 찬양대와 나팔 소리가 감동을 주어도 그곳에는 막상 하나님이 임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겨우 삼십오 년 정도 지나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도록 무참하게 파괴되었고 그토록 다윗의 영광이 재현되길 바랐던 유다 왕국도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창조주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던 것도 아니며 그분께 감사 경배 드리지 않는 것도 아니며 그 율법대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길 원하였으나 현실의 안락과 풍요를 보장해달라는 목적만으로 여호와를 찾은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종교를 돈을 받고 팔았고 값을 치러야만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껍데기만 남았음에도 매일 제사를 드리고 있으니 스스로 거룩한 양 착각했습니다. 바로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교만의 틀을 깨트리지 못해 마지막 선지자이자 완전하신 대제사장이자 거룩하신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대적하여 십자가에 매다는 사상 최악의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가?
지금 이스라엘의 잘잘못을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과연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고 있는지 엄숙히 물어봐야 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12:3) 분명히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잘 믿고 있으며 기도하고 찬양하며 말씀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때로 눈물도 납니다. 그래서 분명히 성령님이 나에게 임재해주셨고 함께 하심이 믿어집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처럼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소위 말하는 과장 광고를 하신 것입니까?
성령이 강 같이 흘러나온다고 해서 매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초자연적 은사나 능력을 받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일에 한눈 팔지 않고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강은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분수가 아니며 대량으로 쏟아 붓는 폭포와 다릅니다. 항상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유유히 흘러갑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신자를 한 시도 떠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누구와 하던 함께 해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인생에 세우신 거룩한 계획이 달성되게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에 대해 마음을 열고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내 전부를 그 인도에 내어맡기면 가장 먼저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은 소망과 열정을 심어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춰 나올 수 있는 기회와 여건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 성령이 인도해주시기에 바울이 진술한 대로 성령의 열매는 금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갈5:23)
성령은 무엇보다 신자를 향한 악령의 훼방과 궤휼을 막아주십니다. 우리만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막아주시고 죄로 쓰러질 수 있는 기회나 악인까지 미리 차단해 주십니다. 매번 사탄아 물러가라 외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영적 싸움이 아닙니다. 그렇게는 평생을 제대로 싸우지 못합니다. 한두 번 크게 성공할 수 있으나 금방 지쳐 떨어집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는 예수님이 당신께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초대하신 뜻 안에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장의 현실의 안락과 형통만 구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탄이 노리는 바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육신이 건강하고 아름다워지며 현실의 삶에 궁핍과 고난이 없어져서 안락하게 사는 것은 중요한 일로 신자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생의 궁극적인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절대로 보장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반대로 그럴 수 있다고, 그것들만이 이 땅에서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신자에게 자꾸 속삭입니다. 믿음의 출발은 솔로몬처럼 현실적 안락과 풍요를 가꾸는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고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것들로 인생의 목표나 소망으로 삼지 않는 것이 사탄에게 이기는 지름길입니다. 현실의 문제가 자꾸만 큰 부담으로 다가와서 그것 때문에 내게서 안락과 기쁨을 뺏어가기 시작하면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의 거짓말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첫 마디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갈증을 느끼면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내 욕심과 어리석음과 때로 죄에 따라 스스로 행했던 모든 수고와 짐을 내려놓으면 주님이 내 존재와 삶과 인생을 당신이 걸어가셨던 모습대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인도해주시는 것이 바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처럼 나만의 현실적 안락과 풍요만 구하려고 주님을 찾으면 그 강은 당장에 말라버릴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참 된 의미
본문 당시의 예수님의 모습과 그 심정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모든 이가 성전의 경건한 행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뒤에서 예수님이 큰 소리로 외치고 있으나 많은 이들이 아예 외면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했어도 어서 빨리 배불리 먹게 해달라는 목적뿐이었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사렛 출신의 랍비라도 이스라엘의 왕으로도 모실 수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주님이 주실 생수의 강물이 무슨 뜻인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까지도 이제 곧 재현될 다윗 왕국에서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 제자는 당신을 은 삼십 냥에 사기는커녕 거꾸로 팔아버릴 것이며 수제자는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어 이천 년 동안이나 온갖 이적과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계시해주었는데도 이러합니다. 전 세상에 온전한 믿음의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이 땅에서 누가 더 형통 출세하여 맘껏 재물과 권력과 쾌락을 누리고 살 것인지에만 눈이 어두워져 서로 시기하며 다투고만 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주님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겠습니까?
공사역 내내 주님은 온유한 음성으로 가르치고 따뜻한 사랑으로 치유 교제하셨지만 당신의 속마음에 눈물과 한숨이 마를 날이 하루도 없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새벽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실 때에 우셨을 것이며 나사로의 무덤 앞에선 참지 못하고 사람들 보는 데서 통분하며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선 땅의 죄인들을 향한 애통함으로 인해 땀이 핏방울로 변했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는 당신의 물과 피를 세상을 향해 모두 쏟았습니다.
초막절 끝 날에도 아무 반응 없이 허공에 연기처럼 사라질 것을 아시고도 당신께 돌아오라고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중에 진리의 영 성령이 오시면 왜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지 제발 깨달으라는 뜻이었습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승천하여 영광을 얻으신지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사람들이 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더러 당신과 동일하게 그들을 향해 외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주는 주님이 오신 성탄주일입니다. 미국 같이 넓은 땅에선 자식들이 타주에서 직장을 얻어 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성찬을 나누는데 올 한해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뜻입니다. 본문의 초막절 절기의 끝 날인 셈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사태로 함께 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가족이 모이지 못하더라도 올해야말로 가장 성탄절답게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교회와 신자가 회개할 제2의 종교개혁의 찬스였듯이 이번 성탄절도 평생에 처음 맞는 가장 은혜로운 날로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 같습니다.
함께 다시 모이는 것(reunion)이 너무 좋은 까닭은 그동안 떨어져서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싫었거나 기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의 가장 첫째가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탄에 미혹되어서 진노의 심판만 기다리고 있는 죄인들과 화목(reunion)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함께 하지 못해서 슬프고 힘들어지는 것이 가족보다는 사실은 절대자 하나님 그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면, 정확히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일대일로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썩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자의 인생은 더 이상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결코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너무나 비참했던 나 같은 죄인에게마저 성령의 간섭으로 먼저 찾아와 주셔서 예수님을 그 선지자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그분을 믿게 해준 이 기적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이런 설명을 신자들이 설교로 성경공부로 자주 들어서 예사로 듣고 치우지만 단어 하나, 구절 하나에 담긴 그 실제적인 뜻을 잠잠히 생각해보십시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분이 실제로 나를 택하여 나를 만나주셨고 진짜로 한시도 떠나지 않고 내 인생을 당신의 영광 가운데 이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인을 만나서 구해주러 온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러 온 선생이 아닙니다. 해 아래에서 스스로 행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인간에게 구원을 얻는 방안을 가르쳐 주어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죽음만 기다리는 흑암의 구렁텅이에서 실제로 건져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세상 모든 사람의 영혼이 갈급하고 허망해졌습니다. 역사상 최고로 발전한 과학문명이 세균 하나에 힘을 쓰지 못하고 있고 사탄의 농간으로 사람들의 마음까지 갈가리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당신의 외아들에게 전부를 의탁하지 않고는 인류에게 아니 자기에게 아무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가족 없이 보내야 하는 올해의 성탄절엔 정말로 피부에 와 닿을 것입니다.
성령은 성령의 생각 즉,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주십니다. 주님처럼 세상을 향해서 주님과 같은 심정으로 골고다 십자가 앞으로 나오라고 외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귀를 닫고 듣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오히려 그 초대를 거절하는 자들을 볼 때에 너무나 안타까워 주님처럼 애통하는 눈물이 날 것입니다. 배에서 성령이 강물처럼 흘러나온다는 진짜 뜻은 신자가 불신자를 바라볼 때에 눈물이 절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성탄절의 첫째가는 의미입니다.
(12/2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