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6:51-59)
배타적인 절대적 진리
예수님은 당신을 왕으로 삼으러 온 유대인들에게 네 번이나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라고 하면서 구원에 관한 절대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네 번의 진리는 구원의 여정을 드러내는데 지난주에 세 번째 단계까지 순서대로 살펴봤습니다.
그 첫째는 신앙을 가지는 목적이 현실의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려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떡이 바로 예수님이므로 주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마지막 네 번째 구원 진리로 인자이신 당신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즉,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53절)
당신이 살아있는 떡이므로 당신의 살을 먹으라고 선포하는 바람에 유대인들 사이에 한바탕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피까지 마시라고 더 난해한 말씀을 추가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라는 반응을 보였고 결국은 소수의 제자들만 남고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66절) 마치 주님이 의도적으로 점점 더 어렵게 말씀해서 백성들을 쫓아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는 그 중에도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은 인간의 상식 기대 이해를 초월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배타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구원을 주기 싫어하고 당신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시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모든 자연인의 상태가 영적으로 맹인인지라 그분의 말씀을 도무지 못 알아먹는 것이며 사실은 제대로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입장에선 당신의 절대적 진리는, 그것도 가장 중요한 구원에 관한 것은 반드시 온 천하에 대고 선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은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을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세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두 가지 방안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알게 하므로 신학적으로 특별계시라고 칭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지 않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구원 얻지 못한다는 진리를 현 단계에선 제자들마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고 죽으시고 나면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 죽음을 미리 예고한 말씀이라고 쉽게 판단이 될 것입니다. 첫째 특별계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말씀 그대로 실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온 천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여 당신의 택하신 제자들에게 간섭하여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영감을 주어서 사도들로 그 깨달은 바를 성경으로 저작하게 했습니다. 두 번째 특별계시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목회후계자인 디모데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젊은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으니까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켜서 묵상하면 지금 주님이 말씀하신 난해한 구원 진리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는 구약은 물론 주님의 사역과 십자가 사건을 해석해 놓은 신약도 배웠습니다. 말하자면 특별계시를 받았기에 당신의 피를 마시라는 이 말씀이 십자가 대속 구원의 은혜를 믿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피를 마시라는 뜻은?
주님은 지금 하나님이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당신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중입니다. 그럼 청중들로선 이 말씀도 당연히 당신을 믿는 일에 대한 설명이라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문자적으로만 이해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간단한 이성적 분별도 하지 못하고 어렵다고 여긴 것은 바로 피를 마셔야 한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정한 동물이라도 피 채로 먹어선 안 되고 반드시 피를 완전히 빼버리고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율법 규정을 모를 리 없으며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살 것도 모를 리 없습니다. 주님이 굳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식량과 물이 없는 광야에서 모세가 그 수많은 백성들로 매일 만나를 먹고 반석의 생수를 마시게 해준 것처럼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은 일시적 생명만 보존할 뿐이므로 썩는 양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떡을 받아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바로 당신이므로 당신께 나아와 당신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떡을 당신과 일치시켰습니다. 그래서 만나를 먹고 생수를 마셔야 하는 것처럼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수사법적 표현방식을 일치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유대인들에게 떡을 먹었기 때문에 당신을 찾지 말고 그 떡이라는 표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것을 베푸신 이가 누구인지부터 깨달으라고 말했습니다.(26절) 살과 피는 예수님 본인을 직접 지칭하니까 당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깨닫는 것이 당신을 믿는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은 사실상 율법에 의거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문자적 규정대로가 아니라 그것을 제정한 의미와 목적에 빗댄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 그 생명을 당신만이 주관하기 때문에 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창9:4,5) 주님은 하나님이 세상에 주는 생명을 받으라는 뜻을 상징적으로 당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럼 당신이 바로 너희의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셈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사람의 피는 당신을 닮은 형상을 담고 있으므로 절대 살인하지 말라고 덧붙였습니다.(창9:6) 상식적으로 따져 백성들더러 나를 죽여서 피를 받아 마시라고 말할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부 청중도 그 뜻을 정확히 몰라도 영적인 차원일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며 그래서 서로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절)라고 전제했습니다. 참되다는 원어의 의미는 진짜(real)로 거짓 되는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반드시 찾아 먹어야 할 양식과 음료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준 양식과 음료도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하나님이 주실 진짜 양식과 음료를 예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진짜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내려온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셋째 진리였습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근거와 이유 즉, 당신이 왜 하나님이 되시는지 밝힌 것이 네 번째 진리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혹 있거니와”라고 했으니 인간 중에 의인과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절대적 진리는 구원의 여정이므로 그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며 이 네 번째 진리로 구원이 완성됩니다. 말하자면 첫째 특별계시인 예수님과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둘째 계시인 성경을 통해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기 전부를 온전히 맡겨야만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영과 혼과 육의 구원
익히 잘 알고 있는 진리라고 가볍게 여겨선 안 됩니다. 헬라어로 구원하다는 ‘소조’인데 일차적으로 위험에서 구출하다는 뜻이지만 전체를 만들다(made whole) 그것도 완벽하게 만들다(made perfect)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 얻으면 새사람으로 완벽한 제 2의 창조가 일어나서 완전한 의인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현재 우리의 현실적 정신적 영적 상태가 아무리 연약하고 가난해도 또 그런 사실이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온전히 믿기기는커녕 이해도 안 되어도 이 또한 절대적 사실이자 진리입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구원과 특별히 본문의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삼분해서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육체(body)는 때가 되면 어차피 썩어 없어지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믿음과 상관없이 자꾸 병이 들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두 다 죽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뜻도 바로 이것입니다. 광야에서의 모세의 만나나 당신께서 오병이어로 주신 떡이나 오래 두면 어차피 썩어 없어집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58절에서 너희 조상들은 만나를 먹어도 죽었다고 말씀하셨듯이 때가 되면 썩어 없어질 육신만을 위한 용도이니까 썩을 양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어도 육신은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생각할 것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로 이뤄지는 이성 즉, 혼입니다. 혼도 아담이 원죄로 타락한 이후로 함께 타락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만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신 흔적이 이성과 양심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지역 나라 민족 등 인간 공동체마다 고유의 관습, 법률, 윤리, 도덕, 종교 등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함께 잘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며 때로는 죄로 드러날 정도로 왜곡 파괴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많은 나라들이 여자는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며 일부다처제를 법으로 인정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심지어 조상 때부터 확정된 사회적 신분과 계급이 대대손손 이어지는 지역도 있습니다. 모든 재산을 정부가 관리 통제하고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허락지 않는 것이 현재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한 나라입니다. 세계 최고 선진국인 미국이라고 해서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는 보장되었으나 여전히 인종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계층별 정책별로 서로 배척하고 미워하는 갈등이 폭발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인간 세상의 이런 모든 부정적 파괴적 증상은 절대적 진리이자 선이신 하나님을 배척 대적한 인간들이 자기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하자 부부 사이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고 자식 대에 가선 아무 잘못도 하지 않는 친형제를 살인하는 죄로 확대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온전한 선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니까 온전한 선을 도무지 실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으로 창조주 여호와를 믿고 그분의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은 외면하고 문자적으로만 이해 적용했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있습니다. 종교적으로 경건한 행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현실의 복으로 채워줘야 한다고 믿고 있으니 사실은 돈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마저 돈을 조달해주는 자신들의 종으로 비하시켰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에게 모세의 만나를 항상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실존하시고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는 진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는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진리이고 또 그것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기에 특별계시와 대비해서 일반계시라고 칭합니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당신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인간의 영을 성령이 역사하여 새롭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어서 스스로는 절대 바꿀 수 없기에 당신께서 역사하여 당신과 다시 교통할 수 있게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영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면 혼이 그분의 선하신 뜻을 깨달아서 그대로 순종해야 세상을 의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으로 초대
이처럼 구원은 육과 혼은 그대로 둔 채 이뤄집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영이 그분과 다시 교통할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럼 인간 전체를 완벽하게 구원해주지 않은 것 아닙니까? 솔직히 우리가 우리를 보아도 완전한 의인이라고 실감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적인 정체성을 밝히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말씀이라고 선언했습니다.(요1:1)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이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비췄다고 합니다.(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직접 보여주려고 태초부터 있던 생명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백성들이 어두움 때문에 그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1:5)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1:11) 요한은 오병이어 논쟁을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대표적 예로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도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서로 다투기만 했습니다.(52절)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살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되므로 사람이 그런 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럼 주님이 행한 표적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내용과 비교하여서 주님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유추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말을 했다는 사실까지만 인정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영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어두움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요3:19)고 했습니다. 주님에게 만나를 항상 먹게 해달라고 요구한 이유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을 주인으로 삼고 있기에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율법대로 준행해도 그분을 자신의 풍요와 출세를 돕는 조력자로만 여긴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돈을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영이 사탄에게 묶여있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 구원해줄 자를 택하셔서 성령으로 간섭하여 영을 새롭게 해주셔야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썩을 양식만 구하던 자에게 영생할 떡을 먹고 싶다는 소원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게 만들어주십니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말씀도 당신을 믿음으로써 어두움을 벗어버리고 생명의 빛 가운데로 나오라는 초대이자 호소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자에게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약속해주었습니다.(56-57절)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신자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도 신자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거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당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갖고 있다고 두 번이나(47절,54절) 강조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주리지 않는 떡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피니까(35절) 변경 취소 포기는 절대로 없습니다. 중간에 변경 포기 취소된다면 영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영만 새롭게 되었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관계는 하나님 당신께서 완벽하게 세웠기에 절대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대로(39절) 당신께서 마지막 날까지 참 생명으로 채워서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사랑했는데 어떻게 중간에 포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도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58절) 결론 내렸지 않습니까?
비록 설명은 나눠서 했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해부하듯이 영과 혼과 육을 하나씩 따로따로 구원해주는 법은 없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셔서 만나주셨다고 믿는 순간 전인격체가 즉, 당시에 있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가 보기에 여전히 우리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도 심지어 죄 중에 있어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확정한 사랑을 마지막 날까지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굳이 풀어서 말하자면 아직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불신자와 달리 완전한 용서를 받은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완전히 받아들였기에 그분도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대해주십니다. 우리의 육은 마지막 날 거룩하고 신령하게 부활시켜줄 것입니다. 우리의 혼도 천국 가는 그날까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평생토록 거룩하게 가꿔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인간으로써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이미 다 받은 것이며 평생토록 그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기에 신자는 완전한 의인인 것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신자들
주님은 이 말씀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즉, 사역을 가장 오래 동안 중점적으로 행한 본거지에서 가르쳤는데도(59절)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주님께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가장 많은 표적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열두 제자들을 빼고는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인데도 나사렛에서 온 인간 랍비가 하나님 행세 한다고 끝내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떠났지만 영적으로 어리석었다는 핑계는 먹히지 않습니다. 사역의 중심지에서 주님의 이적을 가장 많이 누렸는데도 떠났습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해서 표적인 예수님 당신보다 주님이 주시는 떡에만 흥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로 택한 자를 구원해도 불공평하거나 독선적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의 잘못과 책임이 면제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아니 예수를 처음 믿어 보려했을 때까지도 본문의 유대인들과 똑같이 떡을 더 많이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영적으로 똑같이 비참했던 우리를 주님이 당신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이끌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뻐서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로 당신 안에 거하게 했다는 것은 당신 안에 거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신령하고 거룩한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기쁘고 생명이 살아 넘치는지 실현해 보이라는 뜻입니다. 아니 진정으로 그런 소원만 갖고 있어도 주님이 반드시 그렇게 이끌어 주십니다.
실제로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다면 밖에 거하던 때와 확연히 달라집니다. 바깥에 있는 것이 안에 있는 것보다 너무나 추악하고 헛되다고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일반계시로 충분하다는 사람들에게 특별계시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진리를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해낼 수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세대에 와선 안과 밖의 경계가 너무 모호해졌습니다. 아니 안이 밖보다 더 추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기껏 행한다는 것이 신자들끼리만 산 위에 모여 있어서 빛이 산 밑의 어둠에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세상 속에 뛰어 들어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게 만들지 않으면 교회와 신자의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헛되게 됩니다.
유대인들도 썩을 양식과 영원한 양식이 무엇이 다른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 그들의 목적이 처음부터 틀렸던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행위의 보상으로 현실의 축복만 달라는 속내를 주님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의도대로 응해줄 기미는 전혀 안 보이고 그런 생각을 완전히 뜯어고치라고 촉구하니까 주님을 미워하며 떠난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던 현실적인 떡은 물론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와 현실의 풍요만 구하는 신자들은 이와 똑같은 결과에 봉착한다는 뜻입니다.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참 생명을 뜻합니다. 그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만 생성되고 그분의 사랑으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는 말씀은 바로 그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 완전히 잠기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의인이 된 것이며 그 이후로도 당신의 완전한 사랑으로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신자는 그래서 더 이상 세상의 어떤 것에도 좌우될 필요가 없으며 주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소망할 이유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의인인 것이며 남은 일은 그 완전한 사랑을 주변에 나눠주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우리를 다시 되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었고 피를 마신 체험이 있습니까? 그래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벽하게 회복되었고 마지막 육신의 부활까지 절대 그 관계가 취소는커녕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그분을 자신의 전 인격을 동원해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너무 신령하고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우리의 영과 육은 이미 영원한 구원 안에 들어갔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책임으로 남겨진 혼만 그리스도를 닮게 가꾸어나가다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밖에 있는 사람이 너무나 불쌍하게 보이게 마련인데 어찌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7/25/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