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28,29)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는가?
오병이어 기적 (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예수님이 가르치신 예정론
오병이어라는 엄청난 기적을 맛본 유대 백성들이 이튿날 일찍부터 갈릴리 바다 건너까지 예수님을 쫓아 왔습니다. 주님을 만나자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열심히 찾았다는 뜻을 넌지시 비추었습니다. 주님은 곧바로 당신을 찾는 까닭이 표적을 본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거절 의사를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생명의 떡에 관한 논쟁을 잘 살펴보면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들에게 주는 정말로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제쳐두고 우선 대화가 진전됨에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만 추적해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 40절까지는 백성들이 네 번(25, 28, 30, 34절) 질문하고 주님이 대답하는 방식으로 순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뒤에서 수군거렸습니다.(41절) 그가 요셉의 아들로 출생과 성장과정을 우리가 잘 아는데 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42절)
주님이 그에 대해 부연해 가르치면서 당신의 살을 먹어야 영생할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 사이에 사람이 자기 살을 남에게 먹일 수 없다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52절) 주님이 다시 풀어서 당신의 살뿐만 아니라 피까지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치니까 이제는 제자들마저 그 말씀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다고 고백했습니다.(60절)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인자가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갈 것이며 아버지가 당신께로 오게 해주지 않으면 누구든지 올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63절) 말하자면 지금 당신께서 가르치고 있는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때까지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는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66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인지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돈독하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한 셈이므로 도무지 용납이 안 되고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당신과 함께 계속 남아있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선 제자 중 한 명의 배반을 처음으로 예고하는 것으로 논쟁을 마칩니다.(70,71절)
그럼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단순히 수치만으로 보면 약 2만 명의 군중들이 주님께 열광하여 왕으로 삼으려다 다 떠나고 제자들도 한 명이 배반할 것이므로 열한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열한 명마저 마지막 골고다에선 뿔뿔이 다 도망갔습니다. 삼년 간 동고동락하며 바로 곁에서 천국복음의 가르침을 수도 없이 들었고 온갖 사역과 기적들에 참여했고 스스로 귀신까지 쫓았던 제자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왕으로 모시고 싶었던 백성들의 그 열정은 물론 제자들의 충성 맹세도 한갓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 논쟁은 백성들의 왕으로 삼으려는 요청을 예수님이 거절하는 이유를 밝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갈수록 부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이 어려워서 이해도 못하고 당신을 싫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몰랐을 리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당신께서 그런 순서와 내용으로 토론을 이끌어갔다고 봐야 합니다. 주님의 모든 가르침이 그러하듯이 결국 오병이어 기적과 그에 따른 요한복음 6장 전체의 논쟁도 십자가 대속죽음을 지향하는 예고편이었던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 가장 주목할 사항은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5절)는 말씀을 그 전에 두 번(39,44절)까지 합쳐 세 번이나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정작 가르치고 싶었던 내용은 생명의 떡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믿음을 갖게 될 수 있는지를 계시해주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른 예정 구원에 대해 예수님이 세 번이나 강조하며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예정론을 바울이 각성 개발 시킨 신학 이론 내지 교리라고 간주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살펴본 대로 그 엄청난 오병이어 기적을 직접 체험했고 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다 듣고도 아무도 믿지 못해서 다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지 않으면 당신을 믿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현장에서부터 진리임이 확실히 증명되었지 않습니까?
구원이 예정에 따라 이뤄진다고 해서 인간들의 책임이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랐던 동기가 현실의 풍요를 늘려달라는 것뿐이었기에 예수님이 아무런 항거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죽는데 끝까지 따라갈 바보는 제자들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습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유대인들이 그랬다면 오늘날도 때로 기도해서 초자연적 응답을 받아도 예수를 믿는 동기가 현실 풍요뿐인 신자는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직까지는 무관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구원을 얻는 믿음에 관해 주님은 가장 먼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할 수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27절b) 그에 대해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지 반문했습니다.(28절) 주님의 대답의 전반부만 듣고 반응했지 후반부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간단한 첫 번째 가르침도 제대로 못 알아먹었습니다. 그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믿음은 구원 얻을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하면서 영생할 양식은 하나님 아버지가 인을 치신 인자가 준다고 말씀했습니다.(27절b)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생할 양식을 인자가 주니까 인자에게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 물었습니다. 영생할 양식은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이 완전히 머리에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 예수님이 왕이 되지 않겠다고 거절의 의사를 먼저 보이니까 거의 자동적으로 자기들이 지금 영생할 양식을 얻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있거나 그 일을 부족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부터 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생할 양식인 구원은 당신께서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말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의 그 부족한 인식 수준에 맞추어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영생할 양식을 얻는다고 믿는다면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다시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29절) 당신이 다니엘 선지자가 예언한 인자이고 하나님 아버지가 인치셨다고 이미 선언했습니다.(27절b) 그래서 당신이 성부 하나님의 보내신 독생자 하나님으로서 구원을 주니까 당신만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이 말씀도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분명 인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찾아와서 왕으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온전히 믿지 못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백성들의 영적인 수준은 아직은 이런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 논쟁을 다 지켜보았고 주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았던 제자들조차 온전히 믿지 못했는데 한두 번의 가르침과 기적 체험으로 나사렛에서 온 인간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에서 온 랍비이고 그 아버지가 요셉이고 어머니가 마리아인 줄 잘 알고 있다고 반박했던 것입니다. 자기들과 똑같은 유대인으로 목수를 하다가 지금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랍비로 활동하는 것을 다 지켜봤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가르침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는 차원이 다르게 권세가 있고 베푸신 기적들도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랍비들도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 율법을 그런대로 잘 가르쳤고 때로는 치유와 축사의 능력도 보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최고로 은혜롭고 최고로 능력 있는 랍비에다가 신적인 권능이 유별나다고 인정하는 정도였지 설마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왔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돌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 랍비라면 청중들이 자기를 미워하게 되어서 배척하는 설교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거기다 끝까지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제자들의 대답을 듣고도 이름은 밝히지 않고 한 명이 마귀라서 배반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지금 단계에선 제자들 모두가 혹시 자신인가 곤혹스러웠을 것이며 스승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고는, 나아가 당신이 하나님이 아니고는 도무지 할 수 없는 가르침이자 예언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전도를 하면 예수가 세계적 종교를 창시한 사대 성인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로마에 사형당한 줄 아는데 어떻게 하나님이냐고 반발합니다. 그분이 부활했으니 하나님이지 않느냐는 변론은 아예 듣지 않고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합니다. 부끄럽게도 저에게 전도하려는 모든 신자들에게 제가 그렇게 대들며 반응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무지해서 성령이 간섭해야만 예수님이 독생자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성령이 간섭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해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당신과 똑같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실 것이므로 지금 미리부터 그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당장은 도무지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당신을 떠나더라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죽으신 후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한 자녀에겐 반드시 구원의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믿는 것은 아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예수님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고 쉽게 넘어가선 안 됩니다. 너무나 중요하고 심각한 진리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과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그 의미를 믿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가르치는 교리, 사역, 기적, 심지어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바탕을 둔 대속구원의 교리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를 믿으려면 그 사람을 온전히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신자에게 온전한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지고 신자는 또 그분의 자녀로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개인적인 체험을 온전히 겪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에 대해 여러 객관적 사실에 동의 수긍하는 것은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에 관해 아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주 드는 비유로 쉽게 설명하자면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출신 성장과정 나이 외모 정치적 경력 현재의 정책 등은 미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은 바이든에 관해서 아는 것입니다. 반면에 바이든과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지내서 바이든이 나에 대해서도 알고 언제든 연락하면 만나서 친밀한 개인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바이든을 아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작금 일부 교회에선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만 있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문 식으로 말하면 신자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이신칭의라는 기독교 구원교리를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믿기로 결단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를 믿는 것이 예수님 그분을 믿는 것과 같아져버렸습니다. 교리를 믿는 일은 구태여 성령이 간섭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 구원은 냉정한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낳으니까 아예 부인하고 구원 후에도 혹시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될 있다고까지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정이 바울이 고안한 교리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바울의 회심 과정을 살펴보면 얼마나 잘못된 주장인지 쉽게 판명됩니다. 알다시피 그는 예수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에 최선봉에 선 행동 대장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최초 순교의 현장에서 그 처형을 판결 허락했고 사도행전의 기록을 자세히 살피면 실제 핍박은 그에게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다 주도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대 지경 안에 사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은 성에 안 차서 디아스포라 신자들도 체포하려고 대제사장의 허가증을 받아서 가장 먼저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하늘로부터 비취는 강력한 빛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났습니다. 곧바로 눈이 안 보이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임해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마주치자 사지가 얼어붙었으며 꼼짝달싹 못하고 전적으로 무력해졌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주위 사람의 부축을 받고는 겨우 다메섹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삼 일간 맹인으로 지내야 함으로서 세상 모든 것과는 차단되었습니다. 먹고 마시지도 못할 정도로 죽음과 방불한 상태에 빠졌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기도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지난 행적을 되돌아보고 구약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깊이 묵상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따져보았을 것입니다.
기도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안수하면 눈이 나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은 아나니아에게도 동일한 계시를 환상 중에 보여주었습니다. 아나니아로선 바울의 이전 행적을 잘 알기에 크게 두려웠지만 무릅쓰고 바울을 찾아와 안수해주었습니다. 바울은 곧바로 시력을 되찾음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로부터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는 주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소명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강경파 극보수 바리새인이었고 스스로는 하나님에게 가장 가깝게 서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사렛 이단인 예수를 믿는 신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충성하는 그분의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핍박으로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고 자신도 마지막 날의 심판에서 상급도 가장 크리라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스스로 믿어보려는 시도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로선 자기가 하나님의 가장 반대편에 서있는 가장 큰 대적이라는 생각은 아예 해보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장 가깝게 붙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이야말로 구약 율법에 가장 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일에 가장 충성하는 종이라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다메섹으로 갈 때에 의로운 분노에 휩싸여 씩씩거렸다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바울
그러나 사실은 바울이야말로 하나님과는 가장 먼 거리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흘간의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으로 이전의 자기는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그의 지성적 체계와 도덕과 종교적 신념은 산산조각이 났고 랍비학교에서 배우고 삶에서 실행한 인생에 관한 철학 사상 가치관 모두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불구가 되는 체험까지 겪었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를 그는 온 몸과 정신과 영혼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거의 강권적으로 그의 견고한 심령을 무너뜨리고 당신께서 심어준 믿음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갈 때는 대제사장의 대리인으로 유대사회에선 그보다 높은 자가 없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세상에서 최고로 낮은 자가 되어 땅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고 체계가 형성됨으로써 외부적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렇게 새롭게 바뀐 믿음이 나머지 평생을 주관했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의 삶이 영향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실제로 예수님과 교제 동행했습니다. 그의 선교사역과 수많은 핍박과 두 번의 투옥과 마지막 순교까지 온갖 죽을 고비들을 예수님이 함께 했기에 감당해낼 수 있었던 인생여정이었습니다.
바울에게 그런 회심의 체험이 얼마나 생생하고 극적이었던지 사도행전에만 그렇게 설교한 것이 세 번 기록되어 있고 자신의 서신서에서 네 번이나 회상 했으니 총 7번이나 성경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로선 예수님이 자기를 알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기 위해서 미리 택하여 준비 훈련 시킨 후에 때가 차매 먼저 찾아오셔서 자기를 만나주시고 구원을 주셨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영적 체험을 설교할 때마다 전도할 때마다 진솔하게 고백하였고 그 사실을 성경이 기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정에 관한 교리가 생성된 것입니다. 그럼 예정 교리는 바울과 예수님 둘 중에 누가 확립한 것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그런데도 바울 고유의 것이므로 부인해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또한 영적으로 무지해서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예에 해당됩니다. 예정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넘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부인하는 셈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온전히 알아야만 온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알게 되면 반드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적극적으로 그분을 찬동 경배하는 자와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하는 자 둘로만 나뉩니다. 단순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생명과 죽음 중에 하나로 가르는 반응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반응을 보인다면 예수님에 대해 알아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자기 인생도 차지도 덥지도 않게 그저 그냥 희미하게 사는 중일뿐입니다.
예수님을 진짜로 개인적으로 만난 분은 반드시 바울 같은 극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역사하여서 자기 인생이 뒤집어지는 은혜를 얻었는지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신자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므로 비록 그 실천은 더디고 미숙할지라도 반드시 어떤 모습으로든 변화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물론 체질이 연약하여 그 후에 때로 넘어지고 이전 잘못을 범할 수 있어도 마찬가지로 내주하신 성령님의 인도로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오며 지속적으로 주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극적인 전환이 꼭 초자연적인 모습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경우는 드물고 대체로 성경 말씀을 꾸준히 또 깊이 공부하며 그 말씀의 권능이 살아서 역사해줌으로써 인생이 뒤집어집니다. 은혜로운 설교를 듣고 본인도 예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며 기도생활을 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변화됩니다. 각자 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주님은 당신의 택한 자에게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확실히 깨닫게 해주고 그 은혜 앞에 나머지 인생을 바치도록 인도하십니다. 모든 사람과는 다른 그 사람만의 때와 방식으로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만나주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으로 바꿔주십니다.
교회와 교인이 변하려면?
목회자나 성도들이 예수님을 정말로 일대일로 만났다면 반드시 거룩하게 살면서 주님이 맡기신 소명을 실현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금 교회나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칭찬보다 비난을 더 많이 받고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거듭난 사람들로만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처럼 교회 안에도 예수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사람, 십자가 대속 진리가 어렵다고 여기는 사람,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면 믿지 않겠다고 떠나는 사람들, 예수 믿는 신앙을 윤리 도덕 수준으로 취급하는 사람 등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 교회는 어떻게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의 빛을 성령의 역사 가운데 그 견고한 심령에 비춰지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모든 성경말씀을 십자가 복음에 비추어서 정확하고도 순전하게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교회들이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하여서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여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합니다. 종교적 행사와 봉사에 성도들을 동원합니다. 아무리 의도가 선하고 그 내용이 의로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증거되고 실천되어서 각 개인에게 예수님의 권능과 은혜가 체험되지 않으면 오히려 또 다른 종교적 율법적 멍에가 될 뿐입니다. 교회가 행할 하나님의 일은 양적인 성장이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예수님으로 인해 그 인생을 뒤집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목사부터 작은 예수가 되어있어야만 합니다. 성도들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감에 선도적으로 실제적인 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인생의 극적인 전환을 경험하게 하고 그에 대해서 당당하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관해 배워서 아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나 실제로 만나서 예수님을 알아가지 않으면 배운 모든 것들은 종교지식으로만 남습니다. 교회 안에 도덕가 사회운동가 교회운영전문가 종교인 신학자 등만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교리만 믿은 자들은 신앙생활도 기독교 교리와 의식을 준행하는 것으로만 채워집니다. 혹시라도 교리적으로 잘못 행하고 있는 것이 없는지 그저 염려합니다. 교회 모임에 충성하고 기도와 봉사에 능하고 성경을 줄줄 외우면 아주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교회에서 장로 권사를 맡고 있으나 거룩하고도 신령하게 주일 예배를 드렸는데도 교회 주차장에서부터 부부싸움하기 바쁩니다. 죄송하지만 정말로 예수님 그분과 교제 동행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분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다고 확신하는 신자는 무려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성부 하나님이 그를 미리 아시고 사랑으로 택하여서 구원을 직접 계획하고 주도해준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봐도 너무나 미약하고 어리석으며 천하의 죄수였고 당신과 원수의 자리에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또 그래서 영적으로도 처음에는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요컨대 믿음 자체부터 하나님이 귀한 선물로 우리 심령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닫게 해주신 후에 평생토록 내주하셔서 그 믿음을 지켜주십니다. 세상과 사람과 죄악 앞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큰 은혜이자 권능인지 실감한다면 지금 같이 게으른 모습으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 시간 곰곰이 자신의 믿음이 구원을 얻은 믿음인지 따져보십시오. 예수님에 관해서 믿으면 더 나아질 수는 있어도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쉽게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에 이전과 분명히 사람 자체가 달라졌기에 확실히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 열심히 다니더니 예수쟁이가 다 되었고 장로 집사 냄새가 좀 난다는 칭찬으로 만족하고 그칩니까?
(6/2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