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박해진 예수님의 재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살짝 맛이 간 신자.
만약 여러분의 잘 아는 친구가 간음이나 동성애의 죄에 빠져있어서 크리스찬의 양심상 찾아가 죄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권면했다 치자.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은가? 조크를 한 것도 아닌데 틀림없이 “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일 것이다.
그 반응은 자기가 범한 행위를 충고한 내용에 비추어 잘잘못을 따져 흥분하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그런 권면 자체가 아무 필요와 의미가 없으며 말도 안 된다는 뜻이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케케묵은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자가 오히려 살짝 맛이 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로마서는 11장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관한 내용과 원리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제 12장부터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듯이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다. 맨 처음에 권면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또 결론을 앞에 내는 방식을 자주 쓰는 히브리인들이라 신자가 신앙생활에서 평생의 지표로 삼아야 할 말씀이다. 한 마디로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럼 신자가 어떻게 해야 몸을 산 제사로 드리게 되는 것인가? 초대교회의 신자처럼 순교해야 하는가? 가진 것 모두 희생하여 이웃을 내 몸 같이 섬겨야 하는가? 육체의 정욕을 완전히 제어하여 죄라고는 일절 짓지 말아야 하는가?
성경은 우선적으로 같은 문맥 안의 성경 말씀으로 풀어야 한다. 몸을 드리는 산 제사를 “영적 예배”라고 표현했으니 그 ‘몸’이 일단 육신(肉身)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를 드려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마음의 변화를 받으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권하고 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연결해서 해석하면 이 세대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잘 분별해내어 신자는 세상 사람이 사는 방식과는 정반대로 살라는 것이다.
이 세대의 가장 큰 특징
그렇다면 신자는 무엇보다 현재 이 불신 세상이 돌아가는 풍조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겠는가? 테러나 부정부패 같은 사회적 죄악이 절정에 이른 것인가? 이웃은커녕 부모 형제도 배려하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인가? 섹스나 마약 같은 쾌락을 추구하는 타락이 갈 데까지 간 것인가?
사람이 죄악에 빠진 것은 이 세대만의 특징이 결코 아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한탄하셨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인간이 모인 곳에는 인종, 문화, 종교, 세대의 구별 없이 항상 죄가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신자라고 해서 그 정도만 조금 덜하다는 것뿐이지 크게 예외가 될 수 없다.
처음에 예를 든 그런 권면을 우리 앞 세대에 했다고 가정해보자. 정확한 시기는 다르겠지만 편의상 10년 단위로 끊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한 30년 전에는 그 권면에 대한 대답은 틀림없이 이랬을 것이다. “그 동안 너무 양심에 찔려 괴로웠는데 마침 충고해줘 너무 고맙다. 그런데 나도 고치려고 노력하는데 도저히 내 힘으로는 잘 안 돼.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만날 때마다 나를 야단쳐 줄래?”
약 20년 전에는 또 이런 답을 들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부끄러운데 내 사정을 가장 잘 아는 네까지 이러면 기가 너무 죽잖아?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좋은데 좀 부담이 돼고 우리 관계까지 괜히 이상해지려 하잖아? 우리끼리 만날 때만은 제발 그 문제를 더 이상 터치하지 말아줘?”
그러다 약 10년 전부터 지금까지는, “순전히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자유에 관한 문제잖아? 친구라도 간섭할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무엇이 잘못이란 말이야? 한 번만 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려면 아예 연락도 하지마! 만약 또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당장 너하고도 절교야!”가 돌아오는 답이 되었지 않는가?
이전 세대에선 죄책감의 세기는 점차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간음과 동성애가 죄인 것만은 틀림없었고 당사자는 양심에 찔려 괴로워했다. 지금은 그것을 죄라고 권면한 자가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이 세대의 특징은 죄악으로 타락한 것이 갈 데까지 간 것이 아니다. 간음과 동성애가 공공연히 자행되어서 죄악을 수치로 따져 마이너스 무한대까지 갔다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죄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해졌다. 죄가 죄인 것이 하나도 없다. 죄 자체가 완전히 실종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만 그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모든 죄들이 오히려 인간이 아주 인간답게 사는 표시인양 행세한다. 인권, 자유, 평등 같은 너무나 고상한 단어로 포장이 되었다. 그래서 죄를 짓는 본인도 떳떳하게 자랑하고 주위 사람은 오히려 칭송하는 단계에까지 갔다. 악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고 모든 것이 어느 샌가 선으로 둔갑했다.
그래서 현 세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죄악이 무엇인지 아는가? 공해로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더러 이 땅을 거룩히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창1;28)을 어긴 것이기에 성경적으로도 아주 큰 죄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유일한 죄가 되었다는 데에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빤하다. 혹시라도 이 땅이 황폐해져 굶어죽어 멸망하는 것만은 모면해보자는 뜻이다. 그래서 역으로 따지면 현세대의 유일한 도덕과 가치이자 의미 있는 일은 오직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이런 부분에선 기독교가 가장 급성장한 한국이 오히려 세계 최고가 된지 오래다. 자살율이 세계 최고다. 암이나 교통사고보다 더 많이 죽는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다. 이혼율은 미국을 앞지를 정도다. 돈이 궁하면 신체 장기를 언제든 떼서 판다. 앞으로 자기 자식이 될 난자를 눈도 깜짝 않고 단 돈 몇 십 만원과 바꾸고 있다.
작금 이 세대의 되어져 가는 모든 일들이 오직 잘 먹고 잘 살겠다는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뿐이다. 그것도 "지금 당장(right now), 바로 여기에서(right here), 나 혼자서(by myself alone)" 말이다. 그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은 무조건 선이고 조금이라도 방해되면 몽땅 악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도 어렸을 때의 상처가 도진 것이며 그것도 무의식의 발로로 본인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어졌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사가 보는 관점에 따라 선이 아닌 것이 하나 없다. 절대적 기준이자 선이신 하나님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사람들이 굶어 죽어서 멸망할 것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대신에 하나님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다.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1,2,6)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커녕 이젠 관심조차 없다. 아예 하나님이 없는 양 살고 있다.
하나님이 계실 확률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실 확률이 어느 정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신자에게 너무 쉬운 질문을 하는가? 목사가 질문할 때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니까 하나님이 존재할 확률이 약 50% 쯤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는 너무나 큰 착각이다.
동전을 열 번 정도 공중에 임의로 던지면 대충 앞면이 5번 뒷면이 5번씩 나온다. 동전에는 앞면과 뒷면이라는 부동의 상수(常數)가 있고 그 중 한 면이 나올 변수(變數)는 50%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에는 있는 것도 맞고 없는 것도 맞다는 전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성립할 수 없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할 확률은 100% 아니면 0%의 둘 중 하나다. 이를 혼합해서 적당히 50% +- 오차 몇 %로 말할 수는 절대로 없다.
아직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일기예보에서 오늘은 기온이 영도입니다만 바람이 조금 세게 불어서 체감온도는 영하 5가 된다고 말한다. 물론 그 체감 온도도 사람에 따라 연약한 자는 영하 10도도 되고 체지방이 많고 건강한 사람은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영상 5도로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온도계는 항상 영도를 가리킬 뿐이다.
신자가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90% 이상 확실히 계실 것 같았다가 조금만 나쁜 일이 생기면 50% 이하, 아니 아예 0%로도 떨어지니 어떻게 된 연유인가? 만약 온도계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계측하는 장비가 있다면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기거나 환난이 겹쳐도 그 확률은 정확하게 100%를 가리킬 뿐이지 않는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할 가능성이 100% 라면 그 확률 자체만으로도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또 그분 앞에서는 간음, 동성애, 낙태, 인간복제 등이 다 절대적 죄다. 반면에 하나님이 0%로 아예 안 계신다면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감옥에만 잡혀 가지 않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잘하는 짓이자, 불신자가 자기 믿음대로 사는 떳떳한 짓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의 차이가 이 세대와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를 가르는 근본적인 경계선이다.
그러나 신자가 간음과 동성애의 죄를 범하지 않는 정도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지는 않는다. 완전하신 하나님에게는 어떤 사소한 죄라도 100% 절대적 죄다. 바늘 도둑과 소 도둑의 구분이 따로 없다.
간음과 동성애만 죄가 아니라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 것도 죄다.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다. 형제를 보고 바보라고 욕을 한 것도 살인을 범한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의 죄악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도 죄다. 북한과 아프리카에서 하루에도 수천 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외면한 것도 죄다. 부정부패에 알게 모르게 연루된 것도 죄다. 세상 사람과 같이 쾌락을 좇느라 하나님이 주신 이 짧고도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과 육신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한 것도 죄다.
절대적인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절대적으로 증오하신다. 죄와는 단 한 치도 양보, 타협, 조종, 외면, 포기하지 않으신다. 100% 철저하게 응징하신다. 어느 정도로 응징하셨는가?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모든 죄를 철두철미하게 저주하셨다.
그리고 당신께서 직접 죽으신 이유는 죄와 사단과 사망의 멍에 아래에 눌려서 참 생명과 참 구원을 얻지 못하고 헛되고 헛된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였다. 아무리 죄에 빠져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해도 하나님은 죄는 저주하지만 그 죄인은 사랑하신다.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추하고 연약하며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통회 자복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100% 절대적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다.
예수 믿은 권세
비록 예수를 믿은 후에도 죄가 여전히 우리를 주장할지라도 날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주님께 엎드리면 십자가 보혈의 사랑으로 덧입혀 주신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받지 않고는 단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며 그 절대적인 하나님만 온전히 붙드는 것이 바로 그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주일날 지난 한 주간의 도덕적 잘못을 경건하게 반성하며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거나, 하나님이 혹시 있으면 큰일이니까 보험 들듯이 믿거나, 신앙을 안 가지는 것보다는 가지는 것이 낫고 그중에서 기독교가 제일 나아보여서 믿어 보기로 했거나, 아이들을 교회의 가르침을 받게 하는 것이 그나마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 테니까, 기도를 간절히 하면 잘은 모르지만 뭔가 복을 받을 수 있겠지 하고 교회를 나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과 전혀 관계없다.
물론 신앙의 출발은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현실적으로는 거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렇게 신앙을 시작해도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과 경륜대로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예수를 믿는 신앙의 본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신지라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분이다. 그분은 절대적 선이시오, 절대적 공의요, 절대적 사랑이요, 절대적 진리요, 절대적 아름다움이요... 등등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온전히 그분께만 붙들어 매어야 한다. 그래서 그분의 기쁘신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아야 한다.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은 좋은 일 뿐만 아니라 나쁜 것까지 하나 남김없이 그분께 드려야 함을 말한다. 자신의 더럽고 추하고 치사하고 부끄러운 속을 완전히 까뒤집어서 십자가 보혈로 씻음을 받아야 한다. 부모, 친구, 아내와 남편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나만의 약점, 허물, 상처, 죄악 등을 십자가 앞에서만은 토설해야 한다. 자기가 자신을 바라보아도 쳐다보기 싫고 미워지는 자기의 진짜 실체까지 완전히 벌거벗겨 주님 앞에 내보여야 한다. 그분 앞에서만은 뒤 포켓에 히든카드로 숨겨둔 것 하나 없어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목적, 의미, 가치가 완전히 예수 믿기 이전과는 뒤바뀌어야 한다. 세상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급급하여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목표라면 신자는 눈에 안 보이는 영원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자신의 전부를 그 분께서 온전히 주관하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요컨대 세상 사람과 사는 방식이 정반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완전히 좀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존재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로 이상해야 하는가 하면 휠체어를 타고 치명적 질병으로 오늘 내일 죽게 된 신자라도 단지 예수가 있기에 예수 없는 재벌 회장을 안타까이 여기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해 줄 수 있는 정도로 이상한 자가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이야말로 예수 믿는 기쁨이자 권세의 실체다.
급박한 예수님의 재림
현 세대가 하나님이 아예 없는 양 살아서 죄 자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굉장히 심각하고 두려운 일이다. 인류 역사 이래에 간음과 동성애라는 죄는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죄가 아니라고 한 적은 딱 두 번 밖에 없다. 노아의 홍수 때와 지금이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도 있었지만 그 때는 일부 지역에 제한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죄가 아니라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좋은 일이라고 자랑하고 있는데 유사 이래 없었던 일이다.
그것도 최근 20-30년 사이에, 우리 세대가 눈을 뻔히 뜨고 바라보는 사이에 그렇게 변했다. 교회와 신자가 늘어나는데도 그랬다. 교회마저 십자가 복음은 증거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덩달아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에 최후의 타락이 있었다면 다른 말로 우리 세대에 최후의 심판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이 절대적 확률인 100%로 계시고 또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초림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재림도 100% 확률로 언젠가는 있을 것이다. 초림 때에 예수님은 죄에 대한 대가를 당신께서 전부 담당하셨다.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재림 때에 그분은 어떤 일을 하시겠는가? 사단을 죽이러 오시겠는가? 그 일도 하시겠지만 그것이 근본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현재 세상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고 악인이 행세하며 사단이 설치도록 놓아두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가만히 놓아두시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에게 정말 한 주먹감도 안 되기 때문이다. 언제든 처리하실 수 있다. 대신에 하나님은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단 한 사람의 불쌍한 영혼이라도 더 나오도록 참고 또 참고 기다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악이 만연하다고 해서 당장 심판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죄를 죄로만 여겨도 최후의 심판은 유보하신다. 죄라고 여긴다는 것은 회개할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가 더 이상 죄가 아니고 하나님이 완전히 실종된다면 하나님으로선 더 이상 그런 세상과 인류를 존속시킬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초림 때에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다. 이제 재림 때는 죄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차례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러 곧 오실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계시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이, 심판과 구원이, 멸망과 부활이 반드시 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 나와서 예수를 믿을 필요가 전혀 없다. 주일날 교회 문을 닫아서 손해, 나와서 돈을 바쳐서 손해 이중으로 손해될 뿐이다.
물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을 할 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기가 급박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직도 잘 실감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알기 쉽게 설명을 해보자.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의 아들이나 손자가 남자의 손을 잡고, 여러분의 딸이나 손녀가 여자의 손을 잡고 나타나서 “아빠 엄마 나 이 사람과 결혼할래요.”라고 말할 날이 곧 눈앞에 닥쳤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보지 못하면 여러분의 아들이나 손자가 그런 경우를 겪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많은 미국에 우리가 이민 와서 살고 있다. 실제로 미국인들 사이엔 지금 그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신자의 책임
지금 여러분이 정말 솔직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내가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슬퍼하실지, 안타까워하실지, 한숨지으실지, 분노하실지, 즐거워하실지, 아니면 아예 이미 포기하셨을지를 말이다. 어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따져보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미국에 와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궂은일을 하며 고달프게 살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굶겨서 망하게 하지는 않으신다. 또 때로는 우리가 세상 사람같이 유혹에 넘어지고 죄에 빠진다는 것도 아신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이라도 죄책감에 괴로워 엎드리면 너무나도 기쁘게 받으시고 십자가 보혈로 깨끗케 해주신다.
그것보다 정작 슬퍼하는 것은 따로 있다. 절대적 선이신 당신께서 언제나 어디를 가나 우리와 함께 하심에도 신자는 눈앞에 보이는 환경과 자기 기분에 따라 그분의 존재 확률을 고무줄 당기듯이 제 멋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을 정말로 안타까이 여기신다.
그러나 이 부분도 안심해도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너무나 치사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마저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가 바로 “두려워 말라.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동행하리라.”이지 않는가? 그분의 동행하심을 우리가 오죽 의심을 많이 했으면 계속 다짐하고 또 다짐하셨을까?
그보다는 하나님이 진짜로 신자에 대해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이 아직 하나 남아 있다. 이 세대는 지금 완전히 패역해졌다. 하나님을 부인하다 못해 아예 지워 없애버리고 있다. 그에 비하면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 지금 이렇게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대단한 권세인데도 신자들이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자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과 “도와주세요!”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한 마디로 순식간에 교통할 수 있는 존재다. 그분과 신자는 직통 전화(Hot-line)가 항상 개설되어 있다. 다른 말로 신자란 순간에서 영원까지 이어진 존재다. 이 땅에서 썩어 없어지면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세상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영생을 이미 소유한 영원한 존재가 되어 있다.
나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함으로써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땅에 천국을 실현하려고 보내어진 하나님의 전권대사가 신자다. 이 패역한 세대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예수를 믿는 신자뿐이다.
비록 우리 눈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주위에 펼쳐져 있어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길이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의 일생을 통해 당신께서 이루실 너무나도 크고도 신비하고 영광스런 계획과 뜻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 겪고 있는 힘든 일들도 반드시 그 영광으로 가기 위한 필수코스이자 유일한 길이다. 둘러가는 다른 길이나 지름길이 따로 없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최고 걸작 드라마를 집필하고 직접 감독들 맡으셔서 무대장치, 조연배우, 조명 등 전부 다 완벽하게 마련해 놓고 신자를 주연 배우로 불렀다. 그런데도 우리는 출연료가 적다고, 바로 곁에 있는 조연 배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심지어 무대 장식한 페인트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 무대에 올라 설 생각은 하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바꾸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기가 속한 가정, 직장, 학교, 사회를 거룩하고도 아름답게 바꿔야 한다. 동성애나 간음이 아닌, 정상적인 남녀 간의 사랑을 해야 한다. 그래서 신자의 가정을 정말 불신자들이 샘이 나서 죽을 정도로 아름답게 꾸려나가야 한다.
신자가 거룩한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가꿔 나가며 정말 선한 일을 실천하여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사는 방식이 비정상이며 나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그 죄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우며 생명마저 죽이는 치명적인 것임을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사모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사단의 영에 미혹된 그들로선 자신의 죄를, 자기가 죄인임을 쉽게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들을 정죄 판단하기 보다는 그들 앞에 거룩하고 온전하게 변한, 최소한 변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만이 인생의 참 행복이자 가치임을 확실히 그들로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진짜 신자라면 지금 당장의 일들로 염려 불안해하지 않아야 한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이미 다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굶겨 죽여서 망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 확신 있기에 자기보다 패역한 이 세대를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하게 된다. 10년 20년, 30년 아니 천국을 소망하며 영원을 향해 기도해야 한다. 황폐한 이 땅을 소생시킬 분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 일을 실제 책임지고 있는 자는 절대적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신자뿐이다.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진리다. 그 진리 앞에 정말로 신자면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 교회 봉사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방식, 사고, 태도, 습관, 가치관, 인생관 등이 20년, 30년 뒤에도 아무 변함이 없어도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지 그것을 매순간 생각하며 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곧 오실 것이다. 신자가 바로 서있지 않으면 이 땅은 소망이 없다. 신자는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인식을 되돌려야 한다. 다른 말로 주님 오실 그 때까지 그들과는 정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실제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1/28/2007 아름다운 교회(미국 LA 소재) 주일 예배에서 설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