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더러 살인하라고 요구하는 신자들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어 가로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가 정녕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저가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니 하사엘이 가로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왕하8:9-13)
아람 왕 벤하닷이 중병에 걸리자 심복 하사엘을 선지자 엘리사에게 보내어 그 병이 나을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대답이 이상합니다. 처음에는 나을 것이라고 했다가 또 죽으리라고 합니다. 그것도 두 번 다 “정녕”(진짜로, 확실히)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방금 한 말을 그 자리에서 바로 번복한 것 같습니다. 영원토록 신실하시고 변개가 없으신 하나님이신데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앞에 말한 “나으리라”는 벤하닷이 그 병에서 낫는 것이고 뒤에 말한 “죽으리라”는 왕위를 노린 하사엘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왕이 나았다는 아무런 언급 없이 엘리사를 만나고 돌아간 다음날 바로 하사엘이 왕을 죽였다고 합니다. 선지자에게 물으러 갈만한 중병이면 상식적으로 이틀 만에 낫기 힘들다고 보아 하나님이 “나으리라”고 한 말씀의 신뢰성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입니다.
또 하루 만에 어차피 죽을 운명이면 “나으리라”고 하지 말고 오히려 배반이 있을 것이라든지, 아예 “죽으리라”고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훨씬 더 하나님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로 변개, 실수,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선 “죽으리라”를 “나으리라”에 바로 이어서 말씀하신 이유는 죽기는 죽되 그 병으로 인해 죽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벤하닷의 병을 낫게 해주시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사엘은 돌아가서 왕이 정녕 나으리라는 말만 전하고 바로 이튿날 모반을 감행해버립니다. 그럼 또 다시 의아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간 하사엘이 변경한 셈인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8-30)
벤하닷이나 하사엘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였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자들이 꾀하고 행하는 일은 불의뿐입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를 당장 망하게 하거나 죽게 해서 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자기들 마음대로 하도록 가만히 놓아두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불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만큼 큰 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관해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 그들로선 당연히 자기의 의와 형통만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추구합니다.
하사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나쁜 일, 심지어 “어린 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는” 일을 자행하게 될 것이라고 해도 그 예언에는 눈도 깜짝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이라”는 말에 기분 좋게 돌아가서 자기를 심복으로 대접해준 주군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잔인하게 죽여버립니다. 죄와 의 양쪽 다 눈을 감아버립니다. 삶의 기준과 목표가 거룩은커녕 윤리 도덕과도 전혀 무관하고 오직 자신의 출세만 생각합니다.
분문의 경우 하나님이 스스로 뜻을 번복했거나 인간에 의해 당신의 계획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엘리사에게만 자신의 뜻을 보이고 당신의 일을 하게 했습니다. 벤하닷과 하사엘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교도이자 이스라엘의 대적인 벤하닷이 병들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이 여기시고 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를 향한 “정녕 나으리라”는 말씀은 모든 세대의 불신자들이 당신의 구원과 은혜의 품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애끓는 심정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저가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니.”(11절) 하사엘이 이미 반역할 흉계가 있음을 다 알고 계셨지만 혹시라도 부끄러움을 느껴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마지막 날 밤 가룟 유다에게 바로 대놓고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배반할 것을 지적해 주어 끝까지 회개의 기회를 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사엘은 자신의 의도를 안 들키려고 오히려 “당신의 개 같은 종”이 어찌 그런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겸손을 가장했습니다. 물론 마음속에 혼자만 품고 있던 배반 계획을 정확하게 집어낸 엘리사 앞에 주눅이 들어 그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분명코 이런 신령한 자가 나더러 아람 왕이 될 것이라니 내 계획이 확실하게 성공하겠구나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기를 개에 비유하는 비굴함도 감수한 것입니다.
악인이 자기 탐욕을 채우려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선지자가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흘린 눈물은 아예 마음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쓰레기만도 여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을 묶는 귀찮고 불편한 장애로 싫어합니다. 대신에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는 말에는 짐짓 고개 숙이는 척은 합니다.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고 또 복을 주는 신은 겉으로만 인정은 하되 그때뿐입니다.
악인을 악에 버려두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벌이라면 선인에게 주는 가장 큰 상은 무엇이 됩니까? 선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는 복을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다고 합니다.(엡1:3)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 했습니다..(골1:9-10) 이 약속을 진정으로 믿고 따를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왜 악인은 형통하고 나는 이 모양인가?”가 신자의 끝없는 불만으로 남아 있다면 대체 어찌 된 연유입니까? 하나님만 믿고 그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한 것도 하사엘이 겉으로 겸손을 가장한 것과 같은 뜻입니까? 그는 스스로 세상 왕이 된 반면에 우리는 벤하닷을 죽이는 짓은 안 할 테니까 하나님이 나를 세상 왕으로 삼아달라고 떼쓰고 있습니다. 형통하고 있는 악인을 다 망하게 하고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는 것은 하나님더러 그들을 살인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무엇 있습니까? 차라리 스스로 왕이 된 하사엘이 우리보다 정당하지 않은가요? 그러니 세상이 우리를 위선자 내지 비겁자라고 비난해도 우리가 아무 대꾸도 못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신자도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여 죄의 본성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된 가장 큰 축복은 불신자와 달리 하나님이 마음의 정욕대로 생기는 더러움에 절대로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환난과 징계의 수단도 종종 동원하십니다. 그분과 우리는 영원히 신실한 왕과 백성, 주와 종,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는 당신의 말씀과 뜻과 계획이 그러하듯이 변개나 실수나 잘못이 개입될 여지는 단 한치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이 땅에 살고 있는 신자를 향한 뜻은 세상의 왕으로 삼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신자가 만약 진심으로 그분의 거룩과 의를 구하면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단 한 번도 외면하거나 심지어 지체조차 않으십니다. 구하고 또 구해도 귀찮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기뻐하시고 나아가 우리가 구하지 않았는데도 선한 열매를 맺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일들을 산더미처럼 우리 앞에 자꾸 갖다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왜 악인은 형통하고 선인은 불행한가라는 불평과 의심이 생길 수조차 없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그분의 의를 실현하기에 여념이 없을 뿐 아니라 은혜와 감격을 풍성히 맛보고 있는데, 즉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있는데 그런 불만이 생기는 것은 도리어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아무리 세상에서 갈채와 명예와 심지어 정의가 따르더라도 썩어 없어질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너무 고상하고 심오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내가 한 일을 통해 불신자들이 내 이름을 먼저 기억해주는가 아니면 내가 믿고 따르는 주 예수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호기심을 가지는가를 따져 보면 됩니다. 전자는 아무리 그 이룬 업적이 거창해도 쓰레기이지만 후자는 내가 쓰레기가 되더라도, 아니 되면 될수록 하나님께 더 큰 영광입니다.
아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령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럼 최소한 마음의 정욕의 더러움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케 씻기는 축복이라도 소원하십니까? 혹시 그런 축복을 스스로 외면하거나 잊고 있지 않습니까? 설마 그런 축복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4/28/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