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케 해주신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그 은혜를 실질적으로 갚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그럼에도 목사님들은 교회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하나님 사랑을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자발적으로 교회 일에 기쁨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동원해 의도적으로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자칫 순진한 신자들이 담임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거나 필연적으로 그런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자가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갚을 은혜가 있다면 이웃 사랑으로 갚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 대한 사랑을 받지 않으려 사양을 했거나 하나님 대신에 신자들이 불쌍한 이웃을 도우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는 자입니다.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된 자입니다.(엡1:17-19) 그래서 신자는 개인적으로는 항상 그 은혜 가운데서 행해야 하며, 성도끼리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의 성전을 이루어야 하고, 교회 밖으로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이방인과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이웃 사랑을 단순히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차원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업이 부도나거나 치명적 병에 걸리면 연로한 부모에게 걱정을 끼칠까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효도 잘하는 것으로 칭찬받습니다.
신자는 부모가 신자일 경우는 즉시 알려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그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어쩌면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하나님께 더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문제 해결을 잘 받기 위해 부모에게 기도 부탁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리 부모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주님의 온전하시고 절대적인 사랑만이 인간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어떤 문제든 성도들은 주위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더 큰 은혜가 나타나는데 주위 사람 가운데 부모 이상 가까운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의 이웃 사랑은 단순히 이웃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신자끼리라면 나눠지거나 불신자라면 신자가 대신하여 지고 주님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물론 가슴이 찢어지지만 같은 신자로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큰 특권입니다. 나아가 부모가 기도하는 가운데 자식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 또한 주님께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습니다.
만약 신자의 부모가 불신자라면 어떻게 됩니까? 자식의 고통을 자신의 것 이상으로 더 염려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불신자 부모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아직 믿음이 없는 부모지만 신자 자식이 정말로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해야 합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부모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최소한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신다는 사실만이라도 체험시킬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 자식은 어떤 환난이 닥쳐도 더 담대하여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불신자 부모에게 보여야 합니다.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십자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분들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고난이 닥칠 때에 믿음을 가진 것과 안 가진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부모더러 깨닫게 해야 합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마19:17) 당연히 신자가 세상에 드러내는 선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신자의 어떠한 행동, 말, 생각이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해야만 진짜로 선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관점을 너무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에 계시된 말씀과 그분의 성품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당신의 긍휼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나와서 당신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미 당신의 백성이 된 자는 오직 당신의 은혜와 권능 안에서만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선이기에 인간이, 특별히 신자에게는 그분께 속해 있느냐 아니면 벗어났느냐 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어떤 선도 상대적일 뿐 아니라 인간 자체가 이미 부패된 죄인이라 어떤 인간적 선도 온전한 선이 될 수 없습니다.
효도하기 위해 부모에게 자식의 어려움을 알리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관점에서 본 덕목일 뿐입니다. 불신자들의 사회에선 하나님이 없으니까 부모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고 당연히 부모 사랑만큼 큰 미덕은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매사를 바라보아야 하듯이 불신자는 부모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연로한 부모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면 큰 심려를 끼쳐 드리는 것은 당연히 큰 불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부모 또한 어서 빨리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또 구원 받은 부모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더 많이 맛보며 살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자식의 문제를 함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부모와 자식이 함께 체험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효도이자 사랑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님의 은혜를 함께 누리며 사는 것만큼 신자로서 더 큰 기쁨이 따로 있겠습니까?
신자 부모의 입장에서 역으로 따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염려를 신자 자식에게 솔직히 다 털어놓고 함께 기도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부모의 체면과 자존심과 권위를 내세우거나 자식을 힘들게 하기 싫다는 정이 앞서면 여전히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선, 의리, 정 같은 것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보다 더 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이자 어리석음입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너무나 큰 은혜의 용광로 안에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을 던져 넣어 녹여버릴 줄 아는 것입니다. 자식의 효도가 아무리 소중하고 선해 보여도 부모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서 있는 자식이 그 사랑으로 부모를 초대하는 효도라야 참 효도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신자가 신자끼리, 혹은 불신자와 함께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먼저 받았고 또 어떻게 받는지 아는 신자가 불신자에게 소개하고 나눠주는 방법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종교적인 일로 갚으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보다는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갚으셔야 합니다. 예수 믿은 증거는 언제 찾아가도 기꺼이 반겨주거나 또는 언제든 찾아와서 도와주기를 청하는 그런 이웃의 숫자가 말할 뿐입니다.
10/15/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