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을 편애하는(?) 하나님
마태복음 강해(#164)
http://youtu.be/r9QBDS4JFIU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음)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1-28)
좁은 땅에 머물 수 없는 생명의 말씀
불신자들은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이므로 한국인이 믿을 필요 없다고 반발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구약성경은 현대적 상황과 도저히 부합하지 않고, 윤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내용과 계명이 많으며, 이스라엘만 편애하는 독선적 하나님으로 나타난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에 신약성경만 믿고 따르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일부 신자들도 뭔가 옳은 주장처럼 여겨져 심정적으로 동의하기도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도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하셨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가나안 여인을 향해 당신께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 후에 그 여인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도 그런 점을 더 강조하다가 마지못해 고쳐주신 것 같다. 대화도 비유법이 동원되어서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다. 오늘은 과연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을 편애했는지부터 살펴본 후에, 다음 주에 여인의 믿음의 구체적 내용을 알아보기로 하자.
성경의 어떤 기사가 어려울수록 성경해석의 기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고 성령의 깨우침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묵상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성경해석의 첫째 원리임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제대로 적용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해석한 의미가 성경 전체의 일관된 뜻과 일치하는지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동일하거나 비슷한 내용의 기사와 대조해야 한다. 신학과 교리를 체계적으로 공부해야만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여러 번 통독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특별한 당부를 하셨지 않는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으라”(마28:19)고 했고, 또 “성령의 권능을 입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행1:8)고 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좁은 이스라엘 땅 안에 묶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직접 시범을 보였다. 유대인이라면 둘러가는 사마리아 지역을 가로질러 들어가셔서,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도 새 남자와 사는 한 불쌍한 여인을 만나 속에서 영원토록 샘솟는 생수를 주셨다. 마태복음 8장에서도 본문의 사건처럼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직접 가지 않고 멀리 떨어져 말씀만으로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이방인을 거부하거나, 덜 좋아하거나, 이스라엘을 편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당신의 공사역 3년 동안 야단치며 정죄했던 대상이 누구인가?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같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들이었지 않는가? 그들은 종교적 탐욕 때문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했다. 하나님의 진리에 눈이 어두운 소경이면서 다른 이들마저 소경으로 만들었다. 스스로 교만해져 하나님의 계명보다 자기들이 제정한 유전을 우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유대인들이 최고인줄로만 여겼다. 하나님이 택해준 선민의식에 젖어서 자기 민족만 편애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상 편애란 있을 수 없다. 당신께 진심으로 가르침과 치유를 받기를 소원하며 겸손하게 나오는 자는 한 명도 거부하지 않았다.
숲을 보았으면 나무도 함께 보아야.
성경 전체의 뜻과 비교하는 것은 숲을 보는 것에 해당된다. 성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나무도 함께 봐야 한다. 앞뒤 문맥(context)과 해당 본문(text)의 뜻도 함께 비교하며 따져야 한다. 본문 21절은 주님이 “거기서 나갔다”고 한다. 거기는 갈릴리 지역으로 변방이긴 해도 이스라엘에 속한다. 또 “두로와 시돈으로” 즉 이방지역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 일어난 사건(context) 때문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주님은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고 산헤드린에서 이단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주님은 손 안 씻고 밥 먹는 당신의 제자들보다 말만 앞세우는 그들이 더 더럽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심지 않았기에 마지막 날에 뽑힐 것이라고 선포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미움을 샀기에 앞으로 핍박이 본격화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 했기에 잠시 피신한 것이다.
그들의 박해가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다. 아직 십자가에 오를 때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님이 휴가를 취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려 들어가신 것이다. 주님은 가만히 있어도 신적인 권위가 흘러넘쳤다. 본성적으로 미혹된 영혼을 향한 애끓는 심정이, 긍휼한 마음이 자연히 밖으로 표출되었다.
주님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요, 참 복음이요, 온전한 구원이었다. 그를 보는 자들은 영혼의 찔림이 있고 양심의 가책이 생겨서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그 앞에 엎드리게 된다. 본문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자신을 고쳐달라고 스스로 찾아오게 마련이었다.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 동안 새벽에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 가운데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 외에는 한가할 틈이라곤 없었다.
24절의 말씀은 “나는”이라고 시작하는데, 그 간단한 단어에도 최소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당신만 이스라엘 안에 있겠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나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단순히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한 죄인을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생명이자, 구원을 주시는 당신의 능력이다. 그 복음을 세상의 어떤 강력한 힘도, 인간이 만든 어떤 제도나 법규로는 결코 제한할 수 없다. 세상이 핍박할수록 복음의 전파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염병처럼 더욱 강하게 퍼져나간다.
본문 24절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현실적으로 따져도 당시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스컴이 전혀 발달하지 않았다. 여행도 주로 도보로 다녔고, 기껏 나귀를 타도 그 속도는 사람이 걷는 속도와 같았다. 3년으로 계획된 공생애 동안에 이스라엘 경내만 돌기도 부족했다는 뜻이다.
“나는”이 의미하는 두 번째 뜻은, 예수님이 아닌 자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외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경내를 넘어서 보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가라고 한 것이다.
24절의 의미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말씀하신 그대로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을 유대에 집중할 것이며, 당신이 승천한 후에는 제자들로 유대를 넘어 복음을 전파하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베푸시는 순서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그럼 정작 따져야 할 주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하신 까닭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먼저 택한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먼저 택하신 이유는 수 천, 아니 수 만 가지가 넘을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또 도무지 알 수 없는 당신만의 뜻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구약 성경의 배경에 있는 역사, 관습, 문화 언어, 등을 공부해보면 극히 일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먼저 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상황과 오셔서 행하신 사역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전개된 결과들이 시계 톱니바퀴 맞물리듯 한 치의 오차 없이 연결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제대로 전파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하신 것이다. 그 예비하심이 소름이 끼치도록 너무나 정미하고 정확하여 그런 깨달음만으로도 큰 은혜가 된다.
복음 전파가 신속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게끔 준비하셨다는 뜻만이 아니다. 십자가 복음에 내포된 절대적 진리가 오해되지 않고 명료히 드러나도록 계획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 절대 부인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으로 그분의 고귀한 이름 앞에 무릎 꿇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만 돌리도록 함에 부족함이 전혀 없게끔 하려고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이 명시적으로 밝힌 선택의 이유는 오직 하나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가장 보잘 것 없는 민족이기에 택했다고 한다.
흔히 알듯이 유대인들이 똑똑하거나, 근검절약하며 성실히 살거나,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종교적으로 경건하거나, 영적으로 신령하다는 이유는 단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하나님은 자기 혼자 살려고 아내를 동생이라고 두 번이나 속인 치사한 아브라함을 기독교와 유대교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다. 사기꾼 같은 야곱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로 세웠다. 유대인들이 최고로 존경하는 지도자인 모세와 다윗은 살인자였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인종적 특성과 능력과 우월성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야 한다. 단순히 연약하고 가난해 불쌍하게 여긴 것만도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민족이 불쌍하고 애처롭다. 인간 쪽의 조건과 공로와 자질이 가장 적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절실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없었다면 생존조차 못하는 아주 적은 민족이었다. 혼자만 이방 땅에서 살아남으려고 오죽하면 아내를 동생으로 속여야만 했던 그런 자를 택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후에 어떻게 하셨는가? 그들 중에 임재하시어 직접 동행하셨다. 구름과 불 기둥으로 매일 매일의 삶을 인도하셨다. 세상의 어떤 민족도 경험하지 못한, 아니 알기는커녕 상상도 못하는 엄청난 권능을 보고 누리게 했다. 가장 적기에 가장 큰 은혜를 베푼 것이다.
다신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편애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모르고 죄로 타락하고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은 다른 민족보다 더 엄격하고 매서운 회초리를 들고 징계하셨다. 민족 전체를 다른 나라에 400년 간 노예살이로 고생시키고, 70년간의 포로로 잡혀가게 했다.
결국 아브라함을 “큰 강 건너에서 택한”(‘히브리’ 인이라는 이름의 뜻) 때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께서 어떤 분인지 가르치신 것이다. 당신이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계시하시고 교육, 훈련시킨 것이다. 또 그렇게 한 까닭은 그들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먼저 이끌기 위해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십자가 구원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한 책이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구절이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모든 인간에게 있기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는 책이다. 어떤 인간도 십자가 외에는 그 인생에 소망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책이다.
문제는 십자가 구원의 진리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천 년 전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똑똑하고 의롭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더더욱 그렇다. 왜 아무 자격과 공로 없고 전혀 착하지도 않는데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주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스라엘을 택해 그 십자가 구원 진리를 잘 이해하도록 사전 학습을 시킨 것이다. 비유컨대 십자가 구원 진리가 수학으로 치면 미적분에 해당된다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외의 모든 민족의 영적 수준은 겨우 구구셈을 아는 단계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을 바라보면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어떤 절대적 존재가 창조하여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또 자기 속의 양심이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그럼에도 자기만 높이는 교만과 세상 것을 향한 욕심으로 타락된 영혼이 하나님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분의 거룩한 영광을 썩어질 금수(禽獸)의 형상으로 바꾸어 섬겼다.
자신들이 피조물에 불과한 반면 절대적 존재가 실재한다는 종교적 기본 인식은 있었다. 그러나 쾌락과 죄악을 더 좋아해 하나님을 거역했다. 이처럼 영적 구구셈만 겨우 하는 자들에게 십자가 구원 같은 미적분을 가르치면 아예 귀를 닫아버린다. 교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반면에 하나님께 먼저 선택 받은 이스라엘은 삼차 방정식까지 베운 셈이었다.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했다.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율법을 수여했다. 동물 희생제사 제도를 주어 죄의 삯은 사망이며 피 값으로만 갚을 수 있음도 깨닫게 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동행하면서 당신의 뜻을 그들 역사 속에서 직접 계시했다.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이방인들보다 먼저 깨닫게 하려는 뜻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
그런데 그런 훈련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한 번 혹은 몇 번에 그치는 실패가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때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이천 년간 오로지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스라엘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한 자는 극히 소수로 하나님이 심은 자들이었다. 성령의 권능으로 소명을 주고 붙들어 준 몇몇 지도자들과 선지자들뿐이었다.
하나님이 심지 않은 다른 유대인들은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만 행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다. 하나님이 먼저 가르치려했던 당신의 구원 진리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 땅에서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려는 목적으로 이방의 우상마저 음란하게 숭배했다. 급기야 하나님이 그 수많은 제물에 지쳤고 아무 의미도 없으므로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약 사백 년간 침묵하셨다.
이 훈련이 실패로 끝맺었다고 해서 이스라엘 즉, 인간의 실패였지 하나님의 실패는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할 것까지 미리 아셨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때가 차면 십자가의 은혜로 드러날 것은 태초부터 예비 되어 있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로 실패케 하는데 있었다.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그들을 실패로 이끌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결국 실패하는 모습을 드러나게 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그렇게 큰 사랑과 권능을 누린 민족임에도 당신을 거역하는 너무나도 완악하고 고집스런 모습을 모든 열방더러 보고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사역을 이스라엘 경내로 한정시키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머물렀던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닌가? 유대인더러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게 하려고, 여기서도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의 결과임,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은 가만히 그냥 두면 어려서부터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악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든 이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알게 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거룩해보여도 당신을 심령의 중심에 온전히 모시지 않으면 즉, 인간 혼자서는 철두철미 비참한 실패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절대적 진리임을 밝힌 것이다.
구약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나오면 형통하다가도 그분을 벗어나면 죄악이 만연해지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서야 어쩔 수 없이 회개하는 일들을 마치 고장 난 레코드가 반복해서 돌아가듯이 되풀이 했지 않는가?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들이 얼마나 죄악으로 타락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이 그 중심에서 지워졌고 자기만 최고로 높이는 존재가 되었다. 스스로 자기 의를 앞세우며 하나님을 향해 죽을 때까지 고개를 빳빳이 쳐든다. 만약 내게 죄가 있어도 내 스스로 깨끗케 할 자신이 있기에 십자가는 아무 필요 없다고 반발한다. 착한 자가 천국 가야 마땅하며 나는 그 착한 자에 속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나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이 스스로 자기 편애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심지 않아 마지막 날에 뽑혀야할 유대 지도자들이 그 대표적 예다. 자기들이 정한 규정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우선했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에만 가득 찼다. 이방인을 무시하고 교제도 하지 않았다. 중풍병자, 불구자, 귀신 들린 자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구원 받을 수 없는 자로 매도하고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 혈통, 가문, 민족, 제도, 관습, 종교 등을 편애했다.
인간은 인간만 편애한다. 인간이 만든 것, 인간에게 속한 것 모두를 높이려 든다. 특별히 자기와 자기 주변의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은 다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만드셨다. 그 모두가 당신께 속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것 하나 없듯이 모든 민족을 다 사랑하셨고, 사랑하고 계시며, 사랑하실 것이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당신께로 나오라고 했고, 그러면 그 모두에게 쉼을 주신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차별하거나 편애하지 않았다. 바로 그런 분을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편애해 주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나님이 인류를 다스리는 절대적인 원리
하나님이 이방인을 먼저 선택했다고 해서 이방인을 포기한 것이 결코 아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만나 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하신다. 자기만 편애하는 죄에 찌든 인간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케 씻기시는 방식으로만 세상을 통치하신다.
당신이 택하여 심은 자들이 비록 소수라도 그들을 땅 끝까지 보내어 이방인을 구원으로 초대하게 한다. 비록 구원이 더디고, 구원 받는 자들이 점점 더 적어져 마지막 날에 심판을 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최근에 보듯이 십자가 진리가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없고 배척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십자가 구원을 절대로 수정, 변개, 포기하지 않는다.
당신만의 종교적 고집이나 독선이 결코 아니다. 그 길 외에는 인간이 거룩하고 의롭고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말로 진실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생명력이 넘쳐 활기차고도 풍성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한없는 긍휼을 바라고 당신께 겸손히 나오는 자를 구원키로 하는 까닭은 당신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보호하고 이끌어 왔기에 인간의 체질이 진토임을 인간보다도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스스로 맡겨두었다간 몽땅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기록은 이 진리의 진리 됨을 확증하고 있다.
과학, 지성, 도덕, 인권, 교육, 종교 등등이 지금만큼 진보된 적은 역사상 없었다. 그럼 인간이 그에 맞추어 실제로 의롭고 거룩해졌는가? 정반대다. 지금만큼 인간이 추하고 더러운 적이 없음은 조금이라도 깨인 사람이라면 인정하게 된다. 21세기 첨단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종교적인 명시적 동의만 안했다 뿐이지 현실의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임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거기다 지금 시대는 죄로 타락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평강과 안식 가운데 있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자 사람들 사이의 사랑도 실종되었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하나님이 부인된다. 인간을 만드시고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부인되면 인간의 실존도 함께 부인된다. 요컨대 예수를 부인하면 인간 자체가 부인되고 실종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모든 소망은 사라지고 오직 갈급함과 허무함만 남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만이 인간의 살 길임을 암묵적으로 시인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분만은 거품을 물고 배척하니 현대인들 역시 이천년 전처럼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잃어버린 양들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만 머무는 진짜 이유
자유주의 기독교 진영이 구약은 모순이 너무 많아 인정하지 않고 신약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역사가 아니고 인간의 처절한 실패의 기록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혼자로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 없고 또 인정하기 싫다는 의미다. 내 스스로 얼마든지 의로워질 수 있다는 교만이다.
필연적으로 신약성경 중에서도 산상수훈이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꼽게 된다. 아니 기독교 신앙의 핵심도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다. 산상수훈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보다, 나아가 예수님과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다. 다른 말로 자신의 의로워질 가능성, 자신감, 능력 등을 하나님의 긍휼보다 앞세운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전에서 가슴을 찢으며 하늘을 도무지 우러러보지 못하며 “나는 죄인이오니 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뿐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에게만 진리요, 은혜요, 생명으로 다가온다. 고개를 완전히 땅바닥에 붙이고 벌거벗고 엎드린 자다.
아주 조금, 0.1도라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며 자신의 의나 공로나 자격이나 능력을 앞세우는 자는 십자가를 도무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또 그런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가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본문 24절의 뜻이다.
역으로 말하면 2천 년간이나 십자가에 대한 사전학습을 시켰기에 그들에게 먼저 가야 당신의 구속사역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 오랜 훈련에도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기어이 그곳으로 가야만 하겠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패역을 해도, 아무리 큰 죄악에 빠져 있어도, 끝까지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어도, 당신께선 어떤 위험이라도 무릅쓰고, 아무리 큰 핍박이라도 개의치 않고, 끝까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며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그럼 우리 믿음의 본질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했으니 우리도 그분을 죽기까지 사랑해야 하는가? 물론 두말할 필요 없이 신자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전에 인간은 죽을 때까지도 하나님을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부터 먼저 겸손히 시인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올바른 출발이다. 잠시 빈틈만 보이면 하나님의 경내를 벗어나,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자신의 실상임을 실토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은 겨우 그런 정도밖에 안 됨을 진정으로 깨달아 알고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하나님은 겨우 그런 수준 밖에 안 되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점을 더 깊이 새겨야 한다. 죽을 때까지 죄와 공존하며, 나와 나 주위만 자꾸 편애하려는 그 끈질긴 고집과 교만에 붙잡혀 있는 나를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세상 끝날 까지, 내가 가는 땅 끝까지 붙들고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또 그래서 날마다 자기 자신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소망한다면 주님의 십자가 생명으로 그분이 나를 가득 채워주심을 체험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붙든다면 정말로 참 인간답게 풍성하고 아름답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3/10/2013
오로지 자기밖엔 없으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노라 외치기 일수이고....
자기가 정한 구역을 하나님이 정하신 구역이라 생각하곤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다가가기 싫어하고...
변명은 끊임없고..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는 이스라엘 백성인 제 모습을 봅니다. 그런 자에게 되돌아 오신 예수님은 그렇게나 독선적이며 이기적인 백성에게로 보내심을 받았다 말씀하시며 되돌아 거기 오시사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귀한 말씀으로 십자가의 귀한 사랑앞에 다시 머리 조아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