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자는 순교해야만 한다.
마태복음강해 (#173)
http://youtu.be/DUyzMzB-G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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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예수께서 제자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4-28)
건성으로 읽는 성경
작금 미국과 한국에서 기독교가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한다. 더 이상 부흥하지 않고 쇠퇴하고 있다. 나아가 잘못하고 있다는 비난마저 팽배하다. 그래서 그 원인과 해법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제 개인적 의견은 그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 원인이 신자들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성경을 읽지 않기에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해 가고 있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따지면 지금처럼 성경이 보편화되어서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일이 이만큼 성행한 적은 없다. 그러나 너무 문자적 피상적으로 해석 적용하고 있다. 교리적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본문의 주제나 전후 문맥상의 의미조차 따져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최소한 반드시 지키는 규칙이 유독 성경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의 본문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실천해야 할 사항을 제시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재물에 욕심을 내거나, 세상 쾌락을 좇는 것 같은 나쁜 짓을 억제하려 노력하라는 도덕적인 자기 수양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신앙 연륜이 어느 정도 있는 자는 자신의 현실적 계획과 소원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남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상처, 문제, 고난을 인내하며 이겨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별히 신앙 활동을 하기 위해 세상의 유익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컨대 주일에 매상이 가장 많이 오르지만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게 문을 닫는 것이다. 혹은 불신자 집안에 시집을 간 며느리가 집안 어른의 잔소리나 반대를 무릅쓰고 주일 성수를 지키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런 해석과 적용이 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하는바 본질이나 핵심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성경을 스스로 저작하는 신자
본문 24절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이에 예수께서 제자에게 이르시되.” “이에”는 앞에 어떤 일이 있었고 그것과 연결해서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그럼 그 앞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사건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문자적으로는 정답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야단을 맞았다. 당신께선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현실적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하나님의 일, 특별히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서 해석해야 한다. 본문은 베드로에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던 데서부터 죽 이어지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정확한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서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일부 신자들도 나름대로 문맥에 비추어 이해하려고 노력은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람의 일을 생각지 말라고 야단 쳤기에 자신의 계획과 소원을 부인하라는 뜻으로 적용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막았기 때문에 야단맞았다. 신자들이 자신이 일을 계획하고 소원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막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또 사단에게 속아 넘어 가는 일도 그리 흔치 않기에 문맥상의 합당한 의미가 아니다.
거기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문자적으로도 정확하게 해석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쾌락과 물질과 죄악의 시험 및 유혹에 넘어가려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부인하는 것 자체는 아주 선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가 행하는 것”들이 아닌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다. 요컨대 자기 생각, 말, 행동이 자기 자체는 아니지 않는가?
이처럼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거의 매번 순전히 자신의 선입관, 경험, 지식에 비추어서 당연히 이런 뜻이겠거니 지레 짐작해버리고 치운다. 진지한 묵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성경 따로, 자기 생각 따로다. 엄격히 말해 신자가 성경을 스스로 저작하는 셈이다.
풀어서 설명해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조금 난해한 비유나 말씀을 하신 경우 제자들의 요청이 있으나 없으나 차후에 꼭 설명해주었다.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야단 쳤을 때에 그에겐 엄청난 쇼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도 유대인인지라 율법을 지키며 도덕적 금욕적 생활에 충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영혼의 충족을 느끼지 못하여 하늘의 영원한 진리를 배우고자 그물과 배와 가족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3년간이나 따랐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렇게 꾸짖으며 저주했던 바리새인들에게조차 사단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수제자인 자기에게 직설적으로 사단이라고 야단쳤다. 예수님은 그가 받았을 충격을 다 아시고 곧바로 그 이유를 설명해주셨다. 그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인데 사단에게 일시적으로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제자들이 사단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두 가지 사항을 실천하면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두 가지 사항마저 제자들에겐 어렵게 여겨지리라 보시고 25, 26 절에서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예수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한마디로 당신을 위해 목숨을 잃으라고 했다. 쉽게 말해 죽으라는 말이다. 지금 주님은 “자기 부인”을 풀어서 “목숨 부인”이라고 설명해준 것이다.
다른 말로 재물과 쾌락과 죄악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거나, 그런 쪽으로 생각이 쏠리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를 위해 목숨을 잃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이제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읽고 있는지 이해가 되는가? 전후 문맥도 아니고 본문 안에 아주 명료하게 풀어서 설명해 놓은 것조차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말이다.
히브리어 어법에는 동일한 의미를 표현만 바꾸어 반복해서 말하는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도 사실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실제로 당신을 따르라는 동사의 헬라 원어의 뜻도 같은 방향의 같은 길에 서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면 예수님이 걸어간 길과 똑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 아니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요구는 결국 당신처럼 십자가에서 순교하라는 것이다. 이 땅의 육신적 생명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일시적이며 영원한 가치가 없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 생명과 바꾸라는 것이다.
혹시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모두 순교하라고 요구했다고 하니까 너무 극단적인 해석으로 들리는가? 25절을 다시 보자.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는다고 했다. 여기서 잃는 것은 육신적 생명으로 분명히 죽는 것을 말한다. 또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다면 순교가 분명하다. 제가 해석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다른 의미로 오해될 수 없도록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진정한 제자도(弟子道)
그럼 다시 찾는 목숨은 무엇인가? 감각기관과 장기를 갖춘 육체(body)는 죽음과 함께 없어진다. 그러나 지정의로 느끼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사고를 주관하는 정신(soul)-혼(魂)과, 정신의 이면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역인 마음(spirit)-영(靈), 둘이 합쳐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육체를 잃어도 영혼은 찾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 존재가 종식 내지 멸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인격체는 연속해서 존재하되, 새로운 차원에서 그 존재하는 방식만 달라진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목숨의 헬라 원어 ‘프쉬케’는 숨, 호흡을 의미한다. 그 일차적 뜻은 물론 육체적 생명이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에서 생기와 같은 단어다. 다른 동물의 창조와는 달리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동물과 달리 육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호흡하지만, 그 영혼도 하나님의 영으로 호흡해야만 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인간만은 육신의 호흡이 끊겨도 하나님의 영으로 하는 호흡은 지속되는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임사체험(臨死體驗)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급히 실려와 의학적으로는 심장 박동이 멈추어 죽은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얼마 후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그 때 자기 육체는 병원 침대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데, 그 모습을 자기 영혼이 위에서 보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육신의 자기가 아닌 또 다른 자기가 있다는 것인데, 어느 자기가 진짜 자기이겠는가? 자기 육신을 바라보는 자기 영혼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예수님 말씀이 어차피 썩어 없어질 육신은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 땅에서 자기가 생각하고 소원하며 계획하는 일을 다 버리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 즉, 하나님의 영으로 호흡하는 존재로써 영속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지 온전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에서 목숨의 일차적 의미는 육신적 생명이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문맥상 뜻은 영혼의 구원이다.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이야말로 온 천하를 얻는 것과 비교해도 훨씬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온 천하를 가져도 영생이 없으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 반대로 세상에선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심지어 자기 육신의 생명마저 잃어도 구원을 얻으면 전부를 가진 것이라는 뜻이다.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소유했다면 전부를 가진 것 아닌가? 반대로 그분이 없다면 대체 무엇을 가졌다는 말인가?
바로 이런 확신을 갖고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弟子道)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부른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고 권했다. 교리적으로 배운 것을 붙들고 그대로 살라는 뜻도 있지만, 자기와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참 생명 안에서 실제로 그분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살라는 것이다.
도덕 생활의 두 가지 양상
사람의 행동과 말과 생각은 그 사라의 됨됨이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매사에 자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관이나 주관에 따라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재물, 권력, 명예 등을 추구하는 일을 아예 그만 두는 사람이 있다. 무소유를 주장하며 세속을 완전히 떠나서 철저하게 금욕주의적 삶을 산다. 육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필요한 것으로 연명만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가치관은 세상의 물질, 권력 체계, 사람들 사이에 서로 칭찬하고 높여주는 일 모두를 악하거나 악한 일의 원인이 된다고 보는 셈이다. 자기가 부인하려는 대상이라면 당연히 악한 것이지 않는가?
둘째 부류는 그런 것들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며 선한 목적으로 선하게 활용하면 선한 것이 된다고 여긴다. 대신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처럼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것이 나쁘다고 본다. 그래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절제하면서 중용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이런 두 부류의 생각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또 현실에서 선하고 의로운 열매도 많이 맺는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신자가 행할 윤리적 생활은 그런 것과 차원을 아주 달리 한다.
첫째 부류의 사람이 부인하는 대상은 전부 자기 밖의 것이다. 여건, 환경, 물질, 권력, 사람, 세상 등이 다 나쁘다고 여겼다. 둘째 부류는 자기 속의 욕심과 생각이 나쁘다고 간주했다. 둘 다 일리는 있지만 결정적 하자가 있다. 자기라는 인격체 즉, 자신을 부인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완전히 부인해야할 만큼 자기가 나쁘고 악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정작 부인해야 할 대상은 각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쁘고 악한 것이 바로 네 자신 즉,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했다. 그중에 인간은 특별히 당신께서 심히 좋게 만드셨다. 그런데 인간만이 유일하게 그 하나님을 부인한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부인하는 셈이다. 아니 부인하는 정도를 넘어 하나님을 종으로 부려먹으려 들고, 그러다 자기 생각과 기분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예 원수처럼 여기는 존재가 인간이다.
공중에 나는 새나,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의 섭리에 완전히 순종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금수의 형상인 우상으로 대체해 음란하게 섬겼다. 현대인들도 우상에 절을 하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바로 저도 그런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친다. 그럼 하나님을 자기 주먹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것 아닌가?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이 불어넣어주신 영이 완전히 타락하여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호흡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일은 전혀 생각지 않고 오직 사람의 일만 도모하게 된 것이다. 또 그래서 모든 이가 어려서부터 마음으로 계획하는 바가 모두 악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어 하실 일
사람의 생각도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사람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그 생각이 바뀔 수는 없다. 사람의 밖에서 사람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고 추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 자체가 더럽고 추하기에 사람 안에서 사람 밖으로 나오는 것 모두가 더럽고 추한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바대로 갚는다고 했다.(27절) 이 땅에서 나쁜 짓 하지 않고 얼마나 거룩하고 의롭게 살았는지 보시고 심판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 또한 문맥은 물론 본문 안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연결해서 살펴야 한다.
정말로 자기를 부인했는지 안 했는지 보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었는지 안 잃었는지 따지겠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신자더러 아프리카의 오지에 선교 가서 순교했는지 여부를 보시겠다는 뜻은 아니다. 26절 말씀대로 온 천하를 하나님 그분과 바꾸었는지 점검하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예수 없는 미국 대통령이 되느니, 예수 있는 세탁소 주인이 더 감사해서 진정으로 기뻐하며 살았는지 묻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베드로가 이스라엘이 로마에서 해방될 것을 소망한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그러면 자신의 모든 문제와 고통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리라 믿었던 것이 나쁘며 또 사단에게 넘어간 증거였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인간이 행한 대로 보실 내용도 바로 이 부분이다. 베드로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 사단에 넘어간 잘못임을 깊이 깨달아서 그 깨달은 바에 따라 살았는지 여부를 보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의 밖이나, 혹은 자기 생각만 부인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전체를 부인했는지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도덕적 훈련을 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다. 각자의 약점과 허물을 보완 수정 개발 성숙시키러 온 것도 아니다. 자기 마음의 욕심을 다스리게 해서 선한 일을 하게 하려는 뜻도 아니다. 올바른 사회인으로써 책임을 다하게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이 중요치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다 행한다고 해서 인간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 한에는 인간이 겪는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만큼, 지금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훈련에 열심을 내고 뛰어났던 종족은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롭다고 칭찬 받았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아무 잘못을 범하지 않고 오히려 선만 베풀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의로운 사람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수준 밖에 안 되었다. 무슨 뜻인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철두철미 깨트린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분의 영으로 충만케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지 않는 한에는 어떤 소망도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과 마침
죄에 찌들었던 한 인간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지녔다. 그 사람 자체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몰랐던 이전과 예수를 믿은 이후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본인 스스로는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는 예수를 몰랐던 이전의 자기로 돌아갈 마음이 추호도 없게 되는 것이다. 새로이 교회 생활을 하며 선하게 사는 것에 보람과 의미를 느끼기 때문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서는 더더욱 아니다. 예수가 없는 인생이 얼마나 헛되고 헛됨을 지금 예수와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삶과 비교할 때에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신자라면 참되고 영원하신 예수님의 참 생명과, 더럽고 추하다 못해 죽음의 형벌만 기다리던 자신의 옛 생명을 서로 맞바꾼 일을 자신의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으로 소유해야만 한다. 기독교 신앙은 그래서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제로 못 박아 죽였던 순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자기가 죽더라도 예수님을 포기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그 또한 순교다.
신자는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어떤 사건을 겪고, 누구를 만나든 간에 자기는 죽고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호흡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있어야 한다. 그 존재와 삶과 인생 모두가 순교적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자를 향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고 권면한다. 여기서 제사는 제사를 드릴 때에 태우거나 죽여서 바치는 희생 제물을 뜻한다. 몸을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것이다. 단 “산 제사”(living sacrifice)이기에 항상 순교자적 자세로 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십자가에 죽으려고 오셨다. 그분의 인생도 오직 골고다 언덕으로 향해 가는 여정이었다. 그분이 가셨던 같은 길을 걸어야 할 제자들의 인생길 또한 마찬가지다. 순교로 시작해서 순교로 마쳐야 한다. 죄와 죽음과 사단에 대하여는 자신이 완전히 죽었으나, 하나님의 빛과 생명과 의에는 자신이 완전히 살아있는 그런 인생길이어야 한다.
기독교가 위기를 타파하려면?
본문에는 신자를 향한 심각하고 진지한 의미가 또 있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어 신앙생활을 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내 속의 악한 생각들을 부인하고 도덕적으로 의롭고 선하게 살려는 것이다. 또 내가 현재 아파하는 상처와 문제와 고난들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해결 받으려는 것이다. 이런 의도가 선하다(good) 나쁘다(bad)는 차원에서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옳고(right) 진실한 것(true)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그르고(wrong) 틀린(false)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 부인(否認)을 자신의 욕심이나 행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또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자신의 유별난 고통을 인내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해석은 그들의 평소 가치관과 주관에서 나온 것이기에 부인해야 할 나쁜 대상이 바로 그런 것들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교회는 오래 다녔는데도 정작 부인해야 할 가장 추하고 더러운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인식을 아직도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뜻도 그것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풀어 가르치는 목회자들조차 그런 십자가 복음의 참 의미를 모르니 교인들로선 그럴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을 죽여야만 한다고 여기면, 쉬운 예로 청상과부가 정욕이 생길 때마다 바늘로 자신을 허벅지로 찔러 나중에는 온통 피멍이 드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신자는 당연히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지만 평생토록 율법주의와 도덕주의에 묶여선 안 된다. 또 기도하여 한 가지 고난이 해결되면 또 다른 고난이 닥치게 마련이다.
거기다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과 고통을 해결 받아 평안한 삶을 추구토록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가르치는 바이다. 서두에서 기독교가 위기인 까닭이 성경대로 살지 않기 때문인데, 그 원인 또한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것은 기독교가 가장 기독교다운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연히 기독교가 힘을 잃을 수밖에 더 있는가?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바꿔 말해 신자와 교회 안에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실종되었다는 뜻이다. 기독교, 엄격히 말해 정통 복음주의 개신교 외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외부 혹은 인간의 나쁜 행동(생각도 행동의 하나임)을 고치면 인간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가르친다. 그 안에 하나님은 없다. 인간이 고안해낸 인간 문제의 해결책으로 단지 종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기독교는 다르다. 정말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이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러 직접 오셨고 지금도 신자들과 실제로 함께 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모름으로써 혹은 잘못 알고 있음으로써 오는 고달픔, 허망함, 상실감, 갈급함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새 생명으로 채워주신다. 기독교는 도덕은 물론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정말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참 생명이다.
죄에 찌든 옛 사람의 목숨을 버려야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거짓을 완전히 종식시켜야 진리가 역사할 수 있다. 사단의 속임수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베풀어질 수 있다. 지금껏 자신의 육신적 생명만을 안일하고 풍성하게 하려던 모든 시도와 생각을 완전히 부인할 때에 영과 혼과 육이 조화롭고 아름답게 일치되는 참된 인간이 되어서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인간은 창조 때와 같이 매일 매순간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생기로만 호흡해야 한다. 예수를 몰랐기에 잃었던 그 목숨을 그분의 십자가 보혈에 힘입어 다시 찾아야 한다. 그 목숨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목숨인지라 두 번 다시는 죽음이 없다. 또 그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바이다.
6/2/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