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을 쫓을 수 있는 기도
마태복음 강해(#176)
http://youtu.be/Mt0gnEZE0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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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없음)”(마17:14-21)
간질이 귀신들림인가?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간질병 환자를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었다. 이 사건은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하나 깊이 음미할 만한 여러 이슈를 제기한다. 환자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나 마침 제자 셋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고 부재중이었다. 남아 있던 제자 9명에게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기들은 왜 고치지 못했는지 질문했고 주님은 그 까닭이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답했다.
그럼 믿음이 많으면 간질병 같은 불치병도 고칠 수 있는가? 아버지는 아들의 병을 간질이라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귀신 들린 것으로 진단하고 축사했다. 그럼 간질은 귀신들림의 현상인가? 또 주님은 귀신을 야단치며 쫓아냈다. 그럼 사탄을 상대할 때는 반드시 명령이나 꾸중 같은 형식을 취해야만 하는가? 그 무엇보다 믿음이 많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또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처럼 쉽게 유추될 수 있는 질문만 해도 여럿이다.
실타래가 엉킬수록 겉으로 드러난 올부터 차례로 풀어가야 한다. 우선 동일 사건을 기록한 마가와 누가에 따르면 아이의 아버지는 간질이라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귀신 들렸다고 설명했다. 마태만 간질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간질이 귀신 들린 것과 같은 증상을 보이니까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선 동일한 현상으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현대 의학에선 간질, 정신분열, 조울증 같은 정신질환을 귀신과는 무관하다고 판단한다. 뇌 신경세포의 결함이 주요 원인인 육신적 병으로 보고 치료약의 개발도 상당히 진전되었다.
예수님은 아비의 설명이 있기 전에 환자를 보는 순간 이미 귀신 들렸음을 아셨다.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지 못했는지 물어보는 제자들의 질문에 마태는 믿음이 적은 연고라 예수님이 답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마가는 기도 외에는 이런 류(類)가 나갈 수 없다고만 했다. 만약 이런 종류가 질병을 뜻하면 오직 기도만이 질병의 치료책이라는 이상한 말씀이 되어버린다.
당시에도 의사는 있었다. 큰 외과적 수술도 했다.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도 의사다. 병이라면 “나을 수 없다”고 표현해야 옳은데, 예수님은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은 질병과 귀신들림을 엄격히 구분했다. 또 귀신은 기도로만 쫓을 수 있다고 그 대응책을 제시한 것이다.
귀신은 야단만 쳐야 하는가?
사탄은 거짓의 아비요, 처음부터 살인한 자다. 너무나 사악하고 음흉한지라 대화의 상대가 아니다. 절대로 좋은 말로 타이르며 서로 타협 조정해서 해결책을 모색해선 안 된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했는데 모든 악의 근원인 사탄은 더더욱 단호히 대적하여 무찔러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무조건 야단치며 명령한다고 해서 사탄이 쉽게 쫓겨 나가지 않는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어디서든 활동을 하며 하나님과 방불(彷佛)한 큰 능력을 가진 영적 존재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무저갱에 결박하고 말씀의 검으로 완전히 패배시키기 전까지는 세상을 농간하고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공중권세를 임시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묵인을 받았다.
사탄과 그 졸개인 귀신은 함부로 만만히 상대하다간 오히려 크게 당할 수 있다. 귀신 들린 어린 소녀를 축사의 은사를 가진 목사님을 비롯해 남자 어른 여러 명이 붙들고 힘써 기도해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 뿌리치고 조롱까지 하며 뛰쳐나가버린다.
예수님이 기도 외에는 귀신이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기도만 하면 다 쫓겨나간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는 필수 기본 조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귀신을 야단치며 나가라고 명령할 수 있다. 아니 지금이라도 멸망시킬 수 있다. 반면에 인간 제자들 너희는 그럴 권세와 능력이 없으니 반드시 기도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사탄이 설치도록 묵인하셨다는 것은 세상 끝 날까지 불신자는 물론 신자도 흑암의 세력에 시달리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 동행해주시는 신자에게 완전한 귀신들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성령님이 당신께서 계신 전에 귀신이 동거하게 놓아둘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성령은 귀신이나 사탄과는 달리 신자의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순종과 함께 능력을 발휘하신다. 신자를 로봇이나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자동적 혹은 강제적으로 흑암의 세력을 막아주지는 않는다. 신자는 수시로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당할 수 있는데 믿음의 기도로 이겨야 한다.
나아가 예수님의 거룩한 광채가 불신자의 심령에 비춰지는 것을 막고 있는 사탄의 견고한 진이 파괴되어서 골고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주어야 한다. 요컨대 사탄과 귀신을 하나님은 직접 야단치며 명령할 수 있으나, 인간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께 쫓아내어 달라고 간구해야만 한다.
제자들이 축사(逐邪)에 실패한 이유
본문의 사건에서 따져볼 핵심 이슈는 제자들이 왜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했는지 그 이유다.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말씀하신 상태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그들이 구약성경을 잘 모르고 믿지 않은 탓인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몰랐다는 뜻인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는 것인가?
여러 가지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고 나름대로 다 개연성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기록한 범위를 넘어가버리면 모순이나 무리가 발생할 수 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축사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예수님이 이런 류는 기도 외에 나가지 않는다고 강조할 까닭이 없다. 귀신을 상대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은 것이 믿음의 적음이 겉으로 드러난 실태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귀신을 쫓으려 했을까? 귀신더러 제발 물러가 달라고 살살 빌면서 사정했을까? 아니면 무당 굿하듯이 이상한 주술적 행위를 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결론 밖에 남지 않는다. 예수님처럼 나가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 사건이 있기 훨씬 전에 제자들을 처음으로 전도 여행에 내어보낼 때에(마10:1, 막6:1),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었다. 또 실제로 많은 귀신들이 쫓겨 나가는 이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그 때에도 틀림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쳤지 당신처럼 명령만 해도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 출신인 제자들로선 생전 처음 겪는 신령한 일이라 정말로 순전한 마음과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차츰 그런 이적이 많이 일어나자 귀신이 자기들을 만나면 꼼짝 못한다고 여겼을 수 있다. 마치 자기들 스스로가 그런 큰 능력을 소지한 양 착각했을 것이다. 본문의 사건에 이를 때 즈음에는 예수님처럼 단순하게 명령만 했을 것이다. 귀신들로선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의 명령에는 복종하지만, 자기들이 공중 권세로 조종 농간하고 있는 인간 제자들의 꾸중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말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명령하여 쫓아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면 귀신이 쫓겨 가리라 생각했다는 뜻이다. 이는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제자들은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흉내 내려 들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메시아가 되어보겠다고는 감히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어떤 뜻이 되는가? 예수님을 여전히 큰 능력을 가진 인간 선지자로 여겼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 흉내를 내어 “더러운 귀신아 당장 물러가라! 이 불쌍한 아이에게서 썩 떠나라!” 고함치며 명령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무관하게 자기들이 쫓아내려 한 것이다. 귀신보다 자기들이 더 큰 능력을 가진 양 착각한 것이다.
물론 제자들이 그 당시에는 자기들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명하게는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큰 죄를 범했다. 자기들이 예수님과 동격으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사역을 완성함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자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을 아버지, 나아가 아빠라고 부르며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신분과 특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바로 그런 위치에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타종교인이나 불신자들처럼 무조건 “비나이다!, 비나이다!” 식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빌고 있는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정말로 자기들 기도에 응답해줄 능력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그 상대와 자신이 어떤 관계이기에 그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지 생각도 안한다. 그 신들이 자기 기도를 들어줄 만큼 친밀한 사랑의 개인적인 교류가 없으며 아예 가능하지도 않다.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신인지라, 그저 허공에다 대고 비는 것이다.
신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정반대다. 나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전적으로 선하시며 신자를 향해 온전한 사랑을 품으시고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진짜로 나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분은 단지 세상의 통치자가 아니다. 신자의 모든 행동과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까지 다 아시고 열납하신다. 당신의 자녀가 기도하면 절대로 허투루 들으시지 않는다. 단 한 마디 단어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 신자에게 가장 선하고 유익할 뿐 아니라 당신의 뜻과 영광이 반드시 드러나는 방식으로 당신의 때에 응답하신다. 또 그런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이다.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그랬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16:18)고 하자 귀신이 즉시 나왔다. 또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앉은뱅이를 보고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고 하니 뛰어 서서 걸었다.
사도들은 귀신이든 질병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며 간구 내지 대적했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고 명령하는 형식으로 기도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도들은 능력이 나타나고 우리는 아무리 기도해도 나아지기는커녕 때로는 오히려 악화되기만 한다. 대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초대 교회는 십자가 복음을 확장하고 교회를 설립할 시급한 필요가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더 충만했는가? 물론 그렇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이적을 일으켜 주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지금은 복음의 진리가 확정되고 신약 성경이 완성되어 그런 증표(sign)로서의 이적이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이적은 아주 드물다. 그럼에도 기도를 하면 귀신은 쫓겨 간다.
사도는 귀신을 쫓는데도 오늘날 신자가 그러지 못하는 까닭은 제자들이 본문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우리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흉내만 내려고 했듯이 우리도 사도들 흉내만 내려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라는 문구만 붙이면 역사가 일어나리라 기대 내지 착각한다. 귀신 들린 소녀 하나를 남자 목사님들 여럿이 붙들고 “예수 이름으로 명한다고” 고함지르며 오랫동안 뜨겁게 대적 기도해도 축사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며 뛰쳐 나가는 것이 솔직히 그런 이유일 수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초대 교회 당시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병든 사람에게 바울의 손수건을 얹기만 해도 치유가 일어났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큰 능력을 알게 된 유대 제사장 스게의 일곱 아들들이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행19:13)고 귀신더러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오히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15절),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이기니 다치고 벗은 몸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며 대적하더라도 주님 말씀대로 믿음이 적으면 아무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제자들은 본문의 사건으로 인해 스승의 흉내만 내려했던 잘못을 철저히 회개했다. 자기들에게 귀신을 이길 권세가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주님의 권세에만 의존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면서 하나님이 쫓아내주길 간절히 소원했다.
믿음에 하자가 없는데도 응답 되지 않는 까닭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는 남아 있다. 우리도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믿는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귀신과 사탄은 기도로만 쫓을 수 있음도 안다. 사단과 대화 내지 타협하지 않아야 하고 명령해야 함도 이미 배웠다. 무엇보다 간절히 귀신이 쫓겨 나가고 병이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 그래서 믿음으로 뜨겁고도 간절하게 기도한다. 새벽 기도에 천일 제단을 쌓을 정도로 열심이다. 또 그런 간절함이 있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계속 반복해서 부르며 명령하여 대적한다. 단순히 흉내만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왜 축사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잘 새겨들으셔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반복해서 명령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목적이 오직 그 응답에만 있다는 뜻이다. 죽기 살기로 귀신을 쫓아내겠다는 한 가지 소원만 붙들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기도하면서 응답을 목표로 하지 않는 기도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응답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면 기도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기도하는 목적이 오직 응답뿐이라면 기도하면 모든 기도가 응답되어야 말이 된다. 실상은 그렇지 않지 않는가?
예수님이 귀신을 야단치며 명령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귀신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주님은 사탄과 그 졸개 귀신을 철두철미 싫어하고 미워하며 저주했던 것이다. 사탄은 아담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토록 하여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그 죄악이 확장되게 했다. 인간을 거짓으로 미혹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하게 했으며 거룩과는 거리가 멀고 대신에 무정하며 조급하며 사랑이 실종되게 만들었다. 주님은 죄로 추하고 더럽혀진 인간들을 바라볼 때마다 너무나 애통해 하며 그 악의 근원이었던 사탄을 이가 갈리도록 미워했기에 야단친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은 속으로 통분하시며 우셨다. 크게 화를 내셨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거짓말로 속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하는 바람에 모든 인간으로 죄의 삯인 사망아래 신음케 만든 사탄에 대해 우주를 삼킬 듯한 분노를 발했다. 그와 동시에 공중 권세 잡은 사탄에게 농간을 당하며 온갖 시험과 고난과 죄로 고통 받다가 죽음의 형벌을 받은 나사로를 향한 우주를 덮고도 남을 애통함으로 긍휼히 여기며 속으로 흐느꼈다.
본문 사건에서도 제자들이 단지 당신을 흉내 내어 명령만 하면 귀신이 쫓겨나가리라 기대 내지 착각하고서 자기들 스스로 큰 능력을 가진 양 시건방지게 구는 모습에 주님은 화가 났던 것이다. 동시에 아직도 그 정도의 믿음밖에 안됨을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겼던 것이다. 제자들더러 믿음이 없이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신 까닭도 사탄을 당신의 이름으로 대적하며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기도의 형식은 주님께는 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능력을 자랑하며 단방에 멋지게 귀신을 쫓아내려했던 그 교만한 마음을 보고 믿음이 적다고 꾸중한 것이다.
설령 제자들에게 그런 헛된 교만이 없었다 치자. 정말로 귀신을 쫓아내어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갖고서 명령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귀신을 쫓아내어야 한다는 한 가지 소원만 있었던 것뿐이다. 예수님처럼 귀신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통분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이 적은 모습의 실상이었다.
기도인가 주문인가?
우리의 기도도 순수한 믿음에 근거한다. 정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병이 낫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싶다. 또 그 이름의 권능을 확실하게 믿는다. 그러니 오히려 그렇게 명했는데도 귀신이 꿈쩍도 하지 않으니,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가 이렇게 약할 리 없다고 여긴다. 주님이 사탄에게 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니까 더 안달이 나고 초조해진다. 그러니 더더욱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연발하며 더 크게 더 뜨겁게 소리 지르며 축사 기도를 한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삽살개는 더 소리 높여 계속 깽깽 짓는다. 큰 개를 보고 겁이 났다는 뜻이다. 반면에 쉐퍼드 같이 큰 개는 짓을 때에 소리도 잘 내지 않는다. 으르렁거리기만 해도, 아니 쳐다만 봐도 작은 개는 꼬리를 감추고 도망간다. 울부짖으며 중언부언 하며 기도하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고 갈급한 탓도 있겠지만 믿음이 적은 연고로 여전히 두렵다는 표시일 수 있다.
우리는 기도, 명령, 대적 어떤 형태가 되었든 나의 열심, 정성, 수고는 물론 믿음을 최대한 강하고 크게 끌어올리려 한다. 신자 쪽에서의 종교적 영적 input에 비례해서 하나님 쪽에서의 output이 따르리라, 쉽게 말해 더 많이 응답해주리라 믿고 기도한다.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나 하는 주문이지 신자의 기도가 아니다.
그렇게나 열심히 오래 동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니까, 내 열심과 치성과 믿음이 약한가보다 여기고 더 뜨겁게 찬양하고 평소 보지 않던 성경도 성실히 읽는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신자가 일생 동안 행할 호흡과 같다. 신자의 생명의 근거이자 능력이지 고난 탈출용 비상약이 아니다.
혹시 죄가 기도 응답에 방해가 되었는지 의심스러워서 있던 죄 없던 죄 생각나는 대로 회개하며 기도한다. 회개가 자신이 거룩해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기도 응답을 촉구하는 것이라면 참 회개가 아니다. 또 교회 헌금과 봉사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하겠다는 소원과 헌신이 없다. 단순히 종교적 의무감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겠다는 동기라면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 응답하실 리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신 사역에만 근거하여 기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또 우리의 그 보잘 것 없는 기도에도 그분이 응답해주시는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의와 공로 때문이라는 고백이다. 내 쪽에서의 열심, 치성, 종교적 실력, 선행, 구제, 나아가 믿음조차도 기도 응답의 조건이나 자격이 될 수 없음을 온전히 알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완성한 사역의 의미는 무엇인가? 죄에 대해선 당신이 죽기까지 저주하신다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죄에 빠진 죄인은 당신의 전부를 주기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은 바로 이런 의미를 전제, 내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본문의 제자들의 대적 축사에서 가장 크게, 어쩌면 유일하게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하나님의 심정,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기들 가슴에 품고 기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전부를 잃더라도 그 아이의 영혼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 살려야겠다는 긍휼함이 없었다.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귀신과 그 두목 마귀에 대해 이를 갈며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신자의 기도는 당연히 모든 문제와 고난과 특별히 사탄에 대적함에 가장 강력하며 빠르며 손쉬운 해결책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 모르는 엄청난 특권이며, 또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분명히 하늘에서부터 엄청난 권세가 나타난다.
그러나 반드시 내 자신부터 모든 허물과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바뀌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고 싶은 진정한 소원과 헌신을 갖고 기도해야만 한다. 또 내 주위에 알게 모르게 상처 주었던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며 무엇보다 사탄에 미혹되어 있는 불신자들의 영혼을 정말로 안타깝게 여기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임하도록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나아가 갈수록 사탄의 음흉한 거짓에 속아서 타락해가는 이 세태의 영적 흐름을 통분히 여기며 이 땅을 거룩하게 고쳐달라고 매달려야만 한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사도들을 흉내 내려면 제대로 흉내 내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난 중에 힘들어 하거나 사탄에 미혹된 이웃을 위해 예수님처럼 땀이 핏방울로 변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땀이 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귀신들린 사람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되,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은 정말로 저주하며 대적하고 명령하며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죄는 철저히 미워하되 죄인은 끝까지 사랑하는 그 마음이 바로 믿음이 좋고 많은 것이다. 그 마음이 없으면 믿음이 적은 것이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대적해도 귀신이 물러가지 않는 연고다. 그 반대가 되면 중언부언을 하든, 짧게 속으로 묵상하며 기도하든,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지 않아도, 귀신은 한 길로 왔다가 열 길로 도망가게 마련이다.
6/30/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