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장수보다 영성이 모자란 목사
마태복음 강해 (#168)
http://youtu.be/COwrBErfD5w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16:1-4)
소귀에 경 읽기인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늘로 오는 표적을 보이길 청하자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제자들도 이해 못한 부활예고를 그들이 알아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고 이방 도성 니느웨에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충했던 요나처럼, 제사장 백성의 소명에 충실치 못했다는 꾸중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방인과의 식사교제마저 장로의 유전으로 금하고 있었던 그들이다.
그럼 예수님과의 그들의 대화는 소귀에 경 읽기 식으로 아무 의미 없이 끝난 것인가? 후대의 신자들이 참조하게끔 성경 기록에만 남기려 하신 말씀인가? 하늘의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 것은 메시아임을 증명하라는 뜻인데, 차라리 그들의 입이 쩍 벌어져 아무 말도 못할 만한 큰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낫지 않았겠는가? 꼭 그들을 악하고 음란하다고 야단을 쳐서 그들의 미움을 증폭시킬 필요가 있었는가?
예수님은 당신께서 기적을 보이지 않은 이유를 일종의 말장난(word play)(2-4절)의 방식으로 설명하셨다. 유대인들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증거로 하늘로 오는 확실한 표적을 보이라고 했다. 그에 대해 주님은 너희는 하늘 색깔이 저녁에 붉으면 다음날 날씨가 좋고 아침에 붉으면 날씨가 궂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듯이 이미 천기를 분별하고 있다고 답했다.
즉 하늘의 표적을 계속 보며 잘 분별하고 있는데도 왜 더 보이라 하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동일한 단어 “하늘”를 사용하여 그들의 요구가 얼마나 모순되었는지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 대신에 너희는 시대의 표적은 보지 못하고 있으니 정작 나에게 보이라고 요구할 것은 그것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너희들이 직접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럼 시대의 표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산출해내는 유행, 관습, 제도, 문화, 사상, 종교 등에 공통적으로 들어나는 색깔이다. 그 모든 것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습이나 특성이다. 흔히 말하는 시대정신, 시대사조다. 예컨대 지금을 포스트모던시대 (post-modern)라고 하는데 그 가장 큰 특성은 절대적 진리가 없어진 것이다. 진리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리라고 하면 모든 것이 진리가 된다. 오히려 모든 것이 진리인 것이 바로 21세기의 표적이다.
이 시대의 표적은 어떤 선각자가 창안하고 사람들이 보고 배워서 따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각자의 자유의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결과물이다. 사전에 의논하고 계획하지 않았는데도 공통분모적인 요소들이 자연스레 드러난 것이다. 만약에 모든 이들이 동일한 성향을 나타낸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씨앗(DNA)이 이미 모든 인간 안에 심겨져 있었다는 뜻이다.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하는 이유?
유대인들이 하늘의 표적은 보면서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늘은 색깔로 나타나고 문화나 관습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다. 시대의 표적도 분명히 눈에 보인다.
남자도 귀걸이 코걸이 하고 여자도 몸에 문신하는 유행은 보이지 않는가? 미국에서 동성결혼의 합법화가 대세가 되어가며 북구라파에선 마리화나가 담배처럼 자유롭게 판매되고 있다. 지난 주 뉴스에 따르면 프랑스에선 낙태를 의료보험에서 지원해주기로 했다고 한다. 911이나 보스톤 테러의 끔찍한 참상은 볼 수 있고 그 배경과 이유와 파장 등을 분석하는 기사를 접할 수 있다. 한국에선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입시철만 되면 교회마다 특별새벽백일기도 플래카드들이 얼마나 크게 걸리는가?
예수님이 나중에 보여주겠다는 시대의 표적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와 아리마대 요셉의 텅 빈 무덤의 모습으로 천하 만민이 보게 하셨지 않는가? 날씨는 한 가지 자연현상이라 보기 쉽다는 것과, 시대의 표적은 여러 사회적 양상을 종합해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 어렵다는 차이 뿐이다.
5병2어의 기적 때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와서 2만 명이나 되는 유대 대중들이 손을 안 씻고 떡을 뗀 것을 문제 삼았다. 유대인 랍비의 자격 여부를 따지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메시아 구원의 방식과 그 의미를 오해하고선 억지로 세속 왕국의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최소한 예수님을 모세 같은 선지자로 인정했다. 예수님이 보인 모든 이적들이 하늘로 오는 표적으로 받아 들였다.
또 7병2어의 기적 직후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이방인과 식사 교제한 것을 문제 삼았다. 이젠 예수님의 유대인 신분까지 의심하려 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어서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취급했던 이방인들조차 불구자들이 치유되고 신령한 떡을 받아먹으면서 기이히 여기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 자기들이 목격한 이적들을 하늘로 온 표적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본문 3절에 천기(天氣)라고 한자말로 번역되어 마치 하늘의 신령한 기운 즉, 영계의 움직임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원어는 단순히 하늘의 외적 모습을 뜻하는데 저녁노을과 아침노을을 보며 날씨를 예상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알고 있듯이 누구나 경험을 통해 쉽게 터득한 원리다. 특별한 지성과 영성이 따로 필요 없다. 또 농부나 우산 장수에게나 필요한 표적이다.
지금 예수님을 찾아와 하늘의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 자가 누구인가? 오늘날로 치면 목사 같은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장관 같이 정치 지도자인 사두개인들이다. 시대의 표적을 잘 분별하여서 농부나 우산 장수를 가르치고 깨우쳐서 바르게 인도할 책임이 있는 자다.
따라서 주님은 그런 지도자들이 기껏 농부 수준의 분별력 밖에 갖지 못했다고 말한 셈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예수님을 하늘로 오는 선지자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으니 농부보다 그 영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참으로 신랄한 풍자다. 항상 그러하듯이 유대지도자들은 혹을 떼러 왔다가 더 큰 혹을 붙이고 돌아갔다.
대중이 예수님께 열광하는 이유?
유대인들이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이에게 당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성향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로서 지금 무리들이 왜 예수님을 열렬히 추종하는지 그 이유를 진지하게 숙고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병을 낫게 하고 배 불리 먹게 해주었기 때문인가? 물론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병자를 다 고쳐준 것도 아니다. 5병2어는 유대인에게, 7병2어는 이방인에게 단 한 번만 베푼 이적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집회에 와서 당신의 말씀을 듣느라 끼니를 굶게 되어서 주최하는 입장에서 한 끼를 대접한 것이다. 대중이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예수님이 자의로 은혜를 베푼 것이다.
예수님이 베푸신 모든 기적들을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의미와 직접 간접으로 가르쳤던 내용이 무엇인가? 바로 손을 안 씻고 밥을 먹어도 하나님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고 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또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가축을 건져주는데 하물며 인간 병자는 더더욱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방인이 저주를 받은 것도, 구원 밖에 있는 것도 아니기에 얼마든지 식사 교제를 해도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더 거룩하지도, 이방인이 더 악하지도 않으며 모두가 하나님이 지으신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규정들을 잔뜩 만들어서 사람들의 어깨에 짐으로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누구든지 당신께 나오라고 초대했다. 주님께 배우고 당신의 멍에를 지면 마음의 쉼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셨다. 실제로 유대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달리 권세가 있다고 느꼈다. 그들의 가르침은 마음에 부담만 지워졌지만 예수님께 배우고 나면 마음이 시원케 됨을 분명히 느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왜 그런지 그 이유와 또 그렇게 된 과정은 정확히 말로 표현은 못하지만 기쁨과 평강이 마음에서 저절로 샘솟았다. 주님이 풀어주는 성경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영혼에 울림이 있었다. 자꾸만 예수님께 더 듣고 배우고 싶고 그분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당시는 로마가 세계를 평정해서 전쟁이 없는 일종의 평화시대였다. 로마에 반란만 하지 않으면 식민지 고유의 문화, 관습,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경우는 로마와 성전에 이중으로 세금을 내어야 했으므로 먹고 사는 문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듯해졌다.
거기에 조금만 잘못하면 종교적 멍에로 묶이게 되었다. 성전에 제사를 드려야만 장로들로부터 죄인이라는 선고를 면할 수 있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유일한 민족인데도 성전 제사를 드리면 영혼의 눌림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생겼다. 대체 이 고달픈 심령에 언제 기쁨이 회복될지 막막했다. 모든 이들의 가슴이 완전히 황폐하고 갈급해져 있었다.
그들의 한숨을 듣고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할 지도자들이 성전에 장사치와 환전상을 들끓게 하여 거룩한 전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다. 또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누리며 자기들 배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하다고 야단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악하고 음란하다는 것이 윤리적으로 추악하고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추하고 더러운 모습은 원죄로 타락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늘의 색깔은 보아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것이다.
날씨가 좋을지 궂을지 분간할 수 있는 까닭은 자기 영업 이익에 연관되는 일은 구태여 누가 안 가르쳐주어도 스스로의 경험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자기들 기득권이 줄어들까 염려해서 어제의 앙숙이 오늘의 동지가 되어 손을 잡고 나타난 것 아닌가? 어떻게 하든 예수님으로부터 꼬투리를 잡아서 메시아가 아님을 무리들에게 선포하고 자기들 이익을 지키려는 것이다.
하늘의 표적을 보이지 않은 이유?
예수님이 그들 눈앞에서 입이 딱 벌어질만한 큰 기적을 보이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은 아무리 크고도 신기한 기적을 보아도 자신의 이해타산과 연관되지 않으면 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은 나사로 비유에서도(눅16장)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간증을 해도 심판에 대해 두려워하기는커녕 그 사후세계의 실존조차 믿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실제로 관에 누워서 무덤으로 향해 가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예수님이 살려낸 이적을 이들도 들었을 것인데도 다시 메시아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 기적은 인간의 능력이 수십 배로 늘어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며 인간이 행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생명의 주인이 아니고는 아예 일으킬 수 없는 기적이었지 않는가?
5병2어, 7병2어의 기적은 또 어떠한가? 초대형 copy machine에서 떡을 복사해 낸 것이 아니다. 떡을 만들려면 씨앗을 심어서 경작하고 추수하여 가루로 정제한 후에 반죽하고 구워야 한다. 최소한 몇 달의 시간과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생명을 가진 씨앗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모든 과정은 물론 씨앗도 없이 말씀 한 마디로 떡을 그렇게나 많이 만들어 나누어주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고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진지하게 따져보면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인하기가 더 어렵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예수는 하나님이었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없다. 지성이 뛰어나고 도덕성과 종교성이 우월한 사람일수록 기독교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나 믿는 비합리적인 종교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성적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더 비이성적이다. 지금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로 오는 표적을 수없이 보고도 다시 또 보이길 요구하니 자기들 손바닥으로 그 큰 하늘을 가리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주도하는 힘은 그 잘난 이성과 지성이 아니다. 자기만 배부르고 세상에서 자기를 풍성하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만 움직이게 만드는 씨앗이 인간 안에 심겨져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시대의 표적이 안 보이거나 보지 못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 마음 안에 참 하나님을 알고 그 뜻대로 따르려는 마음은 없고 자기만 앞세우는 DNA가 심겨져 있기에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우상 신들을 자기 일에 하인으로 부려 먹으려드는 것이 바로 모든 인간이 모든 세대에 보이는 표적이다.
자기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난리가 난다. 모든 이가 하나가 되어 천국 잔치 같았던 5병2어, 7병2어의 기적에도 손을 씻지 않고 또 이방인과 식사교제 했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지 않는가? 반대로 자기에게 손해가 안 되면 어떤 중요하고 시급한 일에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한다. 북한의 인권과 자유가 말살되고 어린 생명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남한에선 부부가 힘을 합해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남편은 외제차를 아내는 명품 핸드백을 사는 일에만 혈안이지 않는가? 참으로 불행하게도 신자들도 크게 예외가 아니다.
바꿔 말해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그들을 죽였다가 다시 살려내어도 당신을 믿을까 말까라는 것이다. 설령 그렇게 해서 그들이 믿어도 그것은 무서워 복종한 것이지 그 안에 진정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결코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만 보여준 이유?
그런데 말이다. 예수님이 보여준 요나의 표적은 어떤 것인가?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는 표적이다. 자기가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과 그 심판을 잘 믿지 않는 것이 인간인데, 예수님 당신의 입으로는 죽은 자가 살아나 간증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한 바로 그 표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당신이 내뱉은 말씀을 당신이 부인하는 것이다.
침례 요한이 옥중에 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예수에 관한 소문이 영 신통찮았다. 이스라엘을 회복하러 온 구세주라면 이스라엘의 유력자들을 만나 로마를 무찌를 모략을 짜야하는데 전혀 그러지 않으니 말이다. 대신에 그저 비천하고 소외된 자들, 불구자, 귀신 들린 자, 과부, 세리, 죄인, 심지어 이방인들과 희희낙락 교제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렸다.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인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불구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 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들을 그 본대로 판단해보라고 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하늘로 오는 표적은 이미 보여줄 만큼 다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11:5)는 말은 잊지 말고 꼭 전하라고 당부했다. 요한더러도 이 시대의 표적을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대중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어보라는 뜻이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스스로 명료하게 인식할 수 없고 또 고상한 종교적 언사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먹고 마시는 문제를 넘어선 근본적인 하늘로부터의 구원을 갈구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하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것 또한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그 형상이 파괴되었지만 흔적은 남아 있었기에 하나님이 없이는 자신들의 모든 삶이 덧없음과 허망함으로 끝난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감지했던 것이다.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었기에 하나님의 구원 외에는 전혀 소망이 없음을 지난 삶의 실패를 통해서 은연중에 깨달았던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날마다 겪는 슬픔, 상처, 눌림, 죄악, 허무, 갈증 등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도 자기 힘만으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 또한 바래시인 사두개인 같은 의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갈 바 몰라 방황하는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구원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오직 혼자서 외롭고도 쓸쓸하게 죽으셨다. 세상적인 영화와는 전혀 동떨어진 죽음이었다. 인간 이성으로 납득될 수 있는 하늘로 오는 표적은 아니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께 저주 받아 나무에 달렸다고, 또 헬라인에겐 한없이 미련한 죽음으로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표적만이 당신이 선포한 천국 복음을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표적이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과 인간을, 특별히 죄인들을 당신께서 어떻게 대하는지 그 원리를 보이셨다. 인간이 그 진리에 마음을 열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을 부인 거역한 이방인들도 자기만을 위하는 성향에 묶여선 절대로 한숨과 슬픔과 눌림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마저 자기를 풍성하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일에 종으로 부려 먹으려는 유대인들도 그 일을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기쁨과 만족과 자유와 평강을 끝까지 맛보지 못함을 십자가를 통해 알게 된다.
본문에서 시대의 표적은 원어상의 뜻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에 드러나는 그분의 온전한 뜻과 계획을 말한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 당신께서 연약한 인간들과 함께 하려고 때가 차매 이 땅에 임마누엘 하신 분이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오시어 요나의 표적만을 보이심으로써 당신과 원수 가운데 있었던 인간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이다.
이 세대가 악하고 음란한 이유는?
예수님이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 쪽에서 인간들에게 구원에 대해 어떤 조종, 강요, 협박도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큰 능력으로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유대인더러 아무 말도 못하고 복종시킬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당신께서 오히려 침묵하셨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인간이 진정으로 바뀌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어떤 인간도 겪지 못한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런 죽음을 죽으셨다. 그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즉, 시대의 표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였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실은 당신의 영으로써 온 천하도 감당 못할 엄청난 음성으로 모든 인간의 영혼에 대고 말씀하셨다. “너희 모든 인간들아! 지금껏 너희가 추구해왔던 모든 것들, 건강, 물질, 지성, 명예, 권력, 특별히 종교가 정말로 너희를 만족하고 자유롭고 기쁘게 할 수 있더냐? 최소한 평강이라도 얻을 수 있더냐?”라고 말이다.
인간이 참 생명을 얻어서 정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앞에 완전히 겸비하게 엎드리는 것이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께 자기의 전부를 내어드리며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악하고 음란하다고 야단을 맞은 진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을 일대일 개인적으로 만나서 친밀한 교제를 하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대를 향한 표적을 전혀 알지 못했고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이다.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갈급해 하는지 한 번도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았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바치어 그분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인간적으로 만들어놓은 종교 체계만 수호하기에 급급했다. 자신들의 현실적 이익에 손상이 안 가게 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악하고 음란하다는 것이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라 동일한 뜻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행함으로써 결국에는 허망한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악한 것이다. 시대의 흐름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음란한 것이다. 세태가 아무리 악하고 음란하게 흘러가더라도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의로운 손길이 간섭 주도하고 계심을 모르는 것이 악한 것이다.
어떤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인간답게 살 수 없으며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모르면 악한 것이다. 내가 지금 처해 있는 환경과 만나는 모든 사람과 겪는 어떤 사건에도, 아무리 힘들고 이해가 안 되는 고난일지라도 예수님의 너무나 큰 사랑과 오묘한 섭리가 풍성하게 함께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면 음란한 것이다. 범사에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인도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아니 그런 인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나아가 그런 인도가 있음을 알지 못하면 악한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야단 친 것은 바로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하는 꾸중이기도 하다. 특별히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에게 엄하게 발하는 경고이다. 교회에 나오는 회중들이 진정으로 듣고 싶은 설교는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과 골고다 십자가에 드러난 진리와 은혜와 권능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예수님을 갈수록 더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양떼들의 그런 갈증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맡은 세상 교훈만 자기 의견만 잔뜩 늘어놓는다. 교회 조직체의 종교적 권세와 목사 자신의 이름만 높이려 든다. 교회 안에 예수는 실종되었고 성경을 성경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이 세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성경의 절대적 진리에 비추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대의 표적들을 발견해 내지 못한다. 또 이 시대의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그 해결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신자들에게 확신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아무리 악하고 음란해도 참 신자라면 절대로 낙심할 필요가 없다.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손길이 신자로 당신의 영광된 자리로 반드시 이끌 것이며, 또 신자 안에도 보배 되시는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한 세대일수록 하나님의 표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또 주위에 예수를 모르는 자들의 눈물과 한숨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도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예수님의 심장으로 깨닫고 그분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세태가 악하고 음란해질수록 인간의 소망은 더더욱 예수님과 그 십자가뿐이다. 교회에선 예수님이 진짜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소개되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도 온전하게 깨우쳐지도록 해야 한다. 신자들은 예수님만이 생명과 길과 구원 즉, 시대의 표적자체임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 불신자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십자가 복음을 온전한 참 복음으로 전하지 않고 또 그대로 순종 실천하도록 회중을 이끌지 않는 목사라면 하나님 보시기엔 그 영적 분별력이 우산장수보다도 훨씬 못하다고 여기실 것이라는 뜻이다.
4/28/2013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이 이 세대의 가장 커다란 표적이기에, 죄인된 모습 그대로, 악하고 음란한 모습 그대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귀신들린 모습일지라도 오직 예수님께만 소망이 있기에, 십자가 사랑의 예수님께만 소망의 닻을 내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