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고백한 말도 모르는 신자
마태복음 강해 (#174)
http://www.youtube.com/watch?v=9FdUVIyZ6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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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17:1-8)
반사가 아니라 자체 발광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자신이 입술로 고백한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 예수님께 야단을 맞았다. 그 사건 후 만 6일이 지난 뒤에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시고 찬란한 빛 가운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주님이 오른 산은 지금 사역하고 계신 가이사랴 빌립보의 근처이자 갈릴리호수 북부에 위치한 헬몬산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해발 2850미터 정도로 정상에 항상 눈이 쌓여 있는 산이다. 1절에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는 기록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또 주님 일행이 정상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높은 곳에 오르신 것 같다.
얼굴과 옷에 빛이 났다고 해서 높은 산 양지 바른 곳에 섰기에 햇빛이 반사된 것은 아니다. 분명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또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표현하고 있다. 만약 햇빛에 반사되었다면 제자들의 옷도 빛이 나야 하는데 그런 언급이 전혀 없다.
여기서 사용된 “변형”이라는 헬라 단어도 조금 더 깨끗해지거나 발전되어 나아졌다는 것이 아니고 그 본질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은 그대로 있되 어떤 인간도 가질 수 없는 신적인 영광을 확연하고도 분명히 드러냈던 것이다. 그 옷도 그 영광에 걸맞게 변화된 것이다. 쉽게 말해 그 모습만 봐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물론 완전히 엎드려 절할 수밖에 없는 그런 권능이 나타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약 1500년 전 사람인 모세와, 약 900년 전 사람인 엘리야의 얼굴을 알아보았을 리는 만무하다. 주님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로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 신비하고 오묘하며 장엄하고 경이로웠을 것이다. 이 땅에선 생전에 보지 못했고 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였을 것이다.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고 한다. 구름이 덮이면 어두워지는 것이 정상인데도 빛이 났다고 한다. 이 또한 햇빛에 반사된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발광했다는 뜻이다. 구름은 구약성경에서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실 때 동반하는 현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학적 용어로 ‘Theophany’- 하나님의 현현(顯現, “지금 나타나다”는 한자말)-가 일어난 것이다. 즉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할 때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모습을 120명의 성도가 볼 수 있었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그곳에 실제로 강림하여 계셨던 것이다.
얼굴, 옷, 구름 모두가 빛이 났다는 것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계신 주위 사방이 온통 빛으로만 감싸였다는 뜻이다. 예수님께는 오직 빛만 있지 어둠이라고는 추호도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어둠의 노예로 있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빛의 창조자이자 예수님 자신이 참 빛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성질 급한 베드로
변화산의 광경이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웠든지 예의 성질 급한 베드로는 여기가 좋아오니 초막 셋을 짓고 계속 머물기 원한다고 즉, 내려가기 싫다고 말했다. 거기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9:33)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베드로가 아주 큰 잘못을 범한 양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신자라면 산에서 내려와 복음을 전파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지 교회에 모여서 찬양 기도 교제 예배에만 집중해선 한 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과 적용이 틀린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초막을 짓고 그곳에 더 오래 남아 있고 싶었던 소원 내지 심정마저 잘못되었다고 이해해선 안 된다. 그것은 너무 과한 해석이다.
우리말로는 초막이라고 번역되어 마치 초가로 지은 움막, 기도 굴 같은 느낌이 들지만 원래 뜻은 장막이다. 장막은 중동지역에선 바로 집이다. 지금도 아주 귀한 손님이 오면 주인의 장막과 는 별도로 새 장막을 쳐서 머물게 한다.
베드로로선 자기와 비견할 수 없는 모세, 엘리야, 예수님을 귀하게 모시고 섬기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 본인으로서도 단지 오묘하고 경이롭다고만 느낀 것이 아닐 것이다. 가슴 가득히 감동과 기쁨과 평강이 넘쳤을 것이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충만함을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요한은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특별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지 않는가?
베드로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요한과 야고보의 심정을 나서서 대변한 것이다. 그토록 장엄하고 아름답고 충만한 상황에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것이 어찌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빨리 내려가자고 말하는 자가 오히려 잘못된 것 아닌가?
신자라면 너무나 당연히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전파하며 세상에서 한 알의 썩는 밀알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신자들끼리 모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예배드리면 헤어지기 싫어지기가 너무 아쉽기 마련이다. 또 자꾸 더 자주 만나고 싶다. 그래야 정상이지 그렇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을 우습게 본 베드로
그렇다면 베드로가 자기가 했던 말 중에 알지 못했던 사항 즉, 자기 말 속에 잘못된 부분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여기가 좋다고 한 것이나, 초막을 짓겠다는 것이 아니다. 초막을 짓되 셋을 짓겠다는 것이 잘못이다. 왜 그런가? 예수님을 인간 선지자인 모세와 엘리야와 동격, 혹은 그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그 말에 대응하여 하늘에서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베드로의 잘못된 생각을 하나님이 고쳐준 것이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그 신분과 하시는 사역에서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 그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이미 고백했었던 내용(마16:16)이 절대적 진리임을 하나님이 보증한 것이다. 나아가 그가 입술로만 고백했지 그 내용을 온전히 몰라 예수님께 야단을 맞았던 사실을 그에게 다시 상기시켜 준 것이다.
모세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일으켰고 홍해를 갈랐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렸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나눴다. 엘리야도 죽은 자를 살렸고,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혼자서 상대하며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몰살시켰다. 삼 년간의 긴 가뭄을 끝내는 단비도 내리게 했다. 무엇보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산 채로 승천했다.
둘 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위대한 선지자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이 이적을 일으켜주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신께서 직접 말씀으로 명령하면 이적이 일어났다. 또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했지만 예수님은 당신께서 “죄 사함을 받으라.” 또는 “저주 받을찌어다.”라고 구원과 심판을 선포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인간을 출생해서 인간으로 죽었다. 하늘에 불리어 올라간 이후로는 이 땅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날 수도 없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히9:27) 때문이다. 구원 받고 죽은 성도가 있을 곳은 오직 천국의 하나님의 품안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영원토록 그분을 찬미하는 신분과 존재로 바뀐다.
바꿔 말해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천사도 아니요, 천사의 모습을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천국에 있던 그들을 불러 내린 것이다. 주님은 인간으로선 볼 수도, 알 수도 없고 죽어야만 가는 천국의 일부를 이 땅에 실현시키어 제자들로 미리 맛보게 한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 보좌 앞에만 존재하는 신분인데 지금 예수님 앞에 서있다. 그럼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요, 그분이 계신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라는 뜻이다.
사무엘상 28장에 사울의 요청을 받은 엔돌의 무당이 이미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혼은 천국에 있던 사무엘이 절대 아니다. 천국에 있던 자를 불러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그 영혼은 사단의 부하인 타락한 천사, 귀신이 사무엘의 모습으로 가장한 것에 불과하며 사울을 현혹시키려는 뜻이었다.
죽은 자의 영과 교통할 수 있다는 영매(靈媒)는 거짓이다. 또 예수 믿지 않고 죽은 불신자가 어떤 곳에 모여 다시 회개하거나, 살아 있는 신자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제 2의 구원의 기회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사악한 사단의 놀음에 넘어간 이단 중의 이단이다.
천하 만물의 주인, 예수님
물질계는 물론 영계에 속한 온 천하 만물은 예수님이 주인이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골1:16) 만물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 모든 인간은 그분의 거룩한 이름 앞에 무릎 꿇도록 만들어졌으며 또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다.
불신자가 죽으면 세컨드 챤스 없이 심판뿐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냉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의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은 당신께서 죽기까지 죄를 저주하셨고, 또 당신께서 죽기까지 죄인은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에 없는 어떤 인간도 행하지 못하는 무한한 당신만의 사랑을 인간에게 이미 넘치도록 베푸셨다. 사형수에게 아무 조건 없이 사면해주겠다는 그 사랑을 거역하는 만큼 완악한 죄는 없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하늘에서 예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다시 상기시킨 뜻이 바로 이것이다. 꼭 장막을 짓겠다면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두 개만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 예수에게 필요한 것은 보좌인데, 그 보좌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짓는다는 것이다. 아니 그분은 보좌를 따로 지을 필요도 없이 당신께서 계신 곳 어디나 다 보좌라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장막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짓고서 봉헌할 때에 어떻게 기도했는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8:27) 솔로몬이 온 나라를 동원하여 7년간 지은 성전에도 주님이 계시지 못하는데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뚝딱 지은 초막은 더 말할 여지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성전이나 초막에는 임재하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온 우주를 다 동원해도 용납 못할 만큼 광대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솔론몬의 부왕 다윗이 먼저 성전을 짓고자 할 때에도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삼하7:5-11)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태중에서부터, 아니 창세전부터 당신께서 택하시고 제자로 삼으셨다. 각 자에게 가장 적합하고 유익하며 선이 되는 완벽한 계획으로 인도하시고 계신다. 또 장차 그들이 거할 천국의 처소까지 그분이 마련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런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직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보증한 다음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무슨 뜻인가? 산에서 내려가자면 군말 없이 따라 내려가라는 것인가? 그 이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술로 고백했으면서도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겠다니까 그럴 수 없다고 말리는 그런 짓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 사이에 격차가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너희 가운데 거하는 그분에게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의탁하며 그분 가신 길을 따라가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며 정말로 부요하고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더 큰 무지
베드로가 잘못 생각한 것이 이로 끝이 아니다. 정작 더 몰랐던 내용이 또 남았다. 그가 예수님은 물론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초막마저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 초막은 예수님이 지어주신다거나 그들도 베드로와 동일한 인간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이 사건이 “엿새 후에”라는 기록으로 시작됨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앞의 사건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 성경은 원래 장절의 구분이 없기에 모든 구절을 죽 이어서 묵상하며 읽어야 한다.
우선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은 최하 열두 제자 중에 지금 세 제자는 변화산에서 천국을 맛보았고 예수님의 왕권을 목격했다. 지금껏 설명한 대로 예수님은 영계와 물질계의 주인이자 하나님 본체로서의 당신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이 세대 중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본다는 말씀을 갖고, 구태여 그분의 재림의 시기를 저울질하거나 어느 특정세대에 심판이 임박했는지 무리하게 추측할 필요는 전혀 없다. 주님은 그 약속을 들은 당시의 제자들 앞에서 엿새 후에 분명히 달성했던 것이다.
주님은 그 전에 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라 즉, 평생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순교자적 삶을 살라고 명했다.
하나님의 일이 종교적 모임과 행사를 뜻하지 않는다.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고 하셨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지금도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지 않는가?
따라서 베드로가 그렇게 주님과 항상 동행한다면 그 또한 모세와 엘리야와 동일한 영광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의 초막을 지을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바로 초막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종은 영원히 집(하늘의 장막)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너희를(베드로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죄에서) 참 자유하리라.”(요8:35)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자라면 누구라도 하늘의 장막에서 영원히 거하며 썩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는다.
베드로와 동일한 생각을 가진 신자들
베드로는 자기 눈앞에 서계시며 3년간 동고동락하며 가르침을 받았던 예수님이 정말 누구인지 아직도 몰랐던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 본체이신 줄도, 또 얼마 안 있어 십자가에 죽으시며 이룰 사역의 의미와 그 사역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미칠지 전혀 무지했던 것이다.
변화산의 영광에 사로잡혀 초막을 짓겠다는 나선 그는 어쩌면 이런 생각들을 했을지 모른다. 여전히 예수님의 큰 권능에다 모세와 엘리야의 능력까지 보태어 로마제국을 무찔러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또 썩어빠진 유대의 정치와 종교체계를 개혁해보려 했을 것이다. 또는 이 땅에서의 골치 아프고 고달픈 삶에 더 이상 연연치 않고 어서 빨리 죽어 천국에 가고 싶었을 수 있다. 나아가 최소한 더럽고 추한 속세를 떠나 산 속에서 정결한 수도사 생활을 하려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어찌 이리 오늘날의 신자들 마음과 똑 같을까? 이런 생각들이 심정적으로 이해는 되나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당신의 영광, 즉 왕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뜻에 완전히 반(反)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너희의 살고 죽음은 정말로 나를 따르느냐 아니냐에 즉,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느냐 아니냐에 달렸음을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베드로야!) 네가 믿느냐.”(요11:25) 예수를 온전히 믿은 자는 천국에 이미 영원한 장막이 마련되어 있다. 따로 남을 위해 장막을 지을 이유가 없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죽음 이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언제 어떤 사건 가운데 있더라도, 자신의 현실적 상황이 아무리 궁핍하고 후패해도, 바로 그곳이 천국의 보좌 앞이다. 그 외에 자신을 풍요롭게 만드는데 더 필요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늘날 기독교와 신자들이 크게 힘을 잃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함에도 거꾸로 세상에 물들다 못해 세속보다 더 추하다는 비방을 듣고 있는지 오래다. 초대 교회의 모습과는 정반대다. 초대 교회 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행2:47) 하셨다. 십자가 복음이 어느 누구도, 세상의 어떤 세력이나 존재도 훼방하지 못하고 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부흥의 불길이 모든 사람의 영혼에 불을 지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그들은 예수님의 참 생명을 실제로 소지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랐고 또 따르다 실제로 죽었다. 또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거룩한 생명을 얻는다고 진짜로 확신하며 죽어갔다. 그 반대가 되면 즉,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하며 더럽고 추한 죽음밖에 없음도 진짜로 확신했다. 예수님의 참 생명을 실제로 보았고 만졌고 자신의 것으로 소유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동일한 체험을 했다.
기독교와 신자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권능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그 전에 이미 자기 입술로도 그렇게 고백했던 베드로였지만 계속해서 그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급기야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러나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변화산의 영광마저도 예수님이 신적 권능으로 또 다른 이적을 일으켰다고만 여겼을지 모른다. 눈으로 보이는 물질계에 갇혀 있는 연약한 인간의 한계다.
그랬던 그가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에서 빛나는 옷을 입은 천사를 본 이후로는 그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에게 핍박당할까 두려워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모인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 모습이 바로 얼만 전 변화산에서 보았던 모습과 완전히 똑 같음을 확인하고선 비로소 변화산 영광이 그에게 절대적 진리로 다가왔다. 천국과 부활이 다른 이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또 오순절에 진리의 영인 성령의 세례를 받자 지난 3년간 주님께 배웠으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모든 가르침의 내용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분이야말로 절대적 진리요, 영원한 참 생명임을 믿은 것이 아니라 알게 되었다. 결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는 형벌마저 기꺼이 기쁨으로 감사하며 감당하는 자로 바뀌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또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받자마자 그 순간 그는 변화산 위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장막을 짓는 자가 아니라, 그들과 똑 같은 영광 가운데 서게 된 것이다. 물질계에 갇힌 연약한 존재에서, 이 땅에서부터 영원과 연결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으로만 호흡하는 진정한 영의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지금껏 베드로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다. 바로 저를 비롯한 예수 믿는 우리들 이야기다. 우리는 모세, 엘리야, 베드로, 스데반과, 최소한 초대교회의 이름 없는 신자들과 동일한 신분과 권세와 은혜 가운데 부름을 받았다. 또 그런 가운데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거룩한 생명을 이미 소지하고 있다. 베드로와 두 제자뿐 아니라 바로 우리가 변화산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몸의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마10:28) 세상사람, 고난, 죄악, 사탄, 육신적 죽음 등 어떤 것이라도 두려워할 필요와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와 베드로, 요한, 야고보의 차이는 변화산 영광을 육안으로 보지 못했다는 한 가지 사실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 또한 이미 그 영광 가운데 서있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 있다고 했으며, 천국에선 침례 요한보다 우리가 더 크다고 했으며, 심지어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지 않는가?
작금 기독교와 신자들이 힘을 잃은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본체라는 사실에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믿는 자에게 보장된 부활과 천국 영광의 절대성을 인정하는데 주저하고 있고 또 십자가 복음의 권능과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지 그 비밀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자들과 교회 안에 예수님 참 생명이 충만히 임하지 않으면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6/9/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