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더라도 감사하라.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시30:4-7,11,12)
다윗은 성경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표현할 정도로 믿음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시편을 보면 그도 우리와 똑 같이 믿음의 실패를 수 없이 겪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통할 때에는 주님을 찬양하며 영영히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다 주님이 얼굴을 가리는 일이 일어나자 곧 바로 근심에 빠지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여 문제가 해결되어지니까 다시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거듭하는 바로 그런 연약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신자더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환난 중에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실패를 많이 겪은 성도들은 그 말씀을 단지 신자가 믿음으로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일 뿐 꼭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간주해버립니다. 말하자면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도록 노력은 해보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도 그러지 못했으니 내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예 불가능한 목표를 신자에게 강요한 것일까요? 신자가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면 게을러질 것이므로 목표치를 최대한으로 잡아 놓아야 그나마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신자가 어차피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지만 목표라도 그렇게 해놓아야 용서는 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온전한 것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길 원하고 또 그럴 수 있습니다.
신자가 그러지 못하는 데는 한 가지 결정적인 신앙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믿음의 적용’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둘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분이 나의 삶과 인생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기에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반면에 ‘믿음의 적용’은 무엇입니까? 그 마음의 상태가 삶에서 실제적인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판단의 근거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어린 아이가 아버지가 크리스마스에 당연히 선물을 사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버지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큰 양말을 거실에 걸어 놓는 것은 그 믿음을 적용한 것이지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너무나 간단하고도 당연한 정의(定意)인 것 같습니까? 그 정도도 모르는 신자가 어디 있을까 싶습니까? 과연 그럴까요?
많은 신자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기도, 감사, 찬양이 잘 안 되면 “나는 아직 믿음이 약한가봐, 아직도 믿음이 자라려면 멀었어!”라고 한탄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적용이지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도 뜨겁게 하고 말씀 열심히 보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자 또 그래야만 믿음이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당연히 믿음이 먼저이고 그 적용은 뒤에 따라와야 합니다. 평소에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날마다 술 취해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둔 아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양말을 내거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양말을 내건다고, 그것도 이왕이면 큰 양말을 건다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자라거나 바뀌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이란 어디까지나 온전히 믿어져야 자연히 생기는 것이지 억지로 믿으려 든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생기려면 두 당사자 간에 일대일, 개인적, 인격적 대면에 의해 믿음이 생길만한 구체적인 일들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이 생긴 후에야 믿음이 적용된 행위가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확고한 믿음이 없는 데도 여비서에게 금고 열쇠를 맡기는 사장은 없습니다.
물론 기도와 말씀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경로이자 그 믿음을 재확인하는 수단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이 분명히 있는 신자가 간혹 기도하기 힘들고 말씀이 잘 읽혀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어지거나 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과 그 적용을 잘 구분하지 못하니까 조금만 염려되고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가 되지 않으면 믿음마저 약해졌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믿음의 적용에 잠시 혼선이 온 것뿐으로 믿음을 다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재확인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어떤 신자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보호하고 인도해주시어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셨다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만 감사했습니다. 아무래도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감사하는 것 같아 새로운 감사거리가 생길 때마다 작은 종이에 구체적으로 써서 저금통 같이 만든 감사함에 넣었습니다. 얼마 안가 그 통은 너무나도 생생한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니 자신의 삶이 사실 그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없는데도 그렇게 감사거리가 넘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모자랐던 것은 감사할 거리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겠다는 마음이었던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문제에서도 ‘믿음’과 ‘믿음의 적용’처럼 ‘감사’와 ‘감사의 적용’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먼저 생겨야 실제로 감사하는 행위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이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고만 생각하여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감사해보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사의 적용’ 부분만을 고치려 노력한 것에 불과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려 하지 않았기에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 시편에서 다윗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봅시다. 현실적으로 힘든 일은 계속 겹쳤습니다. 힘든 일이 어느 순간 딱 그치고 그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라고는 전혀 생기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바뀐 것은 그의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처음에 형통할 때는 그는 “영영히 요동치”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힘든 일이 생기자 근심과 슬픔이 따라 왔습니다. 요동치 않을 것이라 자신한 것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요동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에 가서 그는 감히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현실과 그에 따라 요동치는 자기 마음은 그대로이더라도 하나님 그분의 권능과 사랑은 영원토록 신실하시다는 사실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진리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베풀어주시는 감사거리에 대한 감사는 없어도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은 영영히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평생임을 재확인 한 것이지 눈앞의 현실에 대해 억지로 감사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려면 현실적으로 힘든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감사거리가 없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있는 하나님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궂은일에 감사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현실을 볼 때에는 다윗만큼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마음이 흔들려 자꾸 짜증과 불안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은 영영히 변함없지 않습니까? 또 솔직히 우리가 그분을 믿는 믿음 자체에도 결정적인 변함이 없지 않습니까? 요컨대 우리 생각과 감정은 요동칠 수 있어도 그분에 대해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목표가 아닙니다. 영원토록 신실하신 그분이 나를 알고 계신지, 그래서 나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 진짜로 사실인지 잠간만 따져보십시오. 부족한 것은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 아들을 주신 이가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두 질문에 즉시로 ‘예스’가 안 나오면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여전히 감사는 안 됩니다.
12/19/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