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죽었는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53:1-3)
불신자를 전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확실하다면 믿지 않을 바보가 어디 있는가? 단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으니까 못 믿는 것이지”라는 반응을 자주 접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자고로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 종교가들 사이에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인정할 만큼 딱 부러진 이론은 없습니다.
그러다 급기야는 일단의 기독교 신학자들마저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그런 사신(死神)신학이 발단된 연유가 신이 없다고 확신한데서가 아니고 현대인은(혹은 신은)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윤리적인 교훈에만 입각하여 기독교를 윤리종교로 재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내재적인 하나님을 강조해서 하나님 없는 그리스도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가장 먼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신의 존재를 수학의 공리처럼 인간이 완전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영이신 하나님을 물질계에 속한 인간이 또 그 물질계에 통하는 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공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증명할 수 있다 혹은 없다는 것부터 먼저 증명해야 하는데 사실은 그것부터 온전한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아주 간단한 상식적 차원에서 한번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없다면 증거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분은 반드시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시며 유일한 절대자여야 합니다. 그럼 인간은 그분이 만드신 일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아주 고급한 수준의 이성과 지성을 갖고 있지만 우주 전체로 치면 아주 미세한 먼지 하나 정도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주 전체를 만드신 분을 그 먼지가 증명해낼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먼지가 그분이 없다고도 증명할 수 없을 것 아닙니까? 그 존재성을 증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갓난아이가 자기가 어떻게 출생했는지는 절대 알 수 없고 그 출생의 비밀을 따져볼 생각조차 못하는 것과 방불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기가 자기 출생의 비밀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자기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고급한 두뇌를 가진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다 그렇습니다. 한 번에 수천 개의 알을 낳는 연어 같은 경우도 생부모를 알 수는 없지만 자기가 태어난 곳을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바로 자기 태생의 근원은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컨대 모든 생물이 누가 자신의 부모인지 또 다른 자는 자기 부모가 아닌지 증명은 못해도 알 수는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성을 인간더러 알 수 있게는 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이고” 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해놓았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신을 경배하지 않는 무신론 종족을 아직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성경이, 또 캘빈이 “우리 모두는 신성에 대한 타고난 의식이 있다”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 존재성의 증명을 특이하게도 인간이 죄악에 빠져 있는 것과 연결 짓고 있습니다. 상식적인 생각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 있어서 환난과 불행이 끊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없거나 손을 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신신학도 바로 그런 측면에서 출발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죄에 빠진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한 말이라면 그 말은 틀렸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그 반대로 따지면 심판과 구원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이 분명히 있는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죄를 저지른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뜻이 됩니다. 요컨대 세상에 죄악이 범람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재 증명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어리석음의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아는 자는 당연히 선을 행할 뿐 아니라 모르는 인간도 진정한 선을 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정말 지각이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들면 죄악을 멀리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마저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있고 또 자연을 둘러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데 선과 함께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못 찾을 리는 없습니다.
최근에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죽여 버린 대표적인 예는 공산주의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종교는 인민의 마약이다”라고 선언하고 모든 종교를 말살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는 세상의 악을 제거하는데 실패했고 인생살이에 대한 서민들의 불안감을 악용해 종교권력자의 치부를 도와주는 악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것은 종교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공산주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악을 제거할 수 없고 오히려 짓는 것이 전부 악일뿐입니다. 역으로 말해 공산주의자가 죄악을 범한 것이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더 증명한 셈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 레닌이 이렇게 시인 한 바 있습니다.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 억압 받는 민중이 해방되어야 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방법은 더 큰 억압과 악랄한 대량 학살을 낳았을 뿐이다. 나는 헤아릴 수 없는 희생자의 피로 붉게 물든 바다에 빠져 허덕이는 악몽 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 과거를 바꾸기엔 이제 너무 늦었지만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열 명의 성 프란체스코였다.” 종교가 마약이 아니었고 인간 세상의 죄악을 구원하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뿐이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역사학자 폴 잔슨은 “인간의 영적인 국면에서 볼 때에 20세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하나님이 죽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라고 평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없애려면 인간 스스로 하늘의 별을 다 없애거나, 질서의 자연세계를 혼돈으로 바꾸던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양심을 다 빼 없애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증명이 그분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힘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으로선 단지 그분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갓난아이가 자기 부모더러 호적등본을 갖고 오거나 DNA 테스트를 해야만 부모로 인정해 주겠다는 이치는 결코 성립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갓난아이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부모는 알아봅니다.
혹시 나면서 바로 고아원에 버려졌어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보모와 그렇지 않은 보모는 알아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갓난아기라도 사랑은 증명 안 해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나 둘 중 하나이지 증명해서 사랑이 확실해야 받아들이겠다는 어리석은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모의 품이나 고아원 보모의 사랑마저 받지 않고 뛰어나간 자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악 뿐입니다.
사랑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라면 정작 더 문제는 신자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확신여부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나아가 그 사랑에 온당한 반응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오직 경배와 감사와 순종뿐입니다. 만약 이 셋이 부족하고 대신에 교만과 불평과 불순종이 자꾸 개입되는 신앙이라면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인류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죽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아니 그분의 다함없는 사랑은 증명할 대상이 아니고 단지 보여서 알게 해주는 것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 사랑의 하나님이 그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 모든 자로 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또 그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말하자면 어리석은 자는 골고다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아니 세상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랑을 보고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입니다. 세상에 죄악이 범람하니까 오히려 그 죄를 감당하고 죽으시기까지 죄인을 살리려 했던 그 사랑에는 눈이 멀고 대신에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 따져 하나님이 없다고 반발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선 이 시편의 말씀과 평행되게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불신자라고 해서 신자보다 더 악한 죄를 많이 짓는 것도 아니요, 신자라고 해서 그들보다 더 선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성격이 온순하고 포악한지의 차이도 별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느냐 아직도 거부하고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나아가 신자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오직 성령으로 간섭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신자마저 자꾸 하나님의 존재성을 증명하려 듭니다. 그나마 사신신학자들은 세상의 죄악을 보고 하나님 대신에 인간이라도 나서서 바로 잡으려고 시도는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기 기도한대로 응답이 지연되거나 안 되면, 또는 예기치 않은 환난이 그것도 자기 잘못으로 생겼는데도 하나님은 죽었나보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십자가 사랑을 잊지 않고 그 사랑에 온당한 반응을 보이는 자입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에게 인간이 드릴 것은 오직 경배와 감사와 순종뿐입니다. 자칫 불신자는 어리석기만 하지만 신자는 진짜로 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인 줄 알고 또 실제로 그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못 알아먹어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하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자 말입니다.
1/23/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