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신자 인생의 참 목적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1:15,16)
요나를 제물로 바다에 던지자 폭풍우는 잠잠해졌고 그 모습을 본 선원들이 여호와께 서원을 하였습니다. 이방 신을 믿다가 유대교로 개종했는지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확실한 것은 여호와의 권능만은 인정했습니다. 바다가 비정상적으로 뛰놀다가 곧 그치는 것을 본 바닷길의 전문가들로선 여호와를 자연마저 주관하는 신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이유 없는 고난을 단순히 연단을 통해 정금같이 변화시키는 데만 목적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여 어떻게 하든 고난을 인내하려고만 합니다. 열심히 말씀보고 기도하면 영적으로도 저절로 성숙해지리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신자의 고난은 거의가 본문에서 보듯이 신자보다는 주위의 불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결말지어집니다. 더 심한 폭풍우를 겪은 바울의 경우도 배 속에서 시종일관 믿음으로 행동한 것과 완전 파선하여 구사일생으로 멜리데 섬에 상륙한 후에 행한 사역을 통해 선원들과 섬의 원주민들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신자가 겪는 고난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뿐입니다. 자기가 실수하고 잘못해서 겪는 어려움이나, 죄로 부패된 세상과 사람들로 인해 당하는 손해마저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는 많은 신자들이 그런 원인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무조건 하나님께만 억지를 씁니다. 사실상 신자를 포함해 모든 인간이 겪는 고난의 거의 대부분이 이에 해당하는데도 말입니다.
순전히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세 가지 이유는, 우선 신자더러 지은 죄를 징계하고, 또 신앙을 더 견고케 하며, 나아가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의 은혜와 권능을 불신자에게 드러내 보이려는 것입니다. 이 중에 첫 번째는 사실은 아주 드뭅니다. 복음 안에 이미 들어 와 있으니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죄로 인한 지옥의 영벌은 더 이상 없지만 일상적 죄에 대한 징계는 십자가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가 죄에 빠지면 당신만의 긍휼과 인자로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며 나아가 스스로 그 잘못을 빨리 깨달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간섭하십니다. 죄가 한계에 이르고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할 때에야 엄중하게 징계하시되 여전히 그 죄를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자식을 초달하는 부모처럼 사랑의 매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생한 신자라면 믿기 전보다는 아무래도 죄를 덜 짓고 또 성령의 인도로 죄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그래서 징계에까지 이르는 죄에는 잘 빠지지 않으며 설령 끝까지 회개치 않아 징계를 받아도 본인이 그 동안 그 죄로 인해 괴로워했던지라 최소한 이유 없는 고통이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아는 고난이라면 감내할 수 있고 또 해결책도 알 수 있으므로 사실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욥이 괴로워했던 것은 고통의 세기가 극심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럼 원인 모를 환난의 배경에는 신앙 성숙과 하나님의 증거라는 두 가지 원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사실 그 둘은 거의 동시에 달성됩니다. 아니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궁극적인 초점이 모아집니다. 그런데도 신자는 하나님의 생각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말씀만 붙들고 참기만 하면 자기는 아주 믿음이 좋은 자로 바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속으로는 하나님의 축복도 응당 따를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신자의 신앙을 성숙시킬 목적으로 자꾸 환난만 겪게 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 아이더러 공부 잘하게 하려고 매만 드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칭찬, 격려, 충고, 권면을 더 자주 사용하며 때로 필요하다면 사탕도 줍니다. 마찬가지로 말씀, 기도, 예배, 찬양 등으로 신앙은 얼마든지 성숙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으로 신자의 체질과 성격을 뱃심 좋게 개조시키려는 목적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환난의 근본적인 목적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계획한 일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어 궁극적인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신자가 온전히 신뢰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기꺼이 바치는 모습을 불신자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혼자서 일을 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고 거의 대부분 신자의 헌신과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세상 앞에 드러내십니다.
신자의 인생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자가 받을 은혜와 영적 성숙도 그분을 증거하는 가운데 자연적으로 다 성취됩니다. 아니 신자라면 당연히 은혜가 충만하며, 최소한 은혜를 갈망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은 채워주시기에, 또 영적으로 성숙하길 소원해야 합니다. 참 신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따져보면 신자의 인생 자체가 환난으로 겹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환난을 허락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당신의 증거이고 또 그 일을 신자를 통해 이루신다면 자연히 신자의 삶에 고난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모든 신자가 바울처럼 구원을 얻은 후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그분의 영광만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잘 믿었는데도 환난이 생겼다고 불안해하거나 빨리 구원해주지 않는다고 떼만 쓰면 하나님의 뜻과 아예 상충되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왜 환난이 생기느냐고 의심하고 불평하면 신자로서 부름 받은 근본 목적조차 알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좀 믿음이 좋은 자라도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인내만 목표로 한다면 오히려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최소한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영적성숙이 종교적 실력을 쌓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환난의 궁극적 원인만 제대로 알아도 성숙된 것입니다. 물론 환난 때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인내하며 그분의 구원을 소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힘들어 하나님께 구원을 원하는 것 자체는 믿음이 성숙된 모습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이자 시작일 뿐입니다. 심지어 불신자들도 힘들면 천지신명에게 빌고 그 고난을 통해 자신이 더 성숙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까?
불신자와 완전히 다를 때에만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삶 가운데 실현하겠다는 것은, 그것도 환난 가운데 그러겠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아니 그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럼 신자로서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너무나 확실해졌지 않습니까?
신자는 예수 죽인 것을 항상 몸에 지녀야 합니다. 복음 안에 바로 서 있으면 환난은 언제 어디서나 따르리라고 각오해야 합니다. 어떤 환난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자족하고 승리해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이 풍족하게 채워 주시면 더욱 겸비하고 감사함으로 그 풍요를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잊지 말 것은 어떤 고난이라도 그분을 증거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이룰 영적 성숙의 본질이자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9/1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