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두 가지 일도 못하는 신자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세상살이가 갈수록 더 힘들어지고 있는데 꼭 세계적 불경기 탓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문명이 발달해 살기 편해질수록 이어가야할 관계나 유지해야할 소유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생활이 복잡해진 것입니다. 자연히 정서적인 면도 그에 따라 복잡해졌습니다.
신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서 하나님이 따로 떼어서 어떤 고난도 닥치지 않게는 해주지 않습니다. 죄악으로 부패된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는지라 고난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유익은 동일한 고난을 겪되 그 결과가 다르며 또 그 다른 결과를 얻기 위해선 고난을 겪는 과정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신자더러 전혀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시거나, 믿음이 진통제 역할을 하여서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고난의 결과가 세상 사람의 것과 다르다고 해서 인내만 잘 하면 엄청난 형통과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선 고난의 과정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고난을 얼마든지 이기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실제로 이겨내는 일은 전적으로 신자에게 달린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신자의 태도가 바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너무나 쉽게 신자의 생각만 바꾸라고 합니다. 즉 낙관적이고 긍정적 사고로 고난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축복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부 결과적 현상만을 설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가 고난 중에 바뀌어야 할 태도는 이와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난이 끝나고 맞이할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셨던 바대로 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신자가 원했던 것 즉, 어서 빨리 고난만 끝나라 혹은 잘 견뎌내면 상 주시리라 같은 믿음이나 예상은 핀트가 빗나간 것이란 뜻입니다. 신자의 고난을 대하는 관점에서 제일 먼저 바뀌어야 할 내용입니다. 고난이 신자에겐 축복으로 가는 통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축복의 내용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괜히 섣부른 기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난 중에 신자와 함께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선 고통으로 쓰려져 있는 신자를 일으키고 이길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너무나 기본입니다. 그럼 고난의 결과는 기껏 이겨내었다는 정도뿐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뜻은 훨씬 큽니다. 신자로 계속 자라서 전진하며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보존을 넘어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그를 통해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당신께서 여호수아에 앞서 행하신다고 합니다. 신자가 행하는 것을 곁에서 도우거나 뒤에서 밀어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는 선조와의 약속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약속도 당신께서 하셨고, 그것을 이루는 시기와 방식도 당신께서 계획하셨고, 그 일이 달성될 힘도 오직 당신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이 원리는 신자가 겪는 모든 고난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려 먼저 가서 행하십니다. 특별히 불신자도 겪는 일상적인 고난보다는 믿음이 흔들릴 만큼 전혀 이해되지 않는 돌발적이고도 크나큰 고난에 그분의 놀랍고도 거룩한 뜻이 더 풍부히 내재되어 있습니다. 신자로선 그분의 나를 향한 계획이 하나씩 이뤄지고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그 고난이 아니면 그 계획이 이뤄질 수 없음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고 노쇠한 모세를 대신할 여호수아에게 주신 권면입니다. 그가 지금 당장 고난 중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전쟁을 치르면 분명 큰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할지도 모르고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잃을 것입니다. 또 언제 그 정복 전쟁이 끝날지도 아직은 전혀 미지수입니다. 차라리 매를 맞고 있는 편이 낫지 매를 맞으려 기다리는 자의 고통이 더 큽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단순히 내가 함께 하니 두려워말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신앙 원리를 다시 일깨우는 수준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하실 일은 무려 네 가지이고, 신자 쪽에서 할 일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여호와는 1) 네 앞서 행하시며, 2) 너와 함께 하사, 3)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4)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1) 두려워 말라, 2) 놀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행할 일 중에 가장 힘 있고 적극적인 것부터 먼저 말하셨습니다.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고, 함께 하고, 앞서 행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신실하심을 실감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자꾸 보채면 아버지는 작은 보상부터 하다가 차츰 큰 것을 주는 것이 보통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반대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두려워하거나 놀라지만 않으면 됩니다. 행동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전쟁을 치룰 당사자는 여호수아와 백성들이지만 어떤 대적이 나타나더라도 그저 담대하게 전투하라는 것입니다.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로 특별히 준비하고 계획할 것이 없습니다. 고난을 보는 태도만 달라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마저 못합니다. 하나님은 네 가지를 적극적으로 해주시는데 우리는 믿음만 있으면 되는 두 소극적인 일조차 행치 못합니다. 오죽 우리가 그러지 못하면 앞서 가서 행하겠다는 것부터 약속하시고 마지막에 버리지 않는다는 다짐까지 보탰겠습니까? 앞서 행한다는 것만큼 큰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 한마디면 차고도 넘치는 것 아닙니까?
이 약속을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중에 가장 믿음이 좋은 여호수아에게 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일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는 총사령관으로 가장 큰 고난을 겪을 자이기에 더 큰 약속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처럼 한 민족의 구원자와는 전혀 거리가 멀고 단순히 개인적 고난으로만 평생을 괴로워하는 우리에겐 더더욱 이 약속의 말씀이 확실한 권능을 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본문을 보면서 여호수아의 믿음을 비판하기보다 우리 믿음부터 정확히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힘들고 어떤 결과를 맺을지 몰라서 언제나 두렵긴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상 인간이 아니며 하나님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로 앞서 간다는 확신이 있다면 고난 중에 그 두려움은 얼마든지 없어질 수, 최소한 약해질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바꿔 말해 우리 신앙 상의 가장 큰 문제는 그분이 앞서 행하신다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또 그 확신이 없음은 그분이 내 인생에 대한 고유의 뜻과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아니 알지도 못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두려워 말라는 권면 후에 놀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네피림 같이 장대해서 놀라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나안 종족에 대한 정보를 이젠 많이 갖고 있습니다. 또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고(6절) 이미 권했습니다.
그보다는 여호와께서 앞서 가서 행하실 일들을 보고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침묵의 행진으로 무너지고, 아간이 범한 것 같은 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연전연승으로 가나안이 파죽지세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라는 권면은 평소 때의 일상적인 이성으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냥 고난이 끝날 정도라면 구태여 놀라지 말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우며 그분의 위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이제 조금 실감할 수 있습니까? 그분이 행할 일이 우리가 행할 일보다(2) 곱으로(4) 많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실은 여섯 가지 모두가 그분이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앞서 행하고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네 가지 약속을 분명하게 듣는 순간 그간의 두려움부터 가실 것 아닙니까? 두려움을 없애주는 일도 그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또 살펴본 대로 마지막 놀라지 말라는 말씀의 실제 내용은 당신이 장차 큰 권능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나아가 이 여섯 가지 위로의 구조를 잘 살펴보십시오. 처음에는 앞서 가서 행한다 하셨고 마지막에는 놀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에 당신께서 적극적으로 행하실 약속을 배치했습니다. 결국 신자가 고난 중에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그분은 앞서 가서 신자가 놀랄 수밖에 없는 일들을 이미 이루고 계신다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그저 담담하게 고난과 맞서기만 하면 됩니다. 단 앞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놀랄만한 일을 벌이실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말입니다. 우리 체질이 너무나 연약한지라 두려움은 고난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도 없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두려울 때마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바로 이 권면, 위로, 약속의 구조를 회상하셔야 합니다. 고난만 끝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앞서 가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럼 고난을 대하는 그간의 우리 믿음에서 결정적 하자는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아닙니다. 고난 후에 맞이할 놀람에 대한 기대나 설렘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뜻에 대해, 그 고난뿐 아니라 자기 평생에 걸친, 별로 신경을 안 쓴 것입니다. 단순히 믿으면 어떤 위험에서도 건져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만 꽉 붙들고 있었지 그 권능이 드러낼 놀라운 모습에 대한 설렘과 기대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대한 계획에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단지 예배와 교회 행사에 참석하고 봉사하는 것과 힘들면 기도하는 것이 다인 줄 압니다. 그분이 절대로 나를 지금 이 모습으로 놔두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일정과 계획대로 이끄실 것이라는, 아니 지금 이 고난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는 가장 큰 까닭은 지금 바로 이 문제와 고난을 끝내줄 수 있을 전능하신 권세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그 권능을 베푸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놀랍고도 큰 계획을 이루시려는 소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기대의 차이가 얼마나 극명하지 아시겠습니까? 또 아무리 그 차이가 클지라도 가장 빨리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기회가 고난인 줄 짐작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요컨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단 두 가지 일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놀라지 말아야 할 일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는 사실상 안 갖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일도 못하는 셈입니다. 두려움만 없애려 들면 정작 두려운 일이 끝나지 않는 한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너무나 간단한 원리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입니다. 영원토록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자녀들도 영원의 맥락에서 광대하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쉽게 말해 우리의 지금 이 힘든 고난 중에도 우리가 이 땅을 마감하고 우리를 위해 이미 예비해 놓으신 천국 처소에 들여보내는 순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우리 내면을 추스르고 바꿔나가야 할 신앙의 최종 도착지, 아니 현재의 목표입니다.
10/8/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