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6-18)
수도원 수사가 된 신자들
신자는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완성될 구원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면서 참 보물을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진짜 실체도 아닙니다. 하나 예외 없이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에 아예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예수님께서 마련해놓은 영원하고 완전한 하늘의 장막으로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진술을 자주 접하다보니 자칫 이 땅의 삶을 완전히 무시하고 진짜 영적으로 경건하고 신령해지기만 하려는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세상은 전혀 가치가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므로 담을 쌓고 사려는 것입니다. 생활 여건은 최소치로도 만족한 채 마치 중세의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말씀만 연구하는 형국으로 말입니다.
또 실제로는 이런저런 현실적 제약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살고 싶어 하거나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참된 크리스천 영성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큰 오해이자 잘못된 믿음입니다.
본문도 하늘의 크고 중(重)하며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현재 겪는 환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에만 그치면 본문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놓치는 셈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환난이 주는 고통이 경(輕)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장차 누릴 하늘의 영광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원죄로 타락하여 전체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벌을 받은 상태에선 환난은 결코 끊이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전혀 변함없을 것이며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환난이 비켜가지 않습니다.
또 환난을 실제 당할 때는 정말 쓰리고 아프고 힘듭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런 고통도 있습니다. 아니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고 갈수록 더 극심해지는 고통을 안고 죽는 자도 부지기수입니다. 신자마저 모든 것을 다 잃었거나, 너무 고통이 심해서 자살하고픈 충동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의 힘이 고통을 경감케 해주는 진통제나 마취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말 그대로 고통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주지할 사항은 이것입니다. 어떤 극심한 고통도 “잠시” 받는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고통을 안고 가더라도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너무나 찰나입니다. 어차피 이 땅의 고통은 스쳐 지나가거나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죽음으로라도 더 이상 고통은 없어지고 기다리는 것은 영광스런 천국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아무리 겉사람이 후패해져도 정작 중히 여기고 아름답게 가꿀 것은 속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사실은 주님과 교제하면서 날로 속사람이 새롭고 거룩하게 바뀌어져 가는 그 기쁨과 축복이 너무 크고 좋기에 겉사람이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보는 두 가지 입장
이 땅의 모순, 질곡, 질병, 죄악, 고통, 재앙 등을 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양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견해 몇 가지만 들어 봅시다. 허무주의는 해결책은 아예 없으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죽기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어차피 절대적 진리가 없으니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쾌락주의는 해결책과 진리에는 전혀 관심 없고 모든 가용한 수단과 자원을 동원해 최대한 신나고 즐겁게 살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는 도무지 인간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겠으니 아예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존재하고 있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깁니다. 진보주의는 인간의 큰 능력과 선한 성품을 믿기에 인간끼리 노력하면 얼마든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유사 이래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상과 철학과 종교가 고통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그 모든 해결책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비관적 관점과 낙관적 관점입니다. 그럼 기독교적 관점은 이 둘 중 어디에 속합니까?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은 제 삼의 관점입니다. 간혹 교파에 따라 한쪽에 치우치는 견해를 피력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를 Susan Lenzkes라는 작가가 “Life is liking honey off a thorn”(가시에 묻은 꿀을 핥아 먹는 것 같은 인생)이란 책에서 아주 잘 설명했습니다. 먼저 낙관주의자는 “즐거움과 좋은 기억만 간직하는 자”입니다. 비관주의자는 “삶에서의 실패에 집중하여 그 과정에서 얻었던 기쁨과 승리를 놓쳐버리는 자”입니다. 반면에 크리스천은 “삶의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선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쉬지 않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거듭하여 인식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낙관주의는 인생과 인간은 선하다고 보는데 반해 비관주의는 완전 반대입니다. 그에 따라 환난을 대하는 태도도 낙관과 비관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전자는 고통 뒤에 기쁨이 따를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현실과 싸워 이기고 그 이긴 만큼 자신도 자랍니다. 후자는 어차피 인생은 고통으로 점철되기 마련인데다 그런다고 해결되지도 않으니 그저 참고 견디는 수 말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건질 만한 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의 생각은 어떠해야 합니까? 언뜻 낙관주의와 같거나 가깝다고 여겨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옳은 것이며, 그분 밖에 있는 것은 세상에서 아무리 선하다고 여겨도 여전히 악할 뿐입니다. 모든 선악은 그분과 연결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선한 것은 오직 그분께로만 나옵니다.
따라서 신자는 범사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선(善) 안에 있기에 당연히 그분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즉 신자가 고통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라보면 그 고통 자체도 선해지는 반면에, 그분의 뜻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악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말하자면 지금 당하고 잇는 고난을 하나님이 계획 내지 허락한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당연히 궁극적인 해결책도 그분이 마련해 놓았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법입니다. 또 그래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2,3)가 가능한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라도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과 전혀 무관하게 일어난 것이라고 본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즉,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세상 사람이 나빠서 이런 억울한 어려움을 겪는다거나, 나는 아주 열심히 잘 믿었는데 하나님이 몰라보고 벌만 주신다고 여긴다면, 그저 빨리 이 환난을 끝내달라는 기도밖에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잘못 내지 착오이며, 고난도 그저 악한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도 악한 하나님 내지 임무를 태만한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유일한 궁극적 실체
하나님이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을 계획 내지 묵인하셨고 또 그 궁극적인 해결책까지 선하게 마련해 놓으셨다면 고난은 당연히 축복일 수밖에 없다. 또 축복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도 없이 고통 중에 즐거워한다면 정신이 이상하거나 광신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니 아무 조건 달지 말고 일단 기뻐하고 감사하고 순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우리가 그분과 등을 지고 죄 가운데 있을 때조차 당신의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다면, 당신께서 계획 내지 허락하신 고통에는 더더욱 큰 사랑이 보장되어 있을 것을 확신하기에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책의 제목대로 하자면 고난은 비록 가시처럼 우리를 찌르지만 그 가시를 잘 살피면 표면에 하나님이 발라 놓은 꿀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눈에는 이해할 수 없고, 또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으며, 나아가 갈수록 그 고통이 더 심해져도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는 그 뒤에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지 절대로 그분의 사랑이 부재(不在)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축복은 실재(實在)한 것입니다.
그럼 언뜻 고통만 보이고 축복이 없어 보이는 것은 가짜입니다. 고통 안에 축복이 있는 것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체(實體)입니다. 신자는, 그 중에서도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 자만이 세상의 실체를 볼 줄 아는 자입니다. 불신자는 완전히 가상의 공간에서 신기루만 쫓으며 사는 셈입니다. 신자 중에도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과 무관하며 단지 그분을 해결사로만 필요로 하는 자는 실체의 반만 겨우 보는 애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지당한 진리입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오직 한분뿐입니다. 그분만이 영원토록 완전한 절대자입니다. 절대적인 실체는 우주에 그분 외에는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썩어 없어질 물체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마르고 시들지만 그분만 영존합니다. Absolute Reality인 그분을 알고 그분 중심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듣고 보며 행하는 것이야말로 실체 안에서 사는 진짜 실체입니다.
인간 이성이 가장 고급하게 진화했다고 자부하는 현대 지성인들이 세상에 대해 내린 결론이 기껏 실존주의입니다. 어떤 진리도 알 수 없으니 알려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수천 년을 고민하고 사색하고 탐구한 결과가 한 마디로 인간은 무지(無知)하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지당한 결론입니다. 절대적으로 유일한 실체인 하나님을 거부한 채 아무리 궁리해 봐야 세상의 진짜 실체는 절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인간과 인간이 훼방해 놓은 세상뿐이지 보이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니까” 그곳에 물이 고일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적 유일한 실체의 은총과 권능 아래 살고 있는 신자야말로 진정한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진짜로 실존해야 할 근거, 이유, 가치, 의미, 목적 등을 확실하게 찾아서 붙든 유일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아주 지극한 실체주의자(Realist), 현실주의자인 셈입니다.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서 가장 정확하게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본문도 단순히 현실을 짐짓 외면하고 경건하게 천국만 소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분명히 말했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아무리 겉모습이 후패해져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로 모신 속사람은 날로 더 새롭기에 어떤 환난과 핍박이 닥쳐도 낙심할 필요는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오히려 더욱 성실히 열심히 적극적 낙관적 능동적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범사를 보는 관점을 그렇게 의지적으로 바꾸어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정의의 영역에서 생각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적으로 범사를, 고난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라는 해석의 틀 안에 넣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 내어드리면 그분의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서 주님과 함께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낙관이나 비관이 아닌 제 삼의 견해인 것입니다.
서두에서 신자라도 더 심해지는 고통 가운데 죽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겉 사람일 뿐입니다. 이미 속사람은 새롭고도 거룩하고 아름답게 변모된 상태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초대교회에 산 채로 사자 밥이 된 신자들이 현실에서 내내 억울한 고난만 겪다가 죽지만 이젠 천국이 기다리니까 한 번만 더 눈 찔끔 감고 참아내자는 식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비록 육체적 고통은 있었을지라도 그들 영혼에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해져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 가운데 영원한 실체에게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돌리며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수도원에만 머물러 있는 영성은 결코 기독교 영성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쓰러지고 넘어지고 깨어지고 심지어 세상으로 뒤돌아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어떤 고난과도 맞서며 아무리 고통이 심하고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처지에 빠져도 낙심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 실체이신 주님이 우리를 아름답고도 사랑스럽게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손을 놓지 않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와 일부 신자(?)에겐 고통은 악할 뿐입니다. 당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신자에겐 고통은 오히려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고난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더 크게 맛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하늘에는 더 크고 중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지만 우리는 그 영광만 바라고 참아내기만 해선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지고 있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무거운 짐은 사실은 하늘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주님과 말씀과 기도를 통해 깊은 교제에 들어가게 해서 천국 같은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자는 자연히 또 마땅히 때가 이르면 천국 영광을 덧입을 것입니다.
1/4/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