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굳세게 서야 할 곳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자유를 얻게 되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이전의 잘못된 습성과 세상 쾌락의 유혹과 죄악의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믿음을 강하게 해서 악은 모양이라도 닮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신자가 정작 메지 말아야 할 ‘멍에’가 아닙니다. 지금껏 들어온 가르침과는 달라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본문에는 서로 상반된 표현이 혼재(混在)되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자유를 주었다는 것은 멍에가 완전히 벗겨져 더 이상 짊어질 짐이라고는 없다는 뜻입니다. 멍에가 벗겨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자유를 주셨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다시 그 멍에를 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까? 이치가 닿지 않는 표현 아닙니까? 성경이 잘못된 진술을 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예수님이 벗겨준 멍에의 종류를 정확히 모르거나, 심지어 구원으로 어떤 멍에가 완전히 벗겨졌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뜻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죄를 멍에에 대입시켜 보십시오. 구원을 얻었어도 죄에서 자유케 된 것, 즉 죄의 멍에가 벗겨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죄가 죄인 줄 모르고 완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자기만한 천하에 죽을 죄인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의 권세가 나를 붙들고 있지만 이제는 그 종 된 상태를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새 생명이 자신에게 덧입혀졌다는 사실만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만약 본문에서 말하는 멍에가 죄라면 완전히 죄가 벗겨졌는데도 신자가 다시 죄를 짊어지려고, 그것도 믿음을 강하게 해서 노력한다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본문은 완전히 벗겨진 멍에를 다시 메지 말라는 뜻입니다. 십자가가 복음이 되는 이유는 죄인에게 씌어졌던 멍에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멍에는 죄의 권세가 아니라 죄로 인한 형벌, 즉 지옥 가는 심판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인간이 지옥가지 않으려고 스스로 발버둥치는 모든 것들, 즉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려고 바치는 어떤 치성, 희생, 제물, 선행, 공적도 아무런 의미와 효력이 없다고 하나님 당신께서 선언하셨다는 뜻입니다.
죄의 형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자유케 만드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의가 그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하다면, 다른 말로 인간이 흔히 큰 소리 치듯이 정말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운 인간이 많이 있다면,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서 그런 사람만 골라내면 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런 의를 실현한 자는 없습니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형벌, 즉 멍에를 벗겨주는 대신에 더 이상 인간으로 죄의 권세에 묶이지 않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타락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죄의 멍에를 지고갈 수밖에 없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즉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고 또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걸고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무너뜨린 예수님의 권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형벌에서 자유케 되었기에 더 이상 죄에 질질 끌려 다닐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정작 멍에를 다시 메지 않으려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할 곳은 십자가 외에 덧붙이려거나 대체하려는 다른 복음 위입니다. 관용의 미덕을 주장 내지 자랑하는 신학들입니다. 십자가의 유일성을 왜곡, 타협, 부인하는 어떤 움직임에도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합니다. 거창한 신학 운동을 다시 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 보여야 합니다. 신자에게마저 십자가의 충족성이 보이지 않고선 결코 다른 이의 멍에를 벗길 수 없습니다. 요컨대 복음의 완전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는 아무리 말로 복음을 전해도 먹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7/14/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