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죄로 책(責)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5-47)
예수님은 알다시피 죄로 책잡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선한 일만 하시다가 억울하게 십자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대민족이 대대로 미움을 당하는 원인 중의 하나도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구세주를, 일반에 통용되는 말로는 한 위대한 성자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였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과 여건을 가만히 따져보면 유대인들에게도 억울한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정치 사회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억압당하는 피지배 소외계층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나그네와 이방인도 대접하며 구제에 힘쓰는 선한 자들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당시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유일한 민족이었습니다. 정말로 금식, 기도, 예배에 열심이었고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선조가 가나안 우상숭배에도 물들어 다원주의적 신관을 가졌긴 했지만 예수님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나아진 편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로는 더욱 유대교 전통 보존에 열심이었고 메시아를 대망하는 사상을 키워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세분화한 것도 그런 긍정적 맥락에서 기인했습니다. 따라서 당시로선 유대인들이 실제로도 가장 선하고 의롭고 경건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착취하고 온갖 우상 숭배를 하며 도덕적 타락에 빠진 로마가 죄악의 대표였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진리와 죄를 논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상황과 살아가는 모습을 감안하면 유대인들을 칭찬하고 로마는 정죄해야 마땅함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향해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이라고 정죄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대해선 아무런 질타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끔 두둔하는 듯한 언급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믿음은 진리가 아니며 로마가 사는 방식만 죄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 더 나아가 그러는 자신을 죄로 책잡지 말라고 큰소리(?) 칩니다. 참으로 미묘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행태는 누가 봐도 불합리했습니다. 단적으로 비유컨대 김일성 정권에 대해선 함구하고 북한 주민들더러 죄인이라고 야단친 격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있기라도 하면 미친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말겠는데 북한 주민더러 절대 자기를 잘못됐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셈 아닙니까?
그럼 대체 예수님이 선포한 진리와 죄의 정의는 무엇이었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말 그대로 당신을 책잡지 않는 것이 바로 진리이자 의이며, 그 반대는 비진리이자 죄였습니다. 그분은 죄의 정의를 분명히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요16:9)이라고 내렸습니다. 당신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면 당신 말을 듣게 된다고 했으니, 당신 말을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죄인이 됨은 자명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지 않아 죄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진리와 선은 오직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로부터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진리와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삼위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인간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는데도 지금 유대인들이 바로 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 당시로도 유대인이 로마의 위치에 섰다면 그들과 똑 같거나 더 심할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죄와 진리는 한 개인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정해지는 것이지, 인간 사회에서 통하는 어떤 고상한 도덕, 심오한 철학, 경건한 종교로도 절대 가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장 먼저 아니 평생토록 취해야 할 태도는 오직 하나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만이 절대적 선이요 궁극적 진리입니다. 당신께선 단 한 치도 책잡을 것이 없습니다. 마치 책잡힐 것처럼 보이는 것도 오직 우리의 이해 부족이요 믿음이 없는 까닭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반드시, 아니 당연히 그 반대도 절대적으로 성립한다는 전제 하에 해야 합니다. “책잡힐 것이라고는 전부 제 쪽에 있습니다. 당신의 선과 진리에 비춰 볼 때에 저야말로 거짓투성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 말입니다.
종교적으로 조금만 경건한 자라면 하나님만이 선이요 진리라는 첫째 고백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실상에 대한 두 번째 고백은 함부로 못합니다. 스스로 의롭고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자일수록 더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 경건했던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그 경건(?)했던 인간들에게 거꾸로 죄로 책잡히는 죽임을 당한 십자가에 자신을 비춰보지 않고는, 그것도 성령의 깨우침에 힘입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바꿔 말해 아무리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존경 받으며 다 갖추었어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 장로나 목사의 직분을 맡아 경건하게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자라도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고 인간 주제에 감히 말하는 자는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직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거나 잠시 사단에게 틈을 준 것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인간더러 이 두 가지 고백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 자신하는 자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오히려 하늘 문을 닫고 전혀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도무지 하늘을 바로 쳐다 볼 수도 없다고 통회하는 자는 자유자든 노예이든 바로 하늘로 인도하십니다.
한 마디로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든 무조건 예수님의 긍휼만 소원하는 자만이 의인입니다. 또 비록 날마다 순간마다 책잡힐 죄가 너무 많아도 전혀 죄로 책잡히실 것이 없는 그분께 자백하고 나아가면 용서받을 수 있는 은혜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또 바로 그것이 인간이 영원히 붙들어야 할 유일한 진리입니다. 세상의 사조, 철학, 도덕, 종교에, 특별히 이웃의 평판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10/17/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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