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소모품(?), 이스라엘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출1:12,13)
출애굽 사건에서 정작 억울한 것은 애굽이나 가나안 족속이 아닙니다. 한 민족 전체가 사백 년이 넘도록 다른 나라의 노예가 된 경우는 역사상 전무후무합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하나님을 믿는 유일한 백성이 그랬습니다. 그 까닭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도록 기다리느라 그랬습니다. 또 그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정복전쟁을 감당할 수 있도록 창성케 하고 나아가 가나안이나 애굽의 우상숭배와 격리시킬 목적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은 그랬다 쳐도 애굽의 학대는 갈수록 엄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자주 느끼듯이 하나님은 너무나 오랜 동안 당신의 백성들을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사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은 평생 노예 생활만 하다 죽은 세대가, 편의상 한 세대를 20년으로 잡으면 20 대가 넘는다는 뜻입니다. 손자의 손자들에게 언제 그 절망적 상태가 끝날지 알 수없는, 정말로 아무 소망 없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처럼 단순한 소모품으로 희생 되어야만 하는지요?
신앙의 가장 근본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신앙 활동이 그 위에서 출발해야만 하는, 하나님은 절대로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분은 무조건 옳고 선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믿음의 대상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자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분에게 허물과 실수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우리의 믿음도 그만큼, 우리 쪽의 원인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불완전하므로, 허점이 많아지는 말도 안 되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 4백 년이 아니라 천년만년 노예로 묶어 놓았어도 그분께서 하신 일이라면 옳고 선하며 공평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출애굽의 의미도 항상 옳고 선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조명해야 합니다. 언뜻 이해하는 차원과는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나 오랫동안 외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오랜 동안에 한 번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에겐 오랜 침묵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그분에겐 당신 백성의 사정을 잘 알기에 너무나 괴로운 인내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그만큼 오랜 기간 후에도 당신의 약속이 실현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합니까?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미래를 그분께서 완전히 보장하신다는 것 아닙니까? 자기 백성을 향한 그분의 구원 의지는 영원토록 절대 불변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 사랑과 긍휼에 단 한 치의 영향도 미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온 약속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은 채 땅으로 떨어지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신자의 궁극적인 승리는 그분은 먼 과거부터 미리 마련해 놓으십니다. 태초부터 준비된 계획이 영원에 이르도록 (혹은 이르러야) 완성됩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 각자를 개별적으로 관념하시지만 이스라엘 민족 전부와 전 인류를 감안해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그들 관계에 어떤 오류나 충돌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즉 신자 개인이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그것도 당신의 기분에 따라, 소모품이 절대 아니라 그분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를 지탱하는 기둥 내지 벽돌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애굽에서 평생 노예로 지내다 죽은 자들도 그분 뜻 안에선 결코 헛된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진정으로 그분을 믿고 사랑한 자라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천국 보좌 앞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예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신자 개인이 할 일은 비록 그분의 영원한 계획은 알 수 없어도 어떤 고역 가운데도 그분을 놓치지 않고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는 것뿐이라는 뜻입니다.
7/24/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