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진리로 자유로운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3-15)
일반적으로 신앙을 갖게 되는 동기는 현실의 고난에서 구원 받아 마음의 평강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실제 조사에서도 성인이 되어 신자가 된 자의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합니다. 첫 출발이 그러니 그 후로도 신앙의 초점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 받는 일에 모아지고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만 이어집니다.
예컨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제 내가 믿었고 또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나를 묶고 있는 모든 고난에서 풀어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야말로 믿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신자가 자유하지 못한 이유라곤 믿음이 약해 기도를 게을리 한 것 하나 뿐입니다.
본문은 신자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즉, 예수를 믿으면 자유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기회로 삼아 방종으로 흘러 결국 서로 물고 먹어서 피차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모든 죄를 사해주었기에 이제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잘못 가르친 갈라디아 교회의 이단을 야단친 것입니다.
둘째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서로 물고 먹어서 피차 멸망하는 대신에 서로 세우고 살려서 함께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유케 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는데 장애와 주저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 말씀이 오묘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자유케 되었는데 이제는 서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자유케 된 결과나 목적이 거꾸로 종노릇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아주 쉽게 설명하면 숨 쉬고 누워 자는 행위와 같습니다. 특별히 호흡기 질환이나 불면증이 있지 않는 한 숨 쉬거나 자려고 따로 훈련과 노력을 경주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몸에 붙은, 그것도 평생 동안에 걸친, 습관 태도 생활양식입니다. 나아가 그러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아주 자유스럽게 사랑하다 못해 아예 생활방식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삶 전체가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입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종노릇 하는 데에 장애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아주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어떻게 됩니까? 복음 밖에 있을 때는 서로 종노릇하지 않으려 했기에 즉, 서로에게 자기가 먼저 상전 노릇하려고 했기에 참 사랑은 실종되고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빨리 멸망하려고 피차 상대를 부추기고 있었던 꼴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진리로 자유케 된다고 말하는 바와 지금껏 일반 신자들이 이해하는 것과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할 수 있습니까? 다시 따져 볼까요? “당신은 지금 믿음 안에서 자유롭습니까?”라는 질문의 온전한 성경적 뜻이 어떻게 됩니까? “당신은 지금 누구를 만나도 먼저 종노릇 하는 일에 아주 자유로워져 함께 승리하고 있습니까? 또 그 반대로 당신이 종노릇하지 않거나 상전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너무나 불편한 것을 절감합니까?”
예수님은 진리를 자신과 동격화시켰기에 그분을 모르고선 자유케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의 참 뜻을 알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모든 것을 그 뜻에 걸어야 합니다. 특별히 항상 남들에게 상전 노릇하려 들고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뿌리 깊은 습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합니다. 물론 아직도 남들에게 종노릇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날마다 붙들 것이라곤 예수님의 십자가뿐이지 않습니까?
10/27/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