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총리가 된 진짜 이유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창46:3,4)
흔히 요셉이 어려서부터 큰 꿈을 가졌기에 하나님이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해주었다고 해석합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려는 대망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희망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심해서 갖는 것이지만 자면서 꾸는 꿈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습니다. 요셉이 꾼 꿈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꾸게 해준 그분의 초자연적 계시였지 요셉 본인이 품은 소망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어려서부터 가졌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가꾸었더니 하나님이 이루게 해주었다고 설교하고 교인들도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일생에 대해 당신만의 마스터플랜을 출생하기 전부터 갖고 계셨습니다. 그 플랜에 따라 요셉은 꿈을 꾸었고 내용을 발설했으며, 형들은 시기해 그를 죽이려다 노예로 팔았고, 온갖 우여곡절 끝에 애굽 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는 총리가 되는 순간까지도, 잘하면 감옥에서 풀려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겠거니 기대는 했을지 몰라도 크게 출세해 보겠다는 소망은 가지지, 아니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로선 정말 얼떨결에 총리가 된 것입니다.
정작 요셉 자신은 천신만고의 인생여정을 걷게 된 까닭이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자기가 꿈을 키웠고 그래서 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7절)라고 했습니다. 형제들과 그 자식들, 즉 자기 가문을 기근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본인조차 미처 몰랐던 하나님만의 또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기근이 5년 이상 계속될 것에 대비해 요셉 가문 모두가 애굽으로 이주하려는 순간에 하나님은 아비 야곱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요셉의 일생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야곱의 후손들을 잠시 애굽으로 피신시켰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그 피신 기간이 4백년이 넘어버렸습니다. 그 사이 애굽에 요셉을 모르는 왕조가 일어나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노예로 온갖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열어 놓은 노예의 길을 그 모든 후손이 따라간 꼴입니다. 하나님은 기근이 끝나는 즉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오게 해주셔야 당신께서 하신 약속에 신실하신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대를 받으며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출3:7)서야 모세를 구원자로 세운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계셨는데도 그들이 고난 받는 기간 내내 무엇을 하셨던 것입니까? 계속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시121:4)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아주 안타까워했지만 의도적으로 4대가 넘도록 인내하셨습니다. 그분은 요셉의 말대로, 그로선 구체적인 의미까지는 몰랐겠지만, 그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더 구체적인 계획은 애굽으로 이주할 때 야곱 가문의 상태 특별히 영적인 측면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창38:1,2) 유다는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라고 형제들을 설득하여 요셉을 노예로 팔리게 했습니다. 형제 중에 그나마 가장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런 유다마저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나아가 그의 아들 둘은 여호와의 눈에 악행을 범해 죽음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아비로서 며느리 다말과 통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경이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사건과 보디발의 집에서 누명을 쓰는 사건 사이에 느닷없이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끼워 넣어야 했던 특별한 이유에 주목해야 합니다. 노예로 팔려간 사건, 즉 야곱 가문이 결국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 일이 다말 사건과 연관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그들을 이주시키지 않았다면 유다가 겪었던 비극 이상의 심판이 형제들에게 똑 같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비교적 의로웠던 유다 가문의 영적 부패상이 그랬다면 나머지 형제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지 않습니까?
지금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와 통간한 일의 잘잘못을 따지려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야곱이 가나안 여자와 아무 거리낌 없이 결혼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 가문이 영적으로 가나안의 우상숭배에 물들기 시작한 것을 가장 관념하셨던 것입니다. 유다의 두 아들이 당신의 심판을 받은 것도 바로 그 이유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관영해질 가나안을 진멸할 계획을 미리부터 갖고 계셨습니다. 대신에 그 땅에 당신을 믿고 따르는 당신의 백성들로 당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택한 가문이 도리어 멸망 받을 가나안 백성들과 동질화(同質化)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택한 백성이라도 가나안 족속과 함께 죽음의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비롯한 형제들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와 사정을 감안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합쳐야 겨우 70여명이었습니다. 그것도 갈대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흘러 들어온 유랑민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가나안 족속들의 눈에 벗어나면, 예컨대 자기들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으면, 한줌의 외국인 집시 무리였을 뿐인 야곱 가문을 언제든 쫓아내거나 죽여 버릴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른다 해도 가나안에서 계속 생존 번창하려면 불가피하게 그들에게 물들 수 있고 또 실제로 유다의 두 아들이 벌써 그랬습니다. 한 마디로 야곱 후손들이 가나안에 동화 내지 물들 수밖에 없는 현실적 처지였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야곱의 가문을 그 믿음을 유지한 채 거룩하게 보존해야만 했고 그 최선의 방책은 애굽으로 이주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애굽도 우상숭배 천국이고 또 그곳에서도 야곱가문은 소수의 외국인 신세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이주시키기 전에 바로로 하여금 요셉에게 큰 신세를 지게 했습니다. 만약 요셉 가문이 단순히 기근을 피하려 했다면 이주 자체도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며, 만약 받아주었다 해도 언제든 우상숭배에 동참하도록 명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신세를 진 한 외국인 가문, 그것도 현직 총리의 가족에게 이주를 거부하거나 종교적 문제로 왈가왈부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모르는 왕조가 나타나자 그들은 다시 노예 신세로 전락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외면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요셉을 모르는 왕조인지라 더 이상 야곱 가문에게 신세 갚을 필요도 없고 또 언제든 우상숭배를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큰 공사에 동원되는 노예로서 고센 땅의 별도 거주지에 모여 살 수 있게 섭리하셨습니다.
바꿔 말해 그들의 믿음에 애굽의 간섭을 받지 않고 또 애굽 족속과 통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마치 미국이 보호구역 안의 인디언들이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듯이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노예지만 정신적, 영적 자유를 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과 혈통을 거룩하게 보존시키는 작업을 당신만의 방법으로 실행하셨던 것입니다. 또 4대가 지나도록 놓아두신 까닭도 그들로 애굽이나 가나안 족속과 필적할 만큼 창성하게 할 목적이었습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돌아가도 구태여 그 족속의 눈치를 살피거나, 현실적 이유로 동질화 될 필요가 없으며, 정복전쟁을 충분히 감당할 정도로 강대해진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이해됩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한 뜻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것이며, 또 유다가 다말과 통간한 것도 그 씨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보존해 그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인간적으로 의로웠는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다말이 훨씬 더 의로웠습니다.
큰 꿈을 키워서 믿음으로 고지를 점령하라는 외침은 인간의 소리입니다. 물론 신자가 큰 소망을 가지고 굳건한 믿음으로 그 소망을 이룰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그런 큰 계획(신실한 믿음, 헌신, 순종도 포함해서) 이전에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신묘 막측한 섭리가 항상 먼저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세운 큰 희망이 그분의 뜻과 다르다면 믿음으로 밀어붙여도 좀체 이뤄지지 않습니다. 간혹 소망대로 이뤄졌어도 실제로 드러나는 그분의 뜻은 인간의 생각, 기대, 추측, 분석과 다르거나 엄청 초월할 때가 대부부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뜻을 절대적으로 우선하여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결코 자기 소망을 가꾸어서 믿음으로 총리가 된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비록 자신이 최선을 다해 천신만고를 견디어내었지만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 있는 그분의 뜻과 계획도 무궁무진할 뿐 아니라 영원한 장래에까지 미쳤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마저도 사실상 아주 일부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수건을 가린 희미한 모습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온전한 위로와 권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까닭은 아무리 조금 깨달은 그분의 은혜라도 이미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선하고 거룩한 그분의 영광이 넘치도록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우리를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계획안에선 그렇습니다. 그분의 독생자가 신자 한 사람을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요컨대 성자 하나님과 맞바꾸어진 존재로서 하늘과 땅 어디에도 다 미치는 그분의 절대적 권능이 땅의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우리는 영원과 맞닿은 존재입니다. 우리 후손 모두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렇습니다. 현재 그분께 쓰임 받고 있는 일을 통해 먼 장래에 그분의 고귀한 영광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우리는 모릅니다. 너무 거창하게 따질 것 없이 내 자녀들에게, 아니 내 자신에게 언제 어떤 모습이 될지 추측조차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에게 그분 뜻대로 쓰임 받기를 진정으로 소원만 하고 있으면, 실제로 현재 그렇게 쓰임 받고 있고 또 앞으로 영원한 열매가 맺힐 것만은 분명한, 아니 이미 확정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 앞에 취할 길은 단 하나입니다. 그분의 뜻대로 쓰임 받게끔 자신의 전부를 비워서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가장 먼저 하늘에서 이뤄진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와 자녀들의 꿈을 크게 키워서 총리까지 올라가는 것은 그 다음다음의 문제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내려와 이뤄지지 땅의 뜻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뜻마저 바뀌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그 두 뜻이 일치되었거나 절대 절명의 순간에 빠진 신자를 하나님이 건져주거나,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선 말입니다.
다른 말로 믿음으로 꿈을 키워 믿음으로 밀어붙이기 이전에 겸비해짐, 자신을 부인함, 내려놓음, 그분의 십자가를 짐부터 크게 키워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분만의 비전을 직접 보여주시고 또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 지혜, 도움, 여건도 그분께서 다 마련해 주십니다. 아니 요셉처럼 비전을 전혀 알지 못하고도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날마다 적은 일에 충성하고 있으면, 당신의 큰일을 당신께서 신자를 통해 반드시 이뤄나가십니다.
7/15/2008